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알아크사 홍수’ 작전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주고 있다.
22쪽, 24쪽
‘이스라엘 비판은 곧 유대인 혐오’라는 논리는 이스라엘 옹호자들이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다. … 유대인이 아닌 다른 집단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과 똑같은 일을 벌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 해도 팔레스타인과 중동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의 크기와 내용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분노와 저항은 유대인 혐오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30~31쪽
유대인 혐오는 오늘날에도 심각한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 않으려면 시온주의의 본질이 인종 청소이고 시온주의가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추진됐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해야 한다.
44~45쪽
이스라엘이 말하는 “비례성”은 매우 기이한 개념이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여 왔다. 2008~2009년 이스라엘의 폭격과 침공은 약 1400명의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를 냈다. 2012년 제2차 폭격은 174명의 사망자를 냈다. 두 공격보다 훨씬 유혈 낭자했던 2014년 제3차 공격은 공중폭격과 지상군 침공으로 2250명을 죽였다. 팔레스타인인들도 죽음을 슬퍼하고 정의와 복수를 바랄 권리, 이스라엘과 결코 대등할 수 없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58~59쪽
1951년에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츠>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이스라엘을 강화하는 것은 서방 열강이 중동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은 경비견이 될 것이다. … 도를 넘어선 결례를 서방에 범한 이웃 국가들을 서방 열강이 어떤 이유에서든 못 본 체하기를 선호하는 때가 오면, 이스라엘은 그런 국가들을 응징하는 일을 듬직하게 맡을 수 있다.”
94~95쪽, 107쪽
네타냐후 연정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세력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퍼뜨리는 담론에 따르면, 네타냐후의 연립정부는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건국 원칙으로부터의 일탈을 나타내고 대법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은 이스라엘 “민주주의”의 주요 기둥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묘사를 인정할 팔레스타인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 네타냐후의 연정과 극우 장관들은 시온주의 프로젝트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다. 그들은 그 프로젝트의 산물이자 추진자들이다.
98, 100쪽
식민 정착자 사회의 우경화 추세의 근저에는 시온주의 프로젝트 자체의 위기가 있다. …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 사회의 여러 부분을 이간질해서 각개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전략은 2021년 5월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들고일어난 ‘단결 인티파다’의 분출로 잿더미가 됐다. 마침내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진압’당했거나 굴복했다는 이스라엘 국가와 정착자들의 환상을 모두 산산조각 내 버렸다.
104쪽
식민 정착자 국가의 관심은 어떻게 해서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분쇄하는 것이지만,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아랍 정권들과 중동 제국주의 질서의 안정성을 걱정해야 한다. 이런 긴장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다.
136쪽
적잖은 활동가들은 서방이 로비 때문에 이스라엘을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함정을 피하려면 이스라엘의 본질과, 이스라엘과 서방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한 폭넓은 분석이 필요하다.
161쪽
이슬람 공포증은 일종의 인종차별주의로, 이슬람이 민주주의, 인권, 여성 평등, 성소수자 평등 같은 서구의 계몽주의적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견해다. 그런 견해에 따르면, 무슬림은 관용이 부족하고 폭력적이며, 이슬람에는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워도 뭔가 후진적인 면이 있어서 자유주의적 가치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의 인종차별 반대는 무슬림 앞에서 멈춘다.
182쪽
이슬람주의를 이해하려면 그 사상만 살펴보려 해서는 안 된다. 그 사상이 존재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이고, 그 사상이 대표하는 계급과 열망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단일한 이슬람주의 사상 같은 것은 없다.
193쪽
1970년대 런던에서는 아시아계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을 거의 착용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쯤 지난 때 런던에서는 많은 아시아계·아랍계 젊은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한다. … 요즘 젊은 여성들이 히잡 착용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슬림을 상징하는 것이 모두 공격받는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205쪽
국제적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일각에서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으로 시작된 팔레스타인 투쟁을 지지해야 할지 몰라 처음에 크게 망설였다. … 그들은 하마스가 아무리 2017년에 강령을 개정했어도 여전히 이슬람 국가를 지향할 것이고, 유대인 혐오적일 것이고, 성차별적일 것인 데다, 여전히 성소수자 혐오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마스 지지가 별로 내키지 않았다. 특히, 민간인 납치와 인질 억류가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었다.
220쪽
미국과 서방 지도자들, ‘국제사회’는 ‘두 국가 방안’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 방안은 사기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진정한 국가를 허용할 생각이 없다.
236쪽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정의는 오직 이스라엘 국가를 분쇄하고 비종교적 단일 민주국가로 대체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 전역의 노동자·빈민의 혁명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바로 그런 거대한 투쟁을 촉발할 기폭제 구실을 할 수 있다.
268~269쪽
2011~2012년과 2019~202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 혁명의 물결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시민 항쟁”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거리 시위의 규모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팔레스타인 저항의 사회적 측면을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이 저항이 이스라엘 국가의 억압 기구를 곤경에 빠뜨리고, 마비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분쇄할 수 있을 만한 사회 세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277~278쪽
이스라엘 유대인 노동계급 사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하는 인종차별의 지배력이 확고부동해 보인다. 이 인종차별적 관념은 자체적으로 지속되는 악순환 속에서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데, 이는 그런 관념이 전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관념을 낳는 물질적·사회적 과정이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정치경제학을 계속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307쪽
민주주의를 쟁취한 과거의 대중 항쟁과 혁명운동의 경험을 보면, 조직 노동자들의 대중파업이 권위주의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도록 무너뜨리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모델을 역사적 팔레스타인에서만 일어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에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총파업이나 집단행동으로 인한 타격을 다른 지배 체제들보다 훨씬 더 잘 견딜 수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309쪽
팔레스타인 해방은 단지 어떤 외부 세력이 중동에 구축해 놓은 압제의 보루를 습격하는 식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동 국가의 주권과 권위를 거슬러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 국가들이 다양한 정치적 형태를 띠고 있고 다양한 부르주아적 정치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예컨대 요르단은 왕정이고 오랫동안 합법적 이슬람주의 반정부 운동을 용인해 왔으며, 레바논은 종단·종파별로 나뉜 군벌들의 금권정치 체제이고, 이집트와 시리아는 권위주의적 군사독재다)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근본적으로 계급 문제임을 시사한다
330쪽
이집트의 예인선 조종사들과 도선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집트 정권이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인종 학살을 두고 이러저러한 우려와 변명을 늘어놓지만, 포트사이드나 수에즈에 컨테이너선을 배치해 수에즈운하를 막아 버리기만 하면 세계무역의 주요 항로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서방 정부에 압력을 가해 그들로 하여금 휴전을 이끌어 내는 데 온 신경을 쏟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