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현실성 20세기 후반 프랑스, 칠레, 포르투갈, 이란, 폴란드의 교훈 Revolutionary Rehearsals

콜린 바커 외 지음 김용민 옮김 2011-07-25 464쪽 18,000원 신국판 9788979660876 03300 책갈피 인디고서원 2011년 9월 추천 도서

세계경제가 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고 아랍 세계와 유럽 곳곳에서 새로운 혁명과 저항의 물결이 일고 있는 지금,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고 준비하려면 과거 혁명들의 교훈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이 책은 그중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후반의 다섯 사건을 다룬다. 1968년 5월과 6월 초 프랑스를 뒤흔든 파업 운동, 1972~73년 칠레 아옌데 정부 당시의 노동자 운동, 1974~75년 포르투갈 혁명, 1979년 이란 혁명, 1980~81년 폴란드에서 벌어진 연대노조 운동이 그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매우 실질적이고 유용하면서도 깊이 있는 고민거리들을 던진다. 특히 1972~73년 칠레의 ‘민중연합’ 경험은 ‘민주대연합’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21세기 한국의 노동자 운동이 반드시 곱씹어 봐야 할 뼈아픈 교훈들을 담고 있다.

본문 중에서

1968년 프랑스, 총파업이 제기한 문제들

총파업을 통해 분출한 거대한 힘은 여러 문제도 낳는다. 여느 부문별 파업의 경우 대개 그 목표는 파업에 불참하는 작업장이 나오길 바라는 고용주나 관료의 농간에 맞서 생산을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체 노동자가 일제히 일을 멈춘다면, 노동계급 자신이 아사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총파업에서는 필연적으로 통제의 문제가 등장한다. 즉, 일부 생산과 서비스는 유지돼야 하지만 어떤 생산과 서비스를 어떻게 유지할지는 노동자들이 결정해야 한다. …

5월 투쟁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이런 문제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많은 경우 파업 노동자들은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계속 서비스를 제공했다. 가스와 전기 노동자들도 파업에 합류했지만 공급은 유지했다. 몇 차례 경고 차원의 일시적 단전은 있었다. 상수도 노동자들도 파업위원회의 지시를 받아 파리에 계속 물을 공급했다. 식품의 경우 몇 차례 잠시 공급이 중단된 뒤 평소처럼 파리에 안정적으로 식품을 공급하도록 하는 협정이 맺어졌다. 파리 중심부의 체신 노동자 파업위원회는 생명이 위급함을 알리는 긴급 전보를 배달하는 데 합의했다. CGT 소속 인쇄 노동자들은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할 때 철저히 정부 통제를 받는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정보를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문이 “자기 본연의 임무인 정보 전달 활동을 공정하게 수행”한다는 조건으로 신문 발행을 계속하는 데 합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몇몇 경우에 인쇄 노동자들은 헤드라인 교체를 요구하거나, <르 피가로>나 <라 나시옹> 같은 우파 신문들이 이런 조건을 위반했을 때는 아예 신문 인쇄를 거부했다.

1972~73년 칠레, 아옌데의 ‘헌법준수협정’

부르주아 국가와 그 유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표로서 — 그리고 우익 정당들이 1970년 11월에 그의 대통령직 취임을 반대하지 않은 보답으로서 — 아옌데는 ‘헌법준수협정’에 서명했다. 이 문서에서 아옌데 정부는 국가와 국가기구를 존중하고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계급 이익을 지키기 위해 발전시킨 모든 제도 — 교육제도, 교회, 언론, 군대 — 를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협정은 사실상 비밀에 부쳐졌고 민중연합 지지자들에게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 헌법준수협정의 존재는 민중연합이 나머지 국가기구를 공격하기 위한 기초가 될 “권력의 일부를 장악했다”는 (일부 공산당 이론가들의) 주장을 무망하고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사실상 헌법준수협정은 칠레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지향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1974~75년 포르투갈, 흔들리는 군대

점심을 먹기 전부터 출동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우리는 곧 리즈나브일 거라고 짐작했다. … 우리는 정오에 집합했고, 지휘관은 소수의 좌파 선동가들이 주도하는 리즈나브 시위에 대해 연락을 받았다며, 우리의 임무가 그 시위를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G3와 탄창 네 개로 무장했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수준의 중무장이었다. …

시위가 시작됐고, 사람들이 물결을 이뤄 나아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의 자식이다.” “머지않아 병사들도 노동자가 된다.” “노동자들에게 총을 겨누지 말아라.” 곧 지휘관은 우리가 명령을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리는 무기를 거둬들였고, 어떤 전우는 울음을 터트렸다. 병영으로 돌아와서 지휘관은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 다음 날 병영은 평소보다 활기가 넘쳤다. 아침 점호를 받기 전에 많은 전우가 일어나 전날 시위의 슬로건을 외쳤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의 자식이다.” “자본주의 착취를 타도하자.”

1979년 이란, 호메이니의 반혁명

이란 노동계급은 끔찍한 샤 정권을 무너뜨리는 투쟁에서 핵심 세력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노동자들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호메이니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옛 질서의 잔해 위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가권력의 정책과 형태를 결정했다. 호메이니 정부가 새로운 부르주아 국가 통치 체제를 발전시키면서 노동계급은 그 포로가 됐다. 결국 노동자들은 새로운 이슬람 정권의 지배를 받게 됐고, 이슬람 정권 치하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힘은 샤 정권 시절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일부 중요한 측면에서는 훨씬 나빠졌다).

반혁명은 호메이니의 가짜 ‘반제국주의’ 가면을 쓰고 추진됐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면서 강화됐다. 대중이 전쟁을 열광적으로 지지한 것(특히 농촌의 낙후한 지역에서)은 부분적으로 정권이 전쟁을 ‘혁명의 확산’으로 포장했다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끔찍하게 늘어나는 사망자 수는 이슬람을 위한 죽음은 ‘낙원으로 가는 해방’이라는 기괴한 주장으로 옹호됐다.

전쟁은 정권이 좌파적 반대 세력을 모두 소탕할 수 있는 완벽한 빌미가 됐다. 독립적 노동조합 조직과 파업권은 ‘비(非)이슬람적’이라는 이유로 폐지됐고, 노동자들은 샤 정권 시절의 처지로 되돌아갔다. 여기에서 이슬람은 자본주의의 필요에 완전히 부합했다. 여성들은 결혼, 이혼, 자녀 양육권, 노동권 등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여성의 기본적 권리를 신의 이름으로 박탈하는 가부장적 천대에 시달렸다. 민족적•종교적 소수자들은 끔찍하게 탄압받았다.

1980~81년 폴란드, 최후의 나날

이 최후의 나날에 노조 지도자들이 좌선회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너무나 때늦은 일이었다. 그날 밤 전국위원회 참가자들이 호텔에서 자는 동안, 정권이 선수를 쳤다. 진압경찰이 호텔을 포위해서 공격했다. 위원들이 체포돼 수감됐다. 폴란드 전역에서 연대노조 활동가 수천 명이 잠을 자다가 체포돼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일요일 아침 6시 야루젤스키는 군사 쿠데타를 선언하며 연대노조의 활동을 불허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글렘프 추기경은 방송에서 국민들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쿠데타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은 불균등하고 산발적이었다. 파업과 점거가 200여 건 있었는데, 주로 대공장과 슐레지엔의 몇몇 탄광에 집중됐다. 며칠 뒤 이러한 저항들은 경찰과 군대의 폭력적 개입으로 분쇄됐다. 부예크 광산에서는 노동자 아홉 명이 살해당했다. 지에모비트와 피아스트 광산에서는 3주 동안 지하 갱도가 점거됐다. 피아스트 광원들이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자신들만 싸우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은 폴란드 전체가 함께 파업에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기습으로 인한 당혹감, 갑작스러운 통신 두절, 파업을 이끌거나 참가하는 사람은 누구든 엄벌에 처하겠다는 정부의 포고, 지도부 체포는 모두 쿠데타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이 비교적 낮은 수준에 머물렀던 이유를 설명해 주는 요소다. 그러나 심지어 쿠데타 전부터 이미 연대노조 조합원들의 대다수가 패배감에 휩싸여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야루젤스키의 쿠데타가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것은 연대노조 현장 조합원들이 사기 저하로 와해돼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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