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다시 한 번 ‘힙’hip해지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터져 나오더니, 급기야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새겨진 신용카드까지 출시됐다(세상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일찍이 간파한 마르크스 자신도 이런 사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이 세상이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세상을 바꿔 볼 요량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일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둘러싸고 재벌 개혁부터 협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의들이 있지만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의 총체적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가 빠져 있다는 말인데, 이는 그러한 논의들이 총체적 사회변혁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또는 포기한 채) 기존 사회의 틀 안에서 소소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적 논의들은 대부분 현 체제의 작동 방식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세상을 바꾸는 방법에 관한 실천적 논의는 등한시한다. 그러나 본디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론’과 ‘실천’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를 누구보다 명쾌하게 설명한 것은 오로지 자본주의 타도라는 실천을 위해서였다. 이론 없는 실천이 눈감고 차는 프리킥이라면 실천 없는 이론은 공을 차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축구 해설과 같다(그나마 전자가 득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점에서 좀 더 낫지만 말이다).
이 책의 두드러진 점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이라는 두 측면을 통일적으로, 그것도 초심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이는 무엇보다 저자인 토니 클리프 자신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온몸으로 보여 준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의 파란만장한 라이프 스토리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토니 클리프(본명: 이가엘 글룩스타인)는 러시아 혁명의 해인 1917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인 1932년에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됐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스탈린이 심각하게 왜곡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에 환멸을 느낀 클리프는 스탈린이 서방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추방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팔레스타인에서 트로츠키주의 단체를 건설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시오니즘 사상마저 벗어던지고 아랍인과 유대인이 함께하는 소규모 단체를 힘겹게 이끌어 갔다. 제2차세계대전 초에는 영국 식민 당국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 시절의 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왕따’당하던 트로츠키주의자였고, 팔레스타인에서 시오니즘을 배신한 유대인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클리프는 팔레스타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1946년에 동지이자 부인인 하니 로젠버그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제국주의의 핵심 국가에서 혁명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당시 영국 정부는 개혁주의 정당인 노동당의 역사에서 절정기라고 하는 애틀리 정부였는데, 이 개혁주의 정부가 클리프의 이민을 불허한 탓에 그는 5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이후 평생 동안 영국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국적자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영국에서 그는 ‘정설’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제4인터내셔널 영국 지부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내 소련 사회의 성격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긴 클리프는 조직 내에서 일대 논쟁을 벌인 끝에 1950년에 축출당했다.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트로츠키의 견해를 따라 러시아가 1917년 혁명 이후 관료적으로 변질됐지만 여전히 노동자 국가라고 본 반면, 클리프는 러시아가 관료적으로 변질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서방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국가자본주의로 둔갑했다고 봤다. 따라서 소련 국가도 서방 국가들과 꼭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혁명으로 타도해야 할 대상이며, 스탈린식 ‘일국 사회주의’가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는 ‘국제 사회주의’만이 진정한 인류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축출과 동시에 그는 ≪소셜리스트 리뷰 Socialist Review≫라는 월간지를 중심으로 수십 명 규모의 독자적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결성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단’이었던 트로츠키주의 운동 내에서도 또 다른 이단의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시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소련은 가톨릭으로 치면 교황청과 같은 존재였으니, 감히 소련을 자본주의라 칭한 클리프류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신성모독죄로 화형감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은 철저히 고립돼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자 상황이 급반전됐다. 핵무기철폐운동CND이 뜨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청년들이 운동에 입문했다. 이들은 ‘미국도 소련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라는 클리프의 주장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는 세대였다. 이제 국제사회주의자들IS로 이름을 바꾼 클리프의 조직은 이 같은 급진화의 물결을 타고 수백 명 규모로 불어났다. 1968년 학생 반란과 반전운동, 1972년과 1974년의 광원 파업 등을 거치면서 1977년 무렵에는 회원 수가 3000명으로 성장했다. 이때부터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라는 이름으로 줄곧 활동해 왔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70년대의 반파시즘 운동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고 1980년대의 엄혹한 대처 집권기에도 조직세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조금 성장하기까지 했다.
1990년대 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몰락하자 그때까지 소련을 모종의 대안으로 여겼던 전 세계 대다수 좌파들은 그만, 멘탈이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나 애당초 소련에 환상이 전혀 없었던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전 세계 국제사회주의경향 자매 조직들에게는 소련 몰락이 절호의 기회였다. 클리프 자신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위한 최대 걸림돌이 제거됐다”며 소련 몰락을 반겼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해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곧바로 시대 정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금세 드러났다. 오히려 1990년대는 “시장경제 외에 대안은 없다”는 음울한 메시지가 득세한 시기였다.
1999년 시애틀의 WTO 반대 시위를 계기로 다시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시애틀에서 탄생해 2001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정점을 찍은 반자본주의 운동은 9∙11 테러로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전운동으로 환생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도 당연히 이 흐름에 온몸으로 동참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2001년에는 그 유명한 전쟁저지연합Stop the War Coalition의 결성을 주도했다. 2008년에 닥친 대불황 이후로는 영국 정부의 긴축정책과 등록금 인상에 맞선 학생 시위와 노조 파업에서도 중추적 구실을 해 오고 있다.
안타깝게도 클리프는 2000년에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이후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활약상을 보지 못했다. 향년 82세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핵심 리더였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초기 세대 당원들이 회고하는 클리프의 모습에는 몇 가지 일관된 테마가 있다. 첫째는 독립적이고 유연한 사고다. 그의 인생 역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떤 도그마에도 구애받지 않는 진정 자유로운 두뇌였고 자신의 동지들에게도 그러한 사고를 장려했다. 역설이지만 클리프의 유연한 사고야말로 그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정수를 다른 어떤 교조주의자보다 충실히 보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둘째, 클리프는 모든 종류의 위계질서를 혐오했다. 그래서 리더로서의 위신이나 특권 따위는 일절 내세우지 않고 당원 한 명 한 명을 끔찍이 챙겼다. 이 점에서 그는 레닌(스탈린주의나 반공주의 신화 속의 레닌이 아니라 실존 인물로서의 레닌)의 판박이였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가치가 민주주의라면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히 실천한 셈이다. 그의 소통 방식도 마찬가지로 민주적이었다. 즉,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와 유머를 곁들여 설명하고 주장하는 것이 클리프의 스타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정치적 논점도 촌철살인의 농담 한마디로 청중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달변이 아니었던 클리프가 이런 능력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설득을 통해 지도하는 민주적 실천 덕분이었다. 한국에서는 좌파들의 대중적 소통 능력 부재가 오래된 화두인데, 어쩌면 좌파들이 어설픈 언어 순화 노력으로 진땀 빼는 것보다는 민주적 실천을 강화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셋째, 클리프는 이른바 디테일에 강했다. 그는 핵심 간부들에게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일의 진척 상황을 꼼꼼히 확인하곤 했다. 토론회 조직자들에게 토론회 장소의 의자 개수까지 확인하며 세심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디테일에 대한 강조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도 드러난다. 소련에 대한 일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사람들도 그의 책 ≪소련 국가자본주의≫[국역: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책갈피, 2011]에 제시된 무자비할 정도로 풍부한 디테일에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클리프에게도 약점이 없지는 않았다. 때때로 그는 너무 조급한 나머지 충분한 설득 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주변 사람들을 몰아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조급증조차 클리프가 지닌 훨씬 더 긍정적인 측면의 동전 뒷면이라 할 수 있다. 혁명정당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어마어마한 집념과 추진력 말이다. 그가 짊어졌던 역사적 과업의 무게를 감안할 때, 어찌 보면 병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집념은 불가피한 멍에였는지 모른다.
이 책에는 혁명가의 외길을 걸은 저자가 평생 체득한 이론적∙실천적 통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대한 클리프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라고 할 수 있는 국가자본주의 이론이다. “소련도 결국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똑같이 억압적 체제였다”는, 돌이켜 보면 새삼스럽지도 않은 얘기를 이제 와서 굳이 왜 하냐고 반문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이 단지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면,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노동자 국가가 어떻게 그 정반대의 것으로 변질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무상 급식이든 반값 등록금이든 이 사회의 진보적 요구들은 하나같이 평등을 염원하는 요구다. 그런데 우파들은 지나친 평등이 도리어 끔찍하게 불평등한 소련과 북한 등의 전체주의 체제로 귀결됐다는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런 궤변에 맞서 평등과 정의의 이념을 일관되게 옹호하려면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필요하다. 또한 여전히 ‘종북주의’ 딱지가 좌파를 탄압하는 전가의 보도 구실을 하는 남한에서 좌파가 북한의 3대 세습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오히려 남한의 ‘종박’주의자들이야말로 북한 관료들과 훨씬 더 닮았다는 사실을, <조선일보>가 <조선중앙통신>과 훨씬 더 닮았다는 사실을 당당히 지적하기 위해서도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혁명정당의 필요성이다. 클리프는 “사람들이 이렇게 멍청한데 어떻게 세상이 바뀔 수 있겠어?” 하는, 흔히 일반인과 좌파가 똑같이 늘어놓는 해묵은 한탄에 대해 가장 명쾌한 답변을 들려준다.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실천가답게 좌파들을 항상 괴롭히는 양극단의 유혹, 즉 기회주의(원칙을 저버리고 대세에 영합하는 것)와 종파주의(자신과 노선이 다른 세력과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고고하게 원칙만을 내세우는 것)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법도 알려 준다.
옮긴이 후기가 터무니없이 길어진 것 같다. 부디 즐독하시기 바라며,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책을 읽고 혁명운동에 동참하게 된다면 10여 년 전 군 복무 중에 황금 같은 개인 시간 반납하며 이 책을 번역한 나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