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평전 2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Lenin 2 : 1914-1917 All Power to the Soviets

토니 클리프 지음 이수현 옮김 2009-07-30 576쪽 21,000원 신국판 9788979660616 03300 책갈피

이 책은 토니 클리프의 레닌 4부작 중 두 번째 책으로 2004년에 출간된 ≪당 건설을 향하여 : 레닌 1893~ 1914≫(북막스)의 후속편이다. 이 책은 레닌의 생애 중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부터 볼셰비키당이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는 1917년 10월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의 러시아 혁명 기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레닌의 모습은 옛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해석과도 다르고 최근 슬라보예 지젝이나 일부 자율주의자들이 새롭게 해석하는 레닌의 모습과도 다르다. 전자가 레닌을 당대 현실을 초월한 성인(聖人)처럼 묘사하고 그의 말과 글을 종교 경전이나 교리처럼 떠받든다면, 후자의 해석은 나름대로 색다르고 독특하지만 대부분 아전인수에 가깝다.

그와 달리 이 책은 러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사료와 문헌을 꼼꼼히 살펴보고 주의 깊게 분석한 바탕 위에서 1960년대 이후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역사학 같은 사회사적 연구 성과도 흡수해 레닌의 장점과 정치적 위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오류와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레닌의 진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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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레닌이 봉인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돌아오다

2월 혁명의 승리 이후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오기까지 5주가 걸렸다. 크룹스카야는 “2월 혁명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일리치는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어 애를 태웠다”고 회상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볼셰비키가 자국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터였다. 이 점은 일리치에게 명백했다. 그는 콜론타이에게 “우리가 이 빌어먹을 스위스에서 빨리 떠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오” 하고 썼다. 그리고 이 점을 고려해서 그는 3월 16~17일에 콜론타이에게 쓴 편지들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가는 최상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의논했다.

합법적 방법이 없었으므로 불법적으로 여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혁명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일리치는 잠을 못 이뤘다. 밤을 지새우며 온갖 기상천외한 계획들을 세웠다. 비행기를 타고 갈 생각도 해 봤다. 그러나 그것은 백일몽에 불과했다. 구체적으로 조금만 따져 봐도 그 계획의 비현실성이 금세 드러났다. 먼저 중립국 국적의 외국인 여권이 필요했다. 스웨덴 여권이 안성맞춤이었다. 스웨덴 사람을 의심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스웨덴 동지들을 통해 스웨덴 여권을 구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스웨덴 말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마 간단한 말은 몇 마디 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금세 탄로 나기 십상이었다. 나는 레닌에게 “당신이 잠을 자야 꿈속에서 멘셰비크들을 만나면 욕을 하고, ‘악당들’이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그들의] 음모를 모조리 폭로할 텐데” 하고 놀려 댔다.

그런데 마르토프가 러시아에 돌아갈 수 있는 기막힌 방안을 생각해 냈다. 러시아에 붙잡혀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쟁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그 대신 러시아 망명객들이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런 귀국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레닌만이 그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독일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로 돌아가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모험이었다. 적과 내통했다는 비난을 받을 위험이 농후했다. 따라서 ‘봉인 열차’를 이용하려면 엄청난 담력과 의지력이 필요했다. 레닌에게는 그럴 만한 의지와 용기가 있었다.

3월 17일 레닌은 “여기를 뜰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스위스의 [러시아인] 망명객들과 독일 포로들을 교환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3월 18일 그는 자신은 준비가 끝났다고 선언하며, 러시아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동료들에게 알렸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심지어 지옥을 거쳐 가는 한이 있어도 돌아가야 해” 하고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외무장관 밀류코프가 독일 영토를 지나 여행하는 러시아 시민은 누구든지 사법 처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혁명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놓치지 않으려는 레닌의 의지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3월 27일 32명의 볼셰비키가 ‘봉인 열차’를 타고 독일을 통과하는 모험 길에 올랐다.

한 달 남짓 뒤에 마르토프도 용기를 내어 레닌의 뒤를 따랐다. 5월 5일 마르토프를 비롯한 많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지도자인 나탄손, 루나차르스키, 발라바노바, 마누일스키 등이 레닌처럼 봉인 열차를 이용했다. 이 257명의 승객 중에는 멘셰비키가 58명, 분트가 48명, 사회혁명당이 34명,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가 25명, 볼셰비키가 18명, 무정파가 22명이었다. 6월 7일 세 번째 봉인 열차가 스위스를 떠나 러시아로 향했다. 이 열차에는 멘셰비키 29명, 분트 25명, 사회혁명당 27명,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26명, 볼셰비키 22명, 무정파 19명, 정치적 망명객이 아닌 일반인 39명 등 206명이 타고 있었다.

레닌은 용감했다. 그는 혁명의 발전을 위해 대담하게도 독일 최고사령부와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 사이의 갈등을 이용했다. 루덴도르프[당시 독일의 군사 정책과 전략을 주도한 독일군 참모차장]는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군대가 해체되기를, 그래서 독일의 군사 전략에 숨통이 트이기를 바랐다. 레닌은 루덴도르프의 계획을 역이용했다.

레닌의 계획과 독일 최고사령부의 계획이 교차하는 역사적 사건을 적극 주선한 인물은 한때 혁명가였던 파르부스였다. 러시아 태생의 이 독일 사민당원은 1905년 혁명에 적극 가담했으나 그 뒤 군수산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었고 이제는 독일 외무부의 러시아 담당 비공식 고문 노릇을 하고 있었다. 2월 혁명 며칠 뒤에 코펜하겐 주재 독일대사이자 파르부스의 친구인 브로크도르프란차우는 파르부스의 조언에 따라 독일 외무부에 다음과 같이 전보를 보냈다. “독일은 러시아에서 최대한 많은 혼란을 조성해야 한다.” 러시아 혁명에 공공연히 개입하는 행위는 피해야 하지만,

우리가 …… 온건파 정당들과 강경파 정당들 사이의 적대감을 부추기기 위해 은밀히 손을 써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러시아에서 강경파가 득세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 강경파가 득세하면 변혁이 불가피해질 것이고, 변혁이 일어나면 러시아 제국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브로크도르프란차우는 러시아의 강경파를 지지하는 것이 독일에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혁명이] 더 철저하게 추진되고 강화조약 체결도 더 앞당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때” 3개월쯤 지나면 “[러시아군의] 해체가 충분히 진전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 군대가 러시아의 권력을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루덴도르프도 그렇게 생각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지 몇 주 뒤에 루덴도르프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 지은이] 군사적으로 보면 러시아 혁명은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전황이 우리에게 유리해졌다. 이제 우리는 러시아군의 공세에 대비할 필요가 없어졌고, 따라서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빼낼 수 있게 됐다. …… 동부 전선에서 군사적 압력이 완화되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이 병력을 서부 전선에 추가 투입하면 세력 관계를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어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자신감을 갖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독일 당국의 근시안적 태도는 정말 놀라울 정도다. 어떤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것이다. 독일 당국의 책임자들은 볼셰비키와 협력하는 것이 일종의 불장난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독일 제국이 러시아의 사회혁명을 용납하면 그 여파가 언젠가는 독일 제국 자체를 강타할 수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독일 정부 당국의 문서들을 보면 그런 점을 검토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에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고 레닌과 그의 사상의 진정한 본질을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

독일 정치의 주된 문제점은 잘못된 계산에서, 시간의 제약에서 비롯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우선 동부 전선에서라도 평화를 확립해야 한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독일 정부의 생각이었다. 볼셰비키는 독일과 단독 강화조약을 신속히 체결할 것이고, 그러면 동부 전선의 긴장이 크게 완화될 것이다.

로이드조지는 이런 피상적인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전쟁에서는 장기적 전망이 힘들다. 오로지 승리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이 얻어야 할 교훈은 근시안적 상황 파악과 일시적 우위 확보에 몰두하다가 미래의 확실한 재앙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상반된 역사적 계획, 즉 레닌의 계획과 루덴도르프의 계획이 교차했다. 둘 중에 누가 더 멀리 내다보고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이겼는지는 분명하다. 10월 25일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았다. 1년 뒤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독일 대중은 루덴도르프를 타도했다.

레닌은 봉인 열차 이용에 따른 정치적 위험 ― 독일 첩자로 몰릴 수 있었고, 실제로 레닌이 독일 첩자라는 비난이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 을 무릅씀으로써 원대한 통찰력과 정치적 용기를 모두 보여 주었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에서 4월 테제가 부결되다

4월 6일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4월 테제에 대한 반응은 아주 안 좋았다.

카메네프 : 테제에는 구체적 지침이 없습니다. ……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닙니다. ……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맞지만, 서유럽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러시아는 너무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될 것입니다.

골로셰킨 : 강령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테제는 강령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실랴프니코프 : 테제는 두 부분으로 돼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태도를 말한 앞부분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뒷부분은 실천적 구호들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

지노비예프 : 당황스럽습니다. ……

스탈린 : …… 사실이 아니라 계획일 뿐입니다. 따라서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여러 해 동안 레닌과 함께 해외에서 지내며 볼셰비키의 중앙 기관지 <소치알 데모크라트>의 편집부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지노비예프조차 레닌의 편이 아니었다.

거의 볼셰비즘의 탄생 때부터 볼셰비크였던 카메네프는 “볼셰비키 내에서 항상 타협주의적이고 수동적인 우파”였다고 수하노프는 지적했다.

정치적 인물로서 카메네프는 분명히 비범한 그러나 독창적이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날카로운 구석이나 탁월한 지적 능력, 독창적 표현력이 없었던 그는 지도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는 대중을 이끌고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홀로 남겨지면 그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동화되곤 했다. 그는 항상 옆에서 끌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때때로 그가 멈춰서더라도 그것은 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 카메네프는 혁명 초기에 레닌 앞에서 뒷걸음질쳤고, 10월 혁명 때도 뒷걸음질쳤고, 혁명 후에는 전반적 혼란과 공포정치 앞에서 뒷걸음질쳤고, 볼셰비키 정권 2년째에는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징발해 도시 노동자들에게] 공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항상 그는 굴복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었던 그는 최근(1918년 가을에) 제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정당화하려고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레닌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됐습니다. 따지고 보면, 레닌은 항상 옳았습니다. 그의 예측이나 정치 노선이 틀린 것처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마지막에 보면 그의 예측과 정치 노선은 모두 옳았습니다.”

이론적 시야가 좁았던 스탈린도 지도적인 ‘고참 볼셰비키’ 사이에 널리 퍼진 보수적 분위기에 순응했다. 그의 주된 특징은 상상력 부족이었다. 수하노프는 스탈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소비에트] 집행위에서 활동하는 동안 …… 스탈린은 이따금 슬그머니 나타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희미한 그림자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나만 그런 인상을 받은 게 아니었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정말이다.”

볼셰비키당의 최고 지도부라고 해서 보수성, 즉 일상 활동에 매몰되는 타성routinism에서 당연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페트로그라드 위원이었던 V N 잘레즈스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레닌의 테제는 마치 폭탄을 터뜨린 것 같았다.” 잘레즈스키는 레닌이 따뜻하고 성대한 환영을 받은 뒤에 철저하게 고립됐다고 단언한다. “그날[4월 4일 ― 지은이] 레닌 동지는 우리 대오 안에서도 동조자를 찾을 수 없었다.”

치혼은 “많은 동지들이 레닌이 러시아와 연락 두절 상태였다는 것, 레닌이 현재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 등등을 지적했다”고 회상했다. 지방의 볼셰비크인 레베데프는 처음에 볼셰비크들이 레닌의 선동을 “몽상으로 여겨” 비난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레닌이 오랫동안 러시아와 연락이 끊긴 탓으로 돌렸다.”

4월 8일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는 레닌의 4월 테제를 찬성 2표, 반대 13표, 기권 1표로 부결시켰다.

레닌이 당을 설득해 4월 테제를 받아들이게 하다

이렇게 불길하게 출발했지만 레닌은 놀라울 만큼 짧은 기간에 대다수 당원들을 자신의 견해로 설득할 수 있었다.

최초의 승리는 페트로그라드 시협의회(4월 14~22일)에서 찾아왔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레닌의 테제에 이견을 제시하는 대의원들이 잇따랐다.

슈트코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의 민주주의 독재, 이것이 우리의 근본 원칙입니다. 우리의 혁명을 현실주의적으로 지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민주주의를 조직해야 합니다.”

푸틸로프 공장 볼셰비키 위원회의 극좌파 지도자인 바그다테프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사회혁명?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최소 강령만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없으면 달성할 수 없습니다.”

페트리코프스키는 레닌을 블랑키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칼리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고참 볼셰비키, 레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옛 레닌주의가 완전히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레닌 동지가 고참 볼셰비키를 장애물 취급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레닌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대의원은 루드밀라 스탈뿐이었다. ……

스탈의 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비보르크의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권력을 이용해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레닌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도시[의 노동자]와 농민이 단절되고, 그래서 1917년이 1871년 파리코뮌 사태의 재연으로 끝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의 반발은 완강하지 않았다.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레닌의 태도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페트로그라드 시협의회에서 거의 모든 발언자가 레닌의 주장을 반대하는 등 레닌에 대한 지지가 명백히 부족했음에도 임시정부에 대한 결의안 채택에서 레닌은 찬성 33, 반대 6, 기권 2로 상당히 큰 표 차로 승리했다. 협의회 뒤 5월 초에 실시된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집행위원회 선거에서 유일하게 선출된 ‘고참 볼셰비키’는 3월에 우파인 다수파에 반대했던 당원들이었다.

레닌이 자신의 주장으로 당을 설득한 또 다른 계기는 4월 24~29일 열린 제7차 전 러시아 [볼셰비키]당 협의회였다. 여기서도 여전히 4월 테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

긴 시간 토론 끝에 레닌이 결국 승리했다. 소수의 우파 그룹은 여전히 임시정부를 “감시하며 통제하는” 방침을 지지했지만 압도 다수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시키기 위해 투쟁하자는 레닌의 주장을 지지했다. 또, 대의원들의 압도 다수는 전쟁 문제와 관련해서도 레닌을 지지했다. 협의회는 전쟁이 여전히 제국주의 전쟁이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전쟁에 철저히 반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협의회는 ‘혁명적 방위주의’를 비난하고, 전쟁은 권력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넘어온 뒤에 민주적 강화와 함께 끝나야 한다고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협의회는 해외의 혁명을 촉진하는 방법으로서 전선에서 교전국 병사들의 대중적 친교를 옹호했다. 이 결의안은 기권 일곱 명을 제외한 대의원 전원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그러나 협의회 전에 레닌이 모든 쟁점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재 상황에 대한 결의안’은 찬성 71, 반대 39, 기권 8의 비교적 근소한 차이로 통과됐다.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결의안은 기권 두 명을 제외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협의회 막바지에 지노비예프가 “5월 18일 (스톡홀름에서) 열릴 예정인 치머발트 지지자들의 국제 대회에 참가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반대 한 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레닌이었다.

레닌의 승리가 완전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 9인 가운데 우파가 네 명(카메네프, 노긴, 밀류틴, 페도로프)이나 됐다. 나머지 중앙위원들은 레닌, 스베르들로프, 스밀가, 지노비예프, 그리고 이제 견해를 바꿔서 레닌을 지지한 스탈린이었다. 중앙위원 선거에서 우파의 득표수는 꽤나 인상적이다. 중앙위원 선거 결과는 레닌 104표, 지노비예프 101표, 스탈린 97표, 카메네프 95표, 밀류틴 82표, 노긴 76표, 스베르들로프 71표, 스밀가 53표, 페도로프 48표였다.

중앙위원 선거 때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일부 대의원들이 카메네프의 선출에 반대한 것이다. 한 대의원은 전쟁 초기에 카메네프가 법정에서 보인 행동 ― 다른 볼셰비키 피고인들과 달리 법원에 잘 보이려고 애를 쓰거나 증거를 제출한 것 등 ― 과 3월 15일치 <프라우다>에 실린 카메네프의 기사를 거론하며 그가 중앙위원으로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과거에 이 두 문제에 대해 카메네프를 비판했었지만 이제는 그를 옹호했다. 레닌은 간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창당 이후 계속 당에서 활동해 온 카메네프는 그냥 제쳐두기에는 너무 소중한 존재였다. 여기에는 아마 카메네프의 성격에 대한 레닌의 오판도 한몫했을 것이다. 몇 달 뒤인 10월 혁명 직전에 레닌은 카메네프를 당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친구든 적이든 레닌의 정치적 관계에는 개인적 유감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볼셰비키당이 항상 레닌의 뜻을 따르는 획일체라는 신화에 대해

스탈린주의 신화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극소수의 사소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항상 레닌의 뜻을 따랐다고 한다. 볼셰비키당은 사실상 획일체monolith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레닌은 당원들을 설득해서 지지를 얻고자 거듭거듭 투쟁해야 했다. 4월에 레닌의 주된 과제가 당 고위 지도부의 보수성을 극복하는 것이었다면, 6월 말과 7월 초에는 기층 지도자들과 당원들의 혁명적 조급성에 맞서 투쟁해야 했다.

많은 경우에 당원들은 당 규율에 노골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지만 중앙위 방침의 취지에 어긋나게 행동했다. 예컨대, 8월 27일 열린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회의에서 M I 칼리닌은 7월 초에 볼셰비키 선동가들이 대중을 자제시키는 척하면서 사실은 행동을 부추기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군사 기구 지도자인 네프스키도 몇 년 뒤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지금 일부 동지들은 7월 사태를 맨 처음 시작한 것은 누구인가, 중앙위인가 군사 기구인가, 아니면 운동이 자생적으로 분출했는가 하고 묻는다. …… 군사 기구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인 우리, 특히 포드보이스키, 나, 메호노신, 벨랴코프 같은 능동적인 활동가들이 선전과 선동을 통해, 그리고 군부대에서 우리의 엄청난 영향력과 권위를 이용해 시위를 부추겼다. …… 그래서 (7월 1일) 기관총 연대 병사들의 시위 계획을 알게 된 군사 기구가 가장 인기 있는 선동가 축에 드는 나를 보내 대중에게 시위를 벌이지 말라고 설득하게 했을 때 나는 그 지시를 따랐다. 그러나 오직 바보만이 내 말을 듣고 시위에 나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레닌이 봉기의 기술적 문제에서 저지른 오류들

레닌은 전략적 결정, 즉 권력 장악을 위한 무장봉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절대로 옳았다. 그러나 그의 전술적 제안들, 즉 세부 계획들에는 결함이 많았다.

혁명이 모스크바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나중에 입증됐듯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가 성공한 뒤에도 모스크바에서는 볼셰비키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모스크바 봉기는 훨씬 더 오래 끌었고 희생자도 훨씬 많았다.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가 승리한 뒤에도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는 꼬박 8일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유혈 낭자한 전투도 치러야 했다. …… 페트로그라드보다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기가 더 힘들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모스크바는 전선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었고, 페트로그라드와 달리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과 수병들이 없었고, 식량 공급 부족에 따른 고통도 훨씬 덜했다. 모스크바의 프롤레타리아는 페트로그라드의 대규모 공장들에 비하면 더 작은 공장들에 흩어져 있었다. 모스크바의 프롤레타리아는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보다 훨씬 덜 계급의식적이었다. 모스크바 노동자들의 40퍼센트가 농촌에 땅뙈기를 갖고 있었고 22.8퍼센트는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의 경우는 각각 16.5퍼센트와 7.8퍼센트였다). 볼셰비키가 대중적 노동자 정당으로 성장하는 시기 ― 1912~1914년 ― 에 모스크바는 페테르부르크보다 한참 뒤처졌다. 앞서 지적했듯이, 전시에 정치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비율이 모스크바는 9퍼센트 미만인 반면 페트로그라드는 74퍼센트였다.

1917년 10월까지도 모스크바에서는 사회혁명당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대중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프롤레타리아와 군인들이 2월 혁명의 세례를 경험한 반면 모스크바에서는 프롤레타리아와 군인들이 그런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됐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연대들을 전선으로 보내겠다는 위협은 병사들의 혁명적 정신을 더욱 부추겼다. 모스크바 수비대는 그런 위협에 시달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 지도부가 모스크바 지도부보다 더 뛰어났다. 레닌,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 등 가장 탁월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다. 모스크바 지도부는 분열돼 있었다(이 점은 페트로그라드 지도부도 마찬가지였다). 부하린은 레닌, 트로츠키와 같은 노선을 취한 반면, 노긴과 리코프는 동요했다. 모스크바에서는 10월 25일에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립됐다. 따라서 봉기 실행과 관련된 레닌의 기술적 조언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앞서 보았듯이, 모스크바에서 먼저 공격을 시작한다는 계획을 포기한 레닌은 헬싱포르스에서 봉기를 시작해서 북쪽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계획도 비현실적이었다.

레닌의 방법은 근본에서는 옳았다. 봉기를 기예로 다루는 태도는 일관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레닌은 숨어 지내느라 실제 상황에 둔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전략적 결정을 강조하다 보니 ― 그에게 익숙한 막대 구부리기 ― 세부 사항들을 포착하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도 있다. 핵심 고리, 전략적 선택에 집중하고 투쟁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레닌이 심각한 전술적 오판을 하게 된 것은 거의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 봉기를 시작하라거나 민주협의회 기간에 정부 인사들을 체포하라는 제안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오류는 당 기구들을 통해 그리고 당의 이름으로 봉기를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그리고 봉기가 승리한 뒤 소비에트 대회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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