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쪽 민중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적대감
후진국의 ‘민족자본가’들은 외국의 후원을 받으며 민중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계급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들의 지도 아래서는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42~43쪽 ‘후진국’의 역사적 과제
현대적 형태의 생산·교통·금융이 낡고 해진 과거의 양식 위에 덧씌워져 부분적으로만 결합돼 있다. 이미 1세기 전에 서방이 상품·총·탐욕·사상을 가지고 중국을 침입했을 때부터 오랜 구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충격의 결과는 재앙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중국 경제는 강제적으로 변형됐다. 정말 오랫동안 변동 없던 사회 계급들이 격렬한 변화의 시대로 들어섰다. 정부 형태와 관습, 사회적 균형이 완전히 뒤집혔다. 변화 과정은 복잡했다. 그것은 중국의 생산력이 번창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의 건설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임무를 제기했다. 이로부터 충돌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쌓이고 가속도가 붙어, 해결을 위해 빠르게 계급투쟁의 전장으로 향했다.
103~104쪽 누가 해결할 것인가?
세계혁명이야말로 민중의 필요에 따라 세계경제를 합리적으로 재편하고 세계의 상품을 합리적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무정부성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이 이 새로운 질서 속에 자리 잡는다면, 좀 더 발전한 국가들의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원조를 보장받을 것이고, 모든 민중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보편적으로 끌어올리는 활동을 조화롭게 벌여 나갈 것이다. 중국이 진정한 민족 해방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국내외 착취자들에 맞선 투쟁으로 농민을 결집시켜야만 가능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자본가계급은 그런 투쟁을 이끌 수 없었다. 기계에 익숙해지지도 않은 젊은 노동자계급이 대다수 민중을 이끌고 미래를 열어야 하는 임무에 직면했다. 다른 어떤 계급도 그럴 수 없었다.
144쪽 마침내 일어난 노동자 혁명
홍콩과 사몐의 모든 주요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25만 명이 벌인 파업은 모든 외국인의 공업 생산과 상업 활동을 순식간에 마비시켰다. 광저우 노동자들은 도박장과 아편굴을 일소했고, 그것을 파업 노동자의 숙소와 식당으로 바꿔 놓았다. 2000명의 규찰대가 파업 노동자들 중에서 모집됐고, 교통을 차단하는 장벽이 홍콩과 사몐 주변에 둘러쳐졌다. 운동은 매우 훌륭하게 조직됐다. 50명당 1명씩 선출된 대표들로 파업노동자대표회의가 구성됐고, 그중 13명이 집행위원회의 임무를 맡기 위해 지명됐다. 중국에서 최초의 맹아적 소비에트라 할 수 있는 이 노동자계급 기구의 후원 아래, 남녀 노동자와 자녀를 위한 은행 1개와 학교 7개가 설립돼 운영됐다.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자금과 기부금 관리, 압수품의 경매, 기록 보관 등을 담당했다. 파업 법정이 설치돼 배척 운동을 파괴하려 하거나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재판했다.
153~154쪽 제국주의와 중국 자본가계급의 공모
외국인 착취자와 중국인 착취자의 단결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상하이 총파업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대표적 제국주의 신문인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는 상하이 유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과 맺어 온 다년간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여러분이 폭동자들과 파업자들에게 공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무정부적이고 파괴적이며 쓸모없는 노동자들에게 협조하지 말아야 한다. … 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여러분의 평화·행복·안전을 위협할지는 주로 여러분에게 달렸다.”
186쪽 1926년 3월 20일 광저우 쿠데타
크렘린은 더는 노동자계급 정책을 중심축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 민족주의 운동을 자본가계급이 지도해야만, 시급히 필요한 동맹자들이 더 빠르게 형성되리라 믿었다. 소련과 코민테른의 정신적·물질적 지원은 공산당을 통해 대중운동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 이른바 모든 계급의 정당으로 합리화돼서 공산당원과 대중이 반드시 복종해야 했던 부르주아 국민당을 통해서 전해졌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3월 20일 쿠데타로 이어졌다.
236쪽 북벌과 대중운동의 폭발
장강을 향한 진격과 대중운동의 놀라운 용솟음은 국민혁명 운동 안의 계급 모순을 폭발 직전까지 밀어붙였다. 장제스는 공공연하게 제국주의와 타협하기 위해 상하이를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더욱더 엄혹한 참수의 방식을 통해서만 대중운동을 꺾을 수 있을 것이었다.
255쪽 상하이 봉기
6시에 상하이 북역 상공에 백기가 나부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혁명군 1사단이 룽화를 떠나 마이건루에 도착했다. 사단장 쉐웨가 부대원들의 압력을 받아 결국 명령에 불복하고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가 도착한 것은 노동자들이 모든 일을 끝낸 뒤였다. 강철 철책 뒤에서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인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를 제외한 상하이 전역이 노동자들의 수중에 장악됐다. 바오산루, 바오퉁루, 중싱루 일대는 총성 대신 승리를 축하하는 폭죽 소리와 노동자들의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258쪽 장제스의 상하이 입성
은행가들과 상인들은 파업이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총파업이 봉기로 발전하는 것을 지켜봤다. 노동자들의 상하이 장악은 그들에게 제국주의와의 흥정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는 지렛대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이 대중의 힘이라는 위험한 무기와 단절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경고했다. 그들의 이익은 제국주의의 이익만큼이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임박해 있는 중국 자본과 외국자본 사이의 협상에서 핵심 조건 하나는 대중운동의 분쇄였다. 그들은 돌아온 탕아 장제스에게 그런 임무의 수행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281~282쪽 침묵의 공모
‘민족통일전선’ 또는 ‘4계급 연합’을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지해야 하는 신비로운 숭배 대상으로 떠받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것은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을 속박하고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농민을 속박하도록 보장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이 정책은 이미 광저우에서 리지선이 노동자들에 대한 야만적 탄압에 기초해 성공적으로 군사독재를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북벌군의 장강 진군을 가능하게 만든 광범한 대중운동의 과실을 자본가계급이 이용할 수 있게 해 줬다. 이제 상하이의 자본가계급은 장제스를 통해 그 과실을 빼앗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330쪽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쿠데타
계급투쟁의 강철 검은 모스크바의 교서보다 강력했다. 노동자들은 ‘연합’을 위해 죽었지만, 그렇게 성립된 연합은 피억압 인민에 맞선 억압자들의 연합일 뿐이었다. “4계급 연합”이라는 저속하고 찢어진 외투는 벗겨졌고, 남은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상하이 노동자계급의 시신뿐이었다. 그 시신 아래에서 군벌들과 은행가들이 약탈물을 나누기 위해 도박과 거래를 시작했다.
336쪽 여전히 국민당에게 매달리는 스탈린
그렇지만 스탈린에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세력은 여전히 국민당과 그 “좌파”, 우한 정부였다. 그는 이제 우한 정부가 혁명의 중심이 됐다고 선언하고, 노동자와 농민은 이 정부가 군벌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수행하고 농민 봉기를 지원하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381쪽 우한 정부의 실체
농민이 토지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일반 명제(모두가 원칙적으로 동의했다)에서 출발한 국민당 토지위원회는 곧 “어떤 농민이 어떤 토지의 주인이어야 하는가?” 하고 물었다. “토지를 경작자에게!”라는 구호는 매력적이고 급진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누구의 토지를? 왕징웨이는 소지주의 토지는 확실히 아니라고 말했다. 국민당은 소부르주아계급의 정당으로서 소지주를 보호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었던가. 탕성즈는 군 장교의 토지도 확실히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후난성 농민들이 이미 군 장교와 그 친족의 재산을 빼앗고 있다고 불평했다.
395~396쪽 토지를 위한 투쟁
국민당은 기껏해야 25퍼센트의 지대 인하와 매년 20퍼센트의 이율 “제한”을 기치로 내걸었다. 또한 모호하게 “평등한 소작권”을 말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대중운동이 개시된 후 국민당 좌파에게 강령상의 이런 온건한 조항들조차 실행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대중적 자각의 힘은 직접적 논리에 따라 농민들을 “모든 토지를 경작자에게!”라는 구호로 급속히 이끌었다. 농민들은 이 구호를 가차 없이 간단한 방식으로 실현해 나갔고, 잃을 것이 있는 자들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4월 말에는 후난성과 후베이성의 많은 현에서 토지와 재산 몰수가 흔하게 벌어졌다.
465쪽 계급 연합의 붕괴
스탈린·부하린은 말로는 계급투쟁을 원했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피하려 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노동자·농민과 결별했는데, 노동자·농민이 모든 피억압자의 확실한 본능에 따라 말을 믿지 않고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농민과 지주의 유일한 공통점은 토지였는데, 경작은 농민이 하고 이익은 지주가 보는 구조였다. 농민의 삶의 목표는 토지에서 지주를 쫓아내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됐다. 토지혁명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바로 이것이다. 농민을 지지하거나 지주를 지지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제 왕징웨이와 친구들은 토지와 농민에 대한 모든 호언을 거두고 이미 농민반란을 짓밟고 있는 자들을 분명하게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497쪽 보로딘의 뒤늦은 고백
[소련공산당 측 고문으로 오랫동안 국민당을 도운] 보로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자본가계급은 진정으로 제국주의에 맞서지 않기 때문에 결코 중국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고 그것에서 이익을 얻습니다. 소부르주아계급은 한편의 노동자·농민과 다른 편의 대자본가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결국 후자의 편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중국을 통일할 수 없습니다. 노동자·농민은 소부르주아계급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일할 수 없었습니다.”
502쪽 가망 없는 봉기로 내몰린 중국공산당
지난날 중국공산당이 배운 유일한 것은 거대한 대중의 힘이 작동하며 혁명의 물결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대중을 적대계급들에게 복종시킴으로써 그들을 억제하고 의지를 꺾는 법이었다. 이제 그 물결은 반동의 암벽에 부딪혀 “물거품처럼 부서졌다.”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돌이킬 수 없이 손상을 입은 처지를 때늦은 군사행동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 기회주의와 타협이라는 한 극단에서 모험주의라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무자비하게 내몰렸다. 그들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필사적이고 가망 없는 시도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직접적 명령에 따라 봉기의 길로 접어들었다.
569~570쪽 중국공산당원 구성의 변화
운동이 정점에 올랐던 1927년 4월에 공산당은 6만 명의 당원을 보유했고, 그중 58퍼센트가 주요 산업도시에 자리 잡은 산업 노동자들이었다. … 공식 수치에 따르면, 노동자 당원의 비율은 1928년에 10퍼센트, 1929년에 3퍼센트, 1930년 3월에 2.5퍼센트, 9월에 1.6퍼센트로 추락했고, 그해 말에는 사실상 0퍼센트가 됐다.
568쪽 홍군의 구성
1928~1929년에 화중 지방의 산악 지대에서 등장하던 당시의 이른바 홍군은 심지어 주로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도 아니었다. 그들이 점령한 각 현에서 농민의 일부 부문을 결집할 수 있었던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홍군은 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 일자리가 없는 농업 노동자, 반란을 일으킨 병사, 현지의 도적 등 모두 농업 생산에서 직접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탈계급화된 이들로 구성됐다.
645~646쪽 새로운 ‘민족통일전선’
‘민족통일전선’은 1937년의 새로운 역사적 무대에서 재건됐다. 1927년에 공산당은 강력한 대중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1937년에는 거대한 민중으로부터 고립된 10만 농민군의 선두에 있었다. 1927년에 공산당원들은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의 연합에서 ‘주도권’을 획득해 민족해방운동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1937년에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연합의 기초는 국민당이 홍군을 흡수하는 것, 소련 관료 집단의 눈앞의 이해에 복무할 항일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민족 해방의 문제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새로운 연합과 이를 지지한 외국 공산주의자들이 영미 제국주의를 향해 개입하라고, 그래서 영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협하는 일본에 대항해 지배력을 확보하라고 공공연하게 호소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