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하먼의 마르크스 경제학 가이드 Economics of the Madhouse: Capitalism and the Market Today

크리스 하먼 지음 이승민 옮김 2010-06-20 208쪽 9,500원 신국판 변형 9788979660739 03320 책갈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이자 《민중의 세계사》(책갈피)의 지은이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크리스 하먼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하먼은 자본주의가 아직도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그 ‘뒤죽박죽된 세계’임을 매우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초 위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움직임을 명쾌하게 분석한다.

무엇보다 경제학이 ‘우울한 학문’이라는 칼라일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풍부한 실례를 들어 가며 누구나 읽기 쉽게 설명한 것은 이 책의 가장 커다란 강점 중 하나다.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누구나 반드시 이 책을 읽어 봐야 한다.

본문 중에서

경제학의 빈곤

많은 사람들은 전문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 당연히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라고들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의 설명에 기대를 걸었다가는 쓰라린 환멸만 맛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유력한 자본주의 경제학파는 ‘한계효용marginal’학파나 ‘신고전’학파로 일컬어진다. 전문 학부나 성인교육 강좌,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 이런 학파의 이론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학파에서는 자신들의 경제학이 전문 분야, 즉 “부족한 재원과 이것을 보완해 줄 다양한 사용법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문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생산이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수요는 개인들의 선택, 즉 그들이 돈을 쓰는 방식에서 나타나듯이 상이한 물건들에 대한 선호도의 차이에 따라 좌우된다. 공급은 상품의 생산비 ―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과 그들이 작동하는 기계의 사용비 ― 에 따라 좌우된다. 따라서 사람들이 지출할 준비가 돼 있는 추가extra 금액과 추가extra 생산비가 맞아떨어지기만 하면 생산이 이뤄질 것이다.

이 이론대로라면, 수요와 공급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두 그래프가 만나는 지점에서 최종적으로 생산이 이뤄지는 기가 막힌 그래프를 그릴 수 있다. 문제는 이들 그래프가 우선 수요와 공급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무것도 설명하는 게 없다는 점이다. 수요의 측면에서 보면, 이 그래프는 왜 어떤 사람들(부유한 토지 소유주들이나 재벌들, 사기업 총수들)의 욕구는 ‘유효 수요’, 다시 말해서 현금으로 뒷받침되는 수요로 해석되면서 다른 사람들(실업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빈민들)의 절망적인 필요는 무시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급의 측면에서는, 자원이 넘쳐나는데도 왜 극도로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한계효용학파’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의 소득 수준과, 따라서 그들의 수요 수준은 그들 각자가 재화의 생산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노동이 창출하는 초과extra 가치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어떤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들이 노동한 대가로 지불받는 것보다 열 배나 스무 배 더 많은 돈을 받고,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재산을 소유하기만한 사람들이 돈을 받는 것을 문제 삼지 않은 채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주식 소유주들이나 대부업자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가?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고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노동뿐만 아니라 자본도 생산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재화 창출에 기여한 바에 따라 보수를 받듯이, 자본가도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각각의 ‘생산요소’는 그 ‘한계수익 산출량marginal output’에 상당하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논의는 아무것도 ― 자본 소유주들이 더 속 편히 지낼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 해명하지 못한다. 이것은 실제로 부자들은 더 부유해져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는 2’라든가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식의 동어반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자들더러 자본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자본이 생산하는 ‘한계수익 산출량’을 언급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한계수익 산출량’은 어떻게 측정하는지 물어 보면, 그들은 그것을 생산하는 데 소모된 자본의 가치를 언급한다. 결국에는 사실상 “자본의 가치는 자본의 가치와 같다”거나 “이윤은 이윤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통 경제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현재 어떤 물건이 사고 팔린다는 것뿐이다. 왜 어떤 물건은 생산되는데 어떤 것은 생산되지 않는지, 왜 어떤 사람들은 부자인데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지, 왜 어떤 상품은 팔리지 않고 쌓여 있는데 그것이 극도로 필요한 사람들은 갖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정통 경제학자들은 왜 어떤 때는 호황이 생기고 어떤 때는 불황이 생기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줄 수 없다.

케인스의 장점과 약점

케인스주의의 주장에도 항상 한 가지 약점 ― 미국인 폴 바란과 폴 스위지처럼 케인스주의의 물을 먹은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한테서도 이런 약점이 발견된다 ― 이 있었다. 그들은 왜 투자가 그렇게 낮게 유지돼 결국 더 깊은 불황과 더 왜소한 호황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이것은 케인스주의자들이 정통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너무 많이 수용한 나머지, 임금 삭감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장기적인 이윤 하락 압박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케인스 자신은 ‘자본의 한계효율’이라고 지칭했던 것의 하락에 대해 언급하고, 앞으로 그런 경향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숭배자들 대부분은 이 견해를 내팽개치고, 그의 저술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어떤 본질적인 경향보다는 사업가들의 심리적 조건 탓으로 위기의 책임을 돌리는 구절을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 그 구절에서는 기업들이 투자에 나서는 것이 ‘야성적 혈기’ ― 행동하지 않는 것보다는 행동하려는 자생적 충동 ―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야성적 혈기가 둔화하고 자연스러운 낙관이 사그라지면 …… 기업은 쇠퇴해 사멸할 것이고”, 그 결과 “불황과 공황이 과도하게 확장된다.”

그래서 케인스주의자들은 대기업 경영자들 사이에서 미래 전망에 대한 낙관적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정부가 경제에 제한적으로 개입한다면 불황으로 기우는 추세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황기에는 정부가 돈을 지출하고 임금 삭감을 못하게 말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시장의 앞날이 창창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정부가 상품 시장을 창출하고, 기업들이 생산을 확대하게 하고, 투자를 북돋울 수 있을 것이다. 한술 더 떠서, 경제가 불황에서 회복됨에 따라 부가 증대돼 노동계급의 소득과 이윤이 모두 상승할 거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앞서 살펴봤듯이, 케인스주의 사상은 1930년대 불황 이후 사반세기 동안 주류 경제사상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1970년대 중반의 위기와 더불어 그들은 영향력을 잃게 됐다. 정부가 모든 주요 경제 부문에 상당히 개입했는데도 그 위기를 막지 못하고, 도리어 높아 가는 실업률 위에 엄청난 인플레이션만 가중시킨 꼴이 됐기 때문이다. 도처에서 정부와 사업가들은 불황의 해결책은 임금 억제를 위한 반反노동조합법과 실업률 상승을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 낡은 정통 학설로 다시 후퇴했다.

미국의 갤브레이스나 영국의 윌리엄 키건이나 윌 허턴, 폴 오머로드처럼 케인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경제학자들은 다시 태어난 이 낡은 정통 학설을 너덜너덜한 누더기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지만 그들도 점점 더 극심해지는 불황을 퇴치할 확실한 방법을 지적할 수 없었다. 낮은 투자에 대해 그들이 치유책이라고 내놓은 것은 영국과 미국더러 독일이나 일본 경제 ― 이들도 자체적으로 심각한 불황을 겪어 왔는데도 ― 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라고 거듭 권유하는 것뿐이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시장이 노동자들을 빈곤으로 몰아넣게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정부가 나서서 소득정책을 추진해 주기 바란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임금억제를 바라는 마음에선 그들도 통화주의자들과 매한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분명 케인스가 옳았다. 소비 억제는 위기 때마다 발생할 수 있는 충격을 더 증가시킨다. 소비가 억제되면, 그 경제의 잠재적 생산량과 대중의 소비 수준 사이의 불균형이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행여 생산된 재화가 몽땅 팔릴라치면, 투자가 한층 더 넓은 간격을 메워줘야 한다. 그렇지만 그 재화들이 모두 팔릴 수 없는 상황, 즉 ‘과잉생산’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점점 더 커진다.

그런 투자를 불러일으킬 만큼 이윤이 높지 않을 때는 심각한 불황이 도래한다. 자본가들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만일 그들이 이윤을 끌어올리려고 착취를 늘린다면, 메워야 할 간격이 더 한층 넓어지게 된다. 반면에 만일 그들이 소비재 생산을 확대하려고 착취를 줄인다면, 이윤율이 하락해서 투자는 어떻게든 불황의 전개를 막아낼 만큼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딜레마가 생기는 것은 생산의 규모와 노동력의 크기가 엄청나게 차이 나는 단계로까지 축적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요한 투자 수준은 높은데 그에 맞먹는 이윤을 생산하기에는 노동력이 부족해서, 결국 자본가들이 투자를 기피하고 기업들은 생산물을 모두 팔지 못하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제정신을 가진 사회에서는 이런 딜레마가 있을 리 없다. 사회가 대중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꼽는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재화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체제의 추동력은 대중의 복지가 아니다. 자본을 통제하는 사람들은 이윤을 늘리고 자본 소유를 확장하기 위해 자기네식대로 행동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 생산 체계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삐거덕거리며 멈춰 서게 되는 것이다.

위기가 악화되는 것은 인간이 나약해서도 아니고 어떤 자연스런 재앙 탓도 아니다. 그것은 생산적 노동으로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끊임없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도록 몰아붙이는 힘에 종속돼 버린 이 체제의 선천적 결함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면, 위기의 악화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생산력 발전에서 그런 부의 생산과 전혀 상관없는 장벽에 맞닥뜨리게 됐다”는 증거이며 “자본주의 생산의 진정한 장벽은 자본 자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가지각색의 친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 심화되는 위기 앞에서 하나같이 그토록 곤혹스러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체제를 개혁하고 싶어 하는 정치가들이나 그런 경제학자들도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때문에 그들은 결국 실업률의 증가, 빈곤의 심화, ‘평생 고용의 폐지’, 불안정의 증대, 더 열심히 일하라는 압력의 가중 등의 이 모든 것을 지진이나 폭풍우 같은 자연현상으로, 따라서 막을 수도 없고 그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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