첫 문장
단언컨대, 코로나19 재앙이 끝나면 주류 경제학과 각국 경제 당국은 이 사태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내재적 결함이나 사회구조와는 무관하게 외부 요인으로 발생한 위기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p 20 지금의 경제 위기가 단지 코로나19 때문일까?
코로나19는 임계점이었다. 이는 모래 더미를 쌓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모래 더미를 쌓고 쌓다 보면 모래알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떤 시점에 이르면 모래알을 하나만 더 올려도 모래가 와르르 쓸려 내려온다. 포스트케인스주의자는 이런 상태를 [미국의 포스트케인스주의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의 이름을 따서 ‘민스키 모멘트’라고 일컬을지도 모르겠다. 민스키는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라고 주장했다. 안정성이 불안정성을 낳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 불안정성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 모순 때문에 그 불안정성이 거듭거듭 산사태로 이어지는 것이다.
p 41~44 코로나19 팬데믹 후에 V형 회복이 될까?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조치가 풀리면 ‘억눌린’ 수요가 분출해 세계경제가 반등한다는 낙관주의가 여기저기 퍼져 있다. … [그러나] 많은 기업, 특히 소규모 기업들이 팬데믹 이후에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조치가 있기 전부터 미국·유럽 기업의 10~20퍼센트는 영업 비용과 대출이자를 감당할 만큼의 이윤도 벌지 못했다. 이런 ‘좀비’ 기업에게 케이프코드[유명한 여름 휴양지]의 겨울은 마지막 결정타일지도 모른다. …
2008~2009년 대침체 이후 성장 추세가 그 이전 상태로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장이 재개됐을 때 성장률은 이전보다 저조했다.
p 48~50 ‘돈을 찍어 내서’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
부채(국채 발행)를 늘리지 않고 그냥 ‘돈을 찍어 내서’, 즉 중앙은행이 정부 계좌로 돈을 꽂아 줘서 재정지출의 재원을 충당할 수 있다는 견해[이른바 현대화폐론] … 지지자들은 정부가 지출하고 또 지출하면 가계도 더 많이 지출하고 자본가도 더 많이 투자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경제(즉, 자본주의)의 사회적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완전고용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
[그러나] 미국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는 것이 자본비용이 비싸서가 아니라 기대 수익이 낮기 때문이라면, 자본은 값싸지만 수요는 낮은 모순된 상황에서 미국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는 것으로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p 92~99 독점 또는 재벌을 규제하면 불평등과 위기가 해결될까?
세계적 기술 대기업들[구글∙아마존∙애플∙페이스북]은 … 2분기에만 총 339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 이 ‘슈퍼스타’ 기업들을 억제하거나 해체하고 그들의 독점적 시장 지배력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
이윤은 신고전학파나 케인스주의/칼레츠키주의 이론이 주장하듯 독점이나 지대 추구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 착취의 결과다. 마르크스의 이윤율 법칙이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에서 핵심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경제를 강타하기 직전에 이미 주요 자본주의 경제는 2008~2009년 대침체 이후 처음으로 새로운 경기 침체로 치닫고 있었다. 자본의 수익성은 거의 사상 최저였다. … 이는 FAANG[페이스북·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의 ‘시장 지배력’이 모든 이윤을 빨아들이는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으며, 자본이 노동을 충분히 착취하지 못하는 것과 훨씬 더 관련이 있었다.
p 104~108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노동을 대체할까?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경제성과연구소는 유럽·호주·한국·미국 등 17개 선진국의 14개 산업을 연구했[고] … 산업로봇의 도입이 총노동시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저숙련 노동자와 일부 반半숙련 노동자의 고용을 감소시킨다는 증거를 내놨다. … 요컨대 노동시간이 준 것이 아니라 노동강도가 강화됐고 실업이 증가했다. 사실, 미국에서 노동시간은 1970년대 이래 계속 증가해 왔다. …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자율적 인공지능과 완전히 자동화된 로봇이 빠르게 도입되는 데 자본주의 체제 자체도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신기술을 위한 재원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고 고된 노동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익성을 높일 만한 데 투입되기 때문이다.
p 213~214 피케티의 자본 수익률 개념으로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을 설명할 수 있을까?
피케티는 통계자료를 통해 자본주의 역사 내내 자본이 전례 없이 극심한 수준의 불평등을 일으켜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런데 … 피케티는 자본과 ‘부富’가 같은 것이 아님을 보지 못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자본을 측정할 때 주택과 부동산 같은 부를 제외하면, ‘자본’ 수익률이 항상 경제성장률보다 높다는 피케티의 전망은 허물어진다. …
피케티에게 자본은 ‘부富’와 같은 말로,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뜻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을 자본주의 생산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타당성을 검증하려면, 설사 경험적 방법이라 할지라도 이런 자본의 기본 개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주택’을 자본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생산수단이 아니라 소비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금융자산’이나 ‘토지’도 마찬가지다.
p 227~229 《자본론》과 오늘날의 계급투쟁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은 하락해 왔다. 나는 영국은행이 제공한 통계를 이용해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출판한 이래 150년 동안 영국 자본의 전반적 이윤율이 하락했다는 사실을 보였다. … 이 시기들은 계급투쟁의 강도를 그려 보는 데서 결정적 지표들을 제시한다. …
작업장에서 계급투쟁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벌어졌을 때는 자본가들의 수익성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이전의 회복기 동안 노동운동이 강력한 상태로 있을 때였다. 이것이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기 가장 좋은 객관적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