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혁명이 일어날까?
시장 자본주의의 작동을 방해하는 정부를 전복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혁명은 바람직하지도 실현 가능하지도 않다고들 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도 이미 혁명에 가까운 격변들이 잇따랐다. 2000년 1월에는 에콰도르에서 항쟁이 일어나 대통령이 외국으로 도망쳤고, 2001년 12월에는 아르헨티나에서 항쟁이 일어나 대통령을 몰아냈고, 2002년 4월에는 베네수엘라에서 우익 쿠데타로 밀려난 우고 차베스가 자생적 반란 덕분에 권력을 되찾았고, 2003년 10월에는 볼리비아에서 항쟁이 일어나 대통령을 몰아냈고, 2005년에는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대통령들을 몰아냈고, 2006년 봄에는 네팔에서 대중운동이 일어나 정부를 전복했다. ……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계급에게 확실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20세기와 마찬가지로 21세기에도 저항은 거듭거듭 타오를 것이다. 문제는 21세기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냐가 아니라 혁명이 어디로 나아갈 것이냐다.
혁명은 어떻게 일어날까?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혁명이 일어나는 데 필수적인 요소 두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는 하층계급(노동계급)의 생활 조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나빠질 때다. 그러나 이 자체만으로는 저항이 일어나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생활수준이 나빠지면 의기소침해지거나 서로 자신들끼리 분노를 터뜨릴 수도 있다. 불만이 끓더라도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있다. 둘째는 지배계급 역시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지는 경우다. 대규모 경제·정치 위기로 사회의 밑바닥부터 분노가 누적될 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자본가들조차 (전쟁이 쉽사리 끝날 수 없는 장기전이 되는 상황에서처럼) 공황 상태에 빠진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두고 지배계급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비난을 퍼붓고, 개별 자본가들은 경쟁자를 희생시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혁명은 결국 독재로 귀결되지 않을까?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의미를 노동계급이 민주적으로 조직화해 옛 지배자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독재는 의회민주주의보다 덜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민주적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한다는 것은 기존의 권위주의 국가를 사회의 일반 대중에게 직접 책임지는 기관들로 대체하는 것이며, 이 기관들이 정치적 의사결정뿐 아니라 경제적 의사결정도 내린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기존 국가의 폭력에 맞서 주민 대다수가 스스로 조직할 때 이러한 기관들이 등장할 것이며, 이 기관들은 다수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 전체를 재조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이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었던 1871년 파리코뮌이 바로 노동계급의 지배,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파리코뮌의 뒤를 이어 20세기에 등장한 노동자 평의회는 미래의 격변기에 나타날 수 있는 혁명적 조직의 일면을 보여 준 선례라 할 수 있다.
혁명의 주체는 여전히 노동계급일까?
흔히 세계경제의 세계화로 말미암아 기업들이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있으므로 노동자들이 전처럼 기업에 맞서 싸울 수 없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분명히 세계화 덕분에 금융회사와 투기꾼들이 컴퓨터 클릭 한 번으로 엄청난 금액을 다른 나라로 옮길 수 있게 됐다. …… 그러나 돈을 옮기는 것보다 생산 기지를 옮기는 것이 훨씬 어렵다. 생산자본은 공장, 기계, 광산, 항만, 사무실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것들은 갖추는 데만 몇 년씩 걸릴 뿐 아니라 간단히 폐기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 국가 간 자본 이동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이 때문에 경제적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사람들이 더욱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흔히 이 점을 이용해 실제 의도는 없으면서도 생산 기지 해외 이전을 들먹이면서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와 열악한 노동조건 감수를 기대한다. 노동자들은 기업주들의 그러한 위협에 개의치 않아야 고용 불안 없는 세상을 쟁취할 수 있는 자신들의 힘을 자각할 수 있다.
여전히 정당이 필요할까?
정당 때문에 노동자들의 자발적 행동이 약화된다고 주장하면서 정당의 존재에 반대하는 진지한 혁명가들도 있다. 그러나 모름지기 진정한 대중운동이라면 향후 과제에 대한 견해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 혁명적 상황의 결과는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는 여러 견해들의 투쟁에 달려 있다. 위기가 매우 심각해서 개혁주의적 대안이 답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전투는 점차 혁명 세력과 반동 세력이 영향력을 쟁취하려고 다투는 정면 대결이 된다. 그 전투의 미래는 개혁주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이 혁명이나 반동으로 기우는 것에 달려 있다. …… 언제나 혁명은 전진하거나 후퇴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후퇴하면 전보다 훨씬 악화된 구질서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가들이 조직돼서 혁명적 사상을 밝히고 혁명이 진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새로운 혁명은 비폭력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국가는 국가의 지배자들이 적으로 선포한 사람들(국내의 적이든 국외의 적이든)을 상대로 폭력을 사용할 태세가 된 무장 집단에 의존한다. 때때로 폭력의 수위는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하거나 피켓라인을 해산시킬 때처럼 비교적 낮을 수 있다. 그러나 1973년 칠레에서처럼 지배계급은 심각한 위협을 느끼면, 지배계급에 맞서는 사람들이 평화적 방법을 굳게 고수할 때조차 끔찍한 폭력을 자행할 것이다. 혁명적 사회 변화를 지지하면서도 필요할 때 폭력의 사용을 배제하는 운동은 파괴를 자초할뿐더러 그 지지자들을 불필요한 고통에 빠트린다. …… 대중의 가장 능동적인 부위와 소수의 무장한 사병들이 단호히 행동하도록 조직됐을 때, 사상자가 발생하는 실제 폭력도 줄어든다. 반면, 선진 부위가 조직되지 않거나 평화주의가 만연하는 상황에서는 반대편의 폭력 수위도 무척 높아질 것이다.
결국 이기적 인간 본성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지는 않을까?
자본주의의 세계적 생산 체제는 공장, 광산, 항만, 창고, 슈퍼마켓, 사무실, 농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일하도록 불러 모은다. 각 작업장은 교통과 통신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 간에 협력적인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모든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은 경쟁뿐 아니라 협력도 한다. …… 다른 한편, 노동의 열매를 가로채는 기업들과 국가들 사이의 가차 없는 경쟁 때문에 이 모든 노력은 한계에 봉착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협동과 이기심, 이타심과 공격성, 배려와 증오를 동시에 부추긴다. …… 자본주의 사회 ‘인간 본성’의 이러한 모순이야말로 최근 역사에서 희망과 절망이 뒤섞여 있는, 즉 전쟁과 참극이 이타심ㆍ연대와 공존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 협동과 호혜의 진정한 가치는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때만 발현된다. 투쟁을 통해 협동 정신은 경쟁의 해악에서 비로소 벗어난다. 비록 작은 규모의 방어적 투쟁에서도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가치에 도전하는 사상들, 즉 단결과 연대, 집단적 노력의 정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 투쟁이 벌어지면 ‘인간 본성’의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생산의 사회적 요소, 즉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요소가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사적 전유’(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21세기에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혁명적 격변에서 인간 본성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다만 이런 변화가 줄곧 지속될지 아니면 순간의 기억에 머물지는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