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을 소개받을 때 들은 말은 “매우 쉬운 말로 쓴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번역한 이 책(2011년 《기후변화와 자본주의》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됐다)이 일부 대학에서 교양과목 교재로, 즉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읽힌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기뻤다. 출간 직후 환경책큰잔치에서 이 책을 ‘올해의 환경책’으로 선정하면서 “그냥 술술 읽히는 대중 교육용 책자”라고 추천해 준 것도 그랬다.
지은이 조너선 닐이 이 책을 쓴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유효할 뿐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설득력이 더 커졌다.
이 책의 핵심은, 현존하는 기술만으로도 온실가스를 80퍼센트 줄여 기후 재앙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지면서 말이다. 2부 “당장 실현 가능한 해결책”의 내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 대안이 2008년에도 가능했다면(당시는 스마트폰도 보급되지 않았었다!), 2019년에는 더더욱 가능하다. 풍력·태양 발전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 기술(5장), 건물 단열 기술(6장), 운송 연비와 제조업 전력 효율을 높이는 기술(7장과 8장)은 오늘날 더 발전했기 때문이다.
또 “제대로 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기술들”(9장)로 핵 발전, 바이오 연료, 수소, 탄소 포집·저장 등을 지목한 것도 여전히 유효하다. 신기술을 개발하면 사회를 바꾸지 않고도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던 보수적 세력의 주장은 틀렸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핵심 주장, 즉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스스로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들어맞았다. 물론 이는 실로 불행한 일이다.
전 세계 권력자들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2015년 파리 협정을 “역사적 전환점”이라 불렀지만 실제로는 화석연료 투자를 해마다 늘렸다. 미국·중국·유럽·일본·캐나다의 은행 33곳이 투자한 돈만 헤아려도 2016년 6120억 달러(약 730조 원), 2017년 6460억 달러, 2018년 6540억 달러다. 유럽 에너지 수요의 30퍼센트를 재생 가능 에너지로 공급하는 데 필요한 비용(10년간 750억 달러, 자세한 내용은 5장 참조)의 10배 가까운 금액을 해마다 화석연료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리 절약해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이 줄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이미 시작된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면 사회 안전망과 안전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유명한 반자본주의 환경운동가인 나오미 클라인이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자본주의 대 기후》에서 썼듯이,
심각한 위협으로 부상한 기후변화 문제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려고 시도했던 바로 그 시점에 전성기에 도달한 시장 근본주의가 처음부터 기후 대응을 계획적으로 방해해 왔다는 사실 … 공공 부문의 해체와 민영화가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마당에, 과연 탄소 제로형 공공서비스와 기간 시설 에 대대적인 투자가 시행될 수 있을까?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 발전소 폭발 사고 후 전국 핵 발전소들을 대상으로 홍수·지진으로 인한 위험을 평가했다. 그 결과, 61개 중 55개 핵 발전소가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파악됐지만(!) NRC는 핵 발전소 폐쇄는커 녕 설계 변경조차 강제하기 않기로 했다.
3부 “왜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는 어째서 지배자들이 이토록 정신 나간 짓을 계속하는지 설명한다.
변화된 상황
4부 “기후변화의 정치학”의 앞부분(14~15장)은 젊은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 2008년 봄까지의 기후 정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08년 봄과 그 이후 시기 사이에는 큰 단절이 있다.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이 2007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그것이 엄청난 이슈가 됐을 때만 해도, 아무도 기후변화 문제를 더는 외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8년 9월 미국 굴지의 금융회사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경제 위기가 본격화했다. 그러자 기후변화를 대놓고 부인하거나 온실가스 배출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줄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다시금 커졌다.
경제 위기가 닥치자 전 세계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기후변화 문제를 후순위로 미뤘다. 교토의정서를 대신할 새로운 온실가스 감축 협정은 약속했던 2009년이 아니라 2015년에야 만들어졌는데(파리 협정), 그 내용이 더 가관이다. 바로 각국의 자발적 노력에 맡긴다는 것이다! 앞선 교토의정서는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을 1990년보다 5.2퍼센트 줄인다’는 객관적 목표가 있었는데 이보다 더 후퇴한 것이다. 파리 협정이 온실가스 배출을 막는 데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상 처음부터 예정됐던 셈이다. 각국의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검토한 과학자들은 이대로라면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2도 이내로 막는다”는 파리 협정의 목표를 결코 충족할 수 없고 갑작스러운 기후변화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협정 탈퇴를 선언하며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 했다.
트럼프는 기후변화 부정론자이지만 사실 더 많은 미국 지배자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위협과 자본주의의 전망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
예컨대 지배자들은 온실가스 감축 요구를 새로운 이윤 획득 기회로 활용하려고도 한다. 재생 가능 에너지 기술에서 우위를 점한 미국과 독일, 태양광 전지·배터리 생산량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의 권력자들도 저마다 재생 가능 에너지 산업을 내세워 국가 간 힘겨루기에서 이기려 한다.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소비하지만 화석연료 개발 사업에 지분이 적은 IT 기업들, 전기차·자율주행차를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삼으려는 자동차·IT 기업들도 그런다.
동시에 미국 국방부는 2014년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기후변화가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여러 위험을 낳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즉, 물리적 환경의 변화로 군사작전의 범위와 가능성이 달라지고, 자원 부족으로 전면전의 가능성이 커지고, 기간 시설이 부족한 개도국에서 전염병이 창궐해 인접국까지 불안정해질 수 있으며, 이런 상황 때문에 ‘극단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테러리즘이 만연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배자들의 목적은 기후변화를 막는 것이 아니라 이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자들은 급격한 전환은 바라지 않는다. 급격한 전환은 경제의 우선순위 자체를 바꿔서 이윤 추구 행위 자체를 위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는 세계적으로 비중이 늘고 있지만 현 추세대로라면 20~30년 뒤에도 세계 에너지의 3 분의 2는 여전히 화석연료에 기대야 한다. 이런 속도로는 기후 재앙을 막을 수 없다.
대중운동과 기후 정치
그러면 얼마나 빠르게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할까? 이 책의 1부가 바로 이 문제를 다룬다. 이 책은 권위 있는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짧으면 7년, 길어야 3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미 11년이 지났다. 갑작스러운 기후변화를 막기에 이미 늦었을 수도 있고, 가장 낙관적으로 보더라도 2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80퍼센트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8년에는 IPCC가 특별 보고서를 채택했는데, 과학자들은 파리 협정의 목표(기온 상승을 섭씨 2도 이내로 막기)가 너무 위험천만한 것이며 온난화를 1.5도 이내로 억제해야만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이를 성취하려면 2030년까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을 2010년 대비 45퍼센트 줄여야 하고, 2050년에는 탄소 배출 ‘제로’에 도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학자들은 관측 결과를 토대로, 지금처럼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앞으로 8년 안에 1.5도 상승에 도달할 만큼 온실가스가 대기 중에 축적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보고서는 세계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줬다. “수십 년”이 아니라 10년 안에 인류 전체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국 컴브리아대학교에서 지속 가능성 연구를 해 온 젬 벤델 박사는 같은 해 발표한 논문에서 IPCC의 예측조차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보수적이라며, 최근의 연구 조사 결과들을 보면 이미 문제를 바로잡기 어려워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수많은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웨덴 청소년 그레타 툰베리는 이를 널리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툰베리의 절박한 호소는 유럽 곳곳에서 청소년들의 등교 거부 시위를 촉발했다. 2018년 말과 2019년 초에는 호주와 영국에서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019년 4월에는 ‘멸종 반란’ 시위대가 ‘2025년까지 탄소 순배출 제로’를 요구하며 열하루 동안 영국 런던의 주요 거점과 도로를 봉쇄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시위로 10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지만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 가고 있다. 특히 2019년 9월 21일에 전 세계에서 기후 파업과 등교 거부, 시위를 하자고 호소했다.
‘멸종 반란’을 포함해 새로운 기후 운동의 참가자들은 기존 환경 단체들의 방식(정치권에 로비하기, 시장 원리 해결책에 의존하기, 개인의 ‘작은 실천’ 강조하기, 기업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린워시 도와주기 등)을 비판하며 국가가 당장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운동은 장차 한국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물론 각국 정부에 기후변화 대처 노력을 촉구하는 운동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격차가 크고 특히 한국에서는 실감하기 쉽지 않지만 국제적 수준에서는 분명 기후 운동이 벌어져 왔다.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만 소개하겠다. 2009년 각국 대표들이 덴마크 코펜하겐에 모여 온실가스 감축을 논의할 때, 수만 명이 회담장 바깥에 모여 시위를 했다. 전 세계에서 10만 명이 이날 시위에 동참했다. 2014년 뉴욕에서도 기후회의 회담장 바깥에서 30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후 운동은 기후 정상회담 일정을 쫓는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생태적으로 더 나쁜 신종 화석연료인 셰일오일·타르샌드 개발을 정부가 뒷받침하는 나라들에서 특히 그랬다.
2015년 3월 영국 런던에서는 ‘기후변화 저지 운동CCC’의 주도 아래 2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캐나다에서는 4월 퀘벡시에서 2만 5000명이 모였고, 7월 또 다른 도시 토론토에서 1만 5000명이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에는 긴축 반대 운동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 등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다양한 부문의 활동가와 지지자가 결집했고 노동조합에서 참가한 경우도 많았다.
이제 운동은 새로운 청년들의 에너지에 힘입어 새로운 단계로 성장하고 있는 듯하다.
지배자들은 경제 위기를 핑계 삼아 기후변화 문제를 후순위로 미루지만, 이런 운동은 기후변화 문제를 경제 위기 속에 더 악화하는 사회정의와 결합한다. 이 책 18장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에서 호소했던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다.
기후변화 운동은 결코 단일 세력이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관심사와 배경을 갖고 모인 만큼 논쟁할 거리도 많다. 그러나 큰 틀에서 봤을 때, 체제 자체가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이 분명히 많아지고 있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 변화”라는 슬로건이 갈수록 호응을 얻고 있다.
물론 “체제”가 가리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대안이 무엇인지를 놓고는 논쟁이 많다. 그렇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 없이 자원을 펑펑 써 대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진단이 지배적이었던 전통적 환경운동과 비교했을 때 큰 전진이자 급진 좌파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는 것도 분명 고무적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양상이 뚜렷하지 않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많은 온건 환경 단체들은, 예컨대 평범한 사람들이 폭염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전기 요금을 인하하라는 요구에 냉소적이거나 심지어 반대하기도 한다. 이 책의 3장 “희생은 대안이 될 수 없다”와 16장 “개인적 실천과 시장 원리 해법”은 운동을 발전시키고 잘못된 주장을 반박하는 데 필요한 논리를 제공한다.
대중운동만으로 충분할까?
이 책을 맨 마지막 쪽까지 읽는 독자라면 지은이의 예측이 다소 빗나간 부분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는 미군이 이라크에서 패배하고 철군할 때 기후변화에 맞선 운동이 크게 전진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자 연대>에서 국제 기자로 활동한 덕분에 이런 예측이 왜 빗나갔는지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중동 정세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핵심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라크에서는 조너선 닐의 예상대로 대규모 저항운동 때문에 미군이 궁지로 몰렸다. 그러나 미국은 철군하는 와중에도 책략을 부려 이라크를 또 다른 지옥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분명 패배하고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저항에 나선 사람들이 바라던 사회가 되지도 않았다. 많은 경우 평범한 사람들은 더 큰 고통 속에 처했다.
중동의 또 다른 국가 이집트에서는 이런 비극이 더 큰 규모로 재현됐다. 2011년에 전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을 열광시킨 혁명이 터져 나와 미국이 지원한 독재자를 끌어내렸지만 역시 또 다른 책략에 당해 (불안정할지언정) 새로운 독재자가 집권했다.
반복된 패턴이 보여 주는 것은, 최상층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저항이 커지면 커질수록, 심지어 자신들의 지배력을 더는 온전히 유지할 수 없다는 게 확연해질 때조차 권력을 순순히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처참히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거나 되찾으려 했다.
그런데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운동은 개별 국가의 민주화나 혁명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요구한다. 기후 운동이 그처럼 큰 변화를 실질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강력해진다면,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이라크나 이집트에서 한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흉악하게 대응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대중운동은 거대할수록 그 안에 이질적 요소가 많기 마련이고 지배자들은 그 약점을 또 파고들 것이다.
따라서 기후 운동이 체제 자체에 맞서는 운동으로 성장하고 결국 체제에 맞서 승리하려면, 기존 지배 질서를 무너뜨릴 전략과 전술이 필수적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 운동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다. 가장 능동적인 활동가들은 운동의 성장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시에 운동을 최종 승리로까지 이끌 지도력을 구축하는 일에도 헌신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이 점을 꼭 유념하기를 온 마음으로 바란다.
2019년 9월 1일
김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