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운동의 등장 배경
한국의 시민운동은 1980년대에 유력했던 체제 변혁 지향적 운동이 비현실적이 됐다는 생각을 반영해 1990년대 초부터 급격히 부상한 운동이다. 시민운동의 주요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인 김동춘 교수는 “89년 말 경실련의 창립을 필두로 본격화된 한국 시민운동은 …… 한편으로는 체제변혁적·계급투쟁적 운동에 대한 반정립이자 동시에 그것으로 포괄되지 않는 민주화 영역을 정치사회, 경제적 차원으로 확대하려는 문제의식이 집약되어 있다”고 했다.(그러나 1980년대 체제변혁적·계급투쟁적 운동이 민주화 영역을 포괄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당시 진정한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은 바로 변혁 운동가들이었다. 김동춘 교수가 체제변혁적·계급투쟁적 운동이 민주화 영역을 포괄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민주화 영역”은 제도권을 말하는 듯하다.)
1990년대 초에 시민운동이 부상하는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는데, 하나는 1987년 대중투쟁의 결과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불안하게나마 전환이 시작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 소련 블록(이하 동구권)의 붕괴였다. 이 둘이 맞물린 상황은 운동 진영과 활동가들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 줬다.
1987년 대중투쟁의 폭발은 군사독재 정권이 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계속 통치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배자들은 자유주의적 야당의 정치 활동 허용과 대통령 직선제 도입 등 제한적 자유화 조치를 취함으로써 폭발적 양상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요구도 어느 정도 충족시켜야 했는데, 당시 최대 호황을 누리던 한국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양보할 여지가 있었다. 비록 자유화 조치가 매우 제한적이고 느리고 굴곡으로 얼룩졌지만(여전한 국가보안법의 존재와 적용이 이를 보여 준다), 일단 이런 변화가 시작되자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일정하게 보장되는 민주주의적 조건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만약 1989~1991년 동구권 붕괴가 없었다면 이런 주장이 광범한 활동가들 사이에서 얻은 반향은 실제보다 훨씬 덜했을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자들(이들은 투쟁이 더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과는 달리, 혁명 전망을 갖고 있던 전투적 투사들은 비록 스탈린주의자였고 2단계 혁명론(선 민주혁명 완수, 후 근본적 사회변혁)이라는 약점이 있긴 했지만 이런 변화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노태우 정부의 ‘민주주의’는 너무도 알량해서 노동자 투쟁과 좌파 세력을 혹심하게 탄압했다. 무엇보다,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정치투쟁은 7~9월 노동자 투쟁(경제투쟁)으로 이어져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노동계급의 힘을 역사에 각인하고 있었다. 노동자 투쟁은 1989년까지 고양됐다. 최근 지식인들은 1987년을 돌아보며 대개 6월 항쟁만을 중요하게 다루고 7~9월 노동자 투쟁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는데, 당시 노동자 대투쟁은 지배계급이 6월 항쟁의 성과를 되돌리지 못하도록 못 박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활동가들이 대안 사회로 여기던 동구권이 붕괴하자 1990년대 초반 내내 ‘민주화’ 조건을 활용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있겠느냐는 등의 낙담과 대안 부재와 혼란이 활동가들 사이에 깊게 퍼져 갔다. 당시 좌파들은 극소수 예외(국제사회주의자들)를 제외하면 모두 동구권의 몰락을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봤다. ‘우리가 꿈꾸던 사회주의는 한낱 이상이며, 설사 사회주의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끔찍한 독재로 막을 내릴 것이다.’
1980년대에 좌파 가운데 한 명이었고 나중에 시민운동 친화적 지식인이 된 한홍구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 민주화 추동 세력의 상당 부분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고 봅니다. 1987년 일정한 수준의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아마도 사회주의적인 방향의 개혁 요구가 심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던 참에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죠. 동구가 무너지면서 우리대로 대안을 갖지 못하고 발전 모델을 갖지 못하고 흩어지면서 각개 약진하게 됩니다.”
당시 진지한 활동가들은 동구권 붕괴에 심각한 충격을 받아 ‘성찰’과 ‘모색’의 시기를 겪게 된다. 마르크스 저작을 다시 들춰 보기도 했지만, 심지어 누구는 제도권 학교 윤리 교과서조차 들춰 봤다고 하니 당시의 사상적 혼란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NGO 활동가 1세대는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운동·학생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이동해 온 사람들이다.
한국 신사회운동의 등장과 여전히 강력한 ‘구’사회운동
신사회운동론이 과연 한국 시민운동에 적용되고 있는지는 논란이 많다. 예를 들어, 정태석 교수는 “경실련을 비롯한 많은 시민운동 단체가 현대성 또는 풍요한 사회의 중심 이념인 성장주의와 물질주의에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복지나 재분배와 같은 현대성의 목표들을 적극 추진해 왔다고 보는 게 좀 더 적절한 평가”일지 모른다고 한다. 경실련뿐 아니라 참여연대 등 ‘종합적 시민단체’로 분류되는 단체들에 어느 정도 해당하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하버마스의 ‘참여민주주의 전략’을 떠올려보면, 종합적 시민단체도 신사회운동론의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신사회운동론은 근대성에 대한 탈근대적 비판에만 근거를 둔 것은 아니다. 하버마스의 신사회운동론이 “부정적 근대화에 대한 근대적 비판”이듯이 말이다(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한 도구적 합리성 극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자유주의와 탈근대적 문제의식을 절충한 듯한 주장이 드물지 않다. “근대와 탈근대의 과제를 동시에 안고 가야 한다”는 흔한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또, 노동운동 중심의 ‘구사회운동’과 차별성 속에서 성립된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한국 시민운동은 신사회운동적 성격이 있다. 신사회운동에 대한 러셀 달턴의 정의는 이런 점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새로운 사회운동은 제도정치 밖의 비계급적·탈계급적 사회운동으로, 참여민주주의를 그 기획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운동은 체계에 대한 혁명적 변혁이 아니라 민주주의 변화와 수정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내부 문제에 뿌리를 둔 제도 정치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된다.”
신사회운동론은 여성·환경·소비자 운동 등 특정 이슈에 주목하는 시민단체에는 더 잘 들어맞는다. 가치와 생활양식의 변화, 네트워크와 풀뿌리 조직,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부정하는 다양한 운동들의 연대 등은 이런 시민단체들의 활동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1990년대 이후 운동 세대들은 여성·환경 부문에서 이런 운동 방식을 상식처럼 생각하겠지만,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신사회운동적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다. 신사회운동론을 둘러싼 논의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 운동들은 스스로 ‘구사회운동’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여성·환경 운동 등은 경제 성장과 대학 교육의 확대, 여성의 사회적 진출 확대 같은 사회적 변화와 민주화 운동으로 열린 공간이 맞물려 등장했다. 1987년 1월에 창립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모순을 외세에 의한 분단,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기본적 자유의 억압, 민중 억압적 경제정책으로 인식”했고, 1989년에는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가입했다. 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연합(1988년 창립) 역시 환경문제의 원인으로 “독점재벌, 군사독재, 미국”을 꼽았고, “민족민주운동의 전체적 과제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을 활동의 기본 방향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93년에 환경운동연합으로 재편하면서 “기업과 정부, 그리고 시민 개인들의 무절제한 소비생활”을 환경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생활양식의 변화 등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나아갔다. 최열을 비롯한 환경운동가들이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유엔환경개발회의에 참석한 것이 ‘시민형 환경운동’으로 전환한 결정적 계기로 평가된다.
한국여성단체연합도 1991~1992년 즈음에 입장을 재검토하자는 내부의 문제제기와 논쟁을 겪었다. 동구권 붕괴 후 사회주의가 여성해방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확산됐고, 이것은 계급 정치와의 이론적 단절, 구사회운동가들에 대한 적대감을 낳았다. “진보적 남성 지식인의 비진보적 여성관”(이 말은 1991년 권인숙이 발표한 논문 제목이기도 하다)이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이제 여성운동 내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라는 구호에 바탕을 둔 활동, 즉 개인의 삶을 바꾸기 위한 활동이 부각되게 된다.
1980년대 서구의 급진적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의 패배 또는 퇴조라는 좌절 속에서 신사회운동에 희망을 걸었듯이, 한국의 신사회운동도 1990년대 초에 이와 같은 경험 속에서 급부상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한국에서는] 1987년에 이르러서야 서구의 1960년대가 시작”됐고, “한국의 급진적 지식인들은 서구 지식인들이 이전[특히 1968년의 좌절 이후]에 이따금씩 겪었던 종류의 정치적 실망을 1990년대 초반에야 경험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 뒤 한국의 상황은 다소 모순적으로 전개됐다. 동구권 붕괴에 따른 계급 이데올로기의 퇴조가 운동 전체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한편, 1987년 투쟁으로 탄생한 한국의 신생 노동운동은 엄청난 국가 탄압 속에서도 1990년대 초반 잠시 동안의 침체 이후 성장을 지속하게 된다. 1994년 지하철과 현대 계열사의 인상적인 파업 투쟁이 있었고, 1995년 민주노총이 창립됐으며, 1997년 노동자 총파업을 거쳐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립됐다. 1994년 9월에 ‘노동운동과의 연대’ 필요성을 내세운 ‘진보적 시민운동’이 등장한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당시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주창한 조희연 교수는 ‘민중운동의 시대가 가고 시민운동의 시대가 왔다’는 경실련의 말이 더는 들어맞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 시민단체들은 노동운동이 여전히 강력한 조건 속에서 노동운동과 공존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NGO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과도 다르고, NGO에 비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힘이 강력한 유럽과도 다른 조건 속에 있다. 이것은 시민단체의 성장에 어느 정도 제약을 주는 조건이자 한국 시민운동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이었던 듯하다.
시민운동의 위기와 대안 찾기
많은 NGO 활동가들이 시민운동이 위기라고 말한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큰 성과를 거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론이 부상했으니 위기라는 말이 나온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된 셈이다. 특히 대변형·대형·메이저·중앙 NGO가 위기라고 한다. 시민단체 활동가들 자신이 꼽는 시민운동의 위기 원인은 여러 가지다. 그동안 시민운동이 제기해 온 의제가 제도권에 흡수됐고, 민주노동당의 등장으로 “대의의 대행”이라는 대변형 단체들의 고유한 구실도 퇴색했으며, 생활의 일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언론에 의존하는 운동 방식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등의 지적이다.
지난 부르주아 개혁 정부들과의 관계, 특히 노무현 정부와의 관계 문제에 대한 지적도 빼놓을 수 없다. 시민운동은 친시민단체 성향으로 간주된 노무현 ‘개혁’ 정권의 추락에 강력한 타격을 받았다.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성찰적 평가를 내놨듯이, “시민운동은 보수화되어 가는 노무현 정부와 구분되는 독자적 사회 비전을 갖춘 독립적 주체임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동반 추락 효과를 면치 못했다.
이태호 처장은 ‘권력에 유착했다’는 보수적 비난에 대해 그 과장을 논박하는 등 “미시적이고 각론적인 해명”을 해 봤지만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노무현 정권에 시민단체 친화적인 인물이 이전 정권보다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이 사실”이고, 시민운동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 일부는 “주요 각료와 청와대 비서관, 열린우리당 정책그룹으로서 정권 참여라는 맥락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 역시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이 단지 우파 쪽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본문에서 필자는 이 문제를 거버넌스라는 차원에서 조명했다. 이태호 처장은 시민운동이 노무현 정부와 설정한 관계가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춘 모든 정부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 협력과 견제의 일반적 방법론”에 의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협력과 견제의 일반적 방법론” 자체가 문제를 낳는다. 많은 NGO들은 신자유주의 정부와 협력하면서 작고 점진적인 변화들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 쪽으로 정부를 견인하기는커녕 체제의 궤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또, 이태호 처장은 사실은 시민단체들이 “노무현 정부의 보수적 정책으로 인해 정권과 극심한 갈등과 불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한미FTA 문제 등에서 많은 시민단체들은 정권의 반대편에 섰다. 그러나 그것은 사안별·정책별 반대를 넘어서지 않았다. 한두 사안이 아니라 정권 자체가 문제였을 때 시민단체들은 운동이 정권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특정 정책에 반대해 정책 대안은 내놨지만, 실패한 정권을 대체할 전략적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던 것이다.(이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NGO의 태도, 단일 쟁점 운동의 한계 등과도 관계된 문제인데, 이런 문제들은 본문에서 다뤘다.)
이런 점에서 이태호 처장이 “이념과 종합적 비전”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것은 진일보한 면이 있다. 그동안 시민운동이 거대 담론,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전망하는 거시적 논의를 회피하고, 그 중요성 자체를 부정해 온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개혁 국면 동안 시민운동이 취한 미시적, 제도 개혁적, 실사구시적 접근은 공허한 정파적 논쟁의 회피 등과 같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의 구호 일변도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드러냈다. 민중운동이 관성적인 거대 담론, 천편일률적인 계급 담론의 한계에 빠졌다면 시민운동은 담론의 부재, 미시적 전문화로 인한 이념과 종합적 비전의 부재라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태호 처장은 성장개발주의와 선진화 담론에 맞서는 새로운 진보 담론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노무현 정부가 드러낸 한계는 한국 시민사회의 한계이고, 그 한계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시장 만능주의, 패권주의, 냉전적 사고 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실패는 결국 시민 의식의 문제로 귀착되고, 시민운동의 과제는 새로운 진보 담론을 시민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된다.
“이념과 종합적 비전”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은 분명 진일보한 면이 있지만, 계몽주의의 틀을 넘어서지는 않는 듯하다. 역사의 변동은 사상 투쟁의 결과이고, 사회의 진보는 대중의 계몽을 통해 가능하다는 가정이 엿보인다. 시민운동 위기의 대안으로 대안적 공동체와 교육 체계, 미디어의 역할 등이 강조되는 것은 이런 시각과 관계 있다. 시민들은 변화의 주체가 되기 전에 변화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식 변화는 사회 전반의 세력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세력 관계가 피지배자들 편에 불리해 그들의 사기가 낮을 때는 아무리 좋은 비전이라도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품게 되고, 대규모 투쟁이 벌어져 사기가 높을 때는 비현실성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상상력이 나래를 펴고 급진적 비전을 수용한다. 대개 일천한 의식 수준에서 시작하는 듯한 노동자와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중요하게 봐야 하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의 개혁이 과연 종합적 비전의 부재로 말미암아 좌초했는지도 진지하게 돌아볼 문제다. 선거를 통해 지지받은 이런 정부들의 개혁 프로그램은 자본의 해외 유출 같은 압박에 봉착해 실패하곤 했다. 이런 사실은 좋은 비전이 있고 다수의 지지를 받지만 자본의 저항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진보 담론을 수용하도록 기업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서 자본의 저항을 제압할 수 있는 행위 주체 문제가 제기된다. 시민운동이 “가두의 정치”, “집회 위주”라고 흔히 제쳐 버리는 대중행동과 노동계급 문제를 천착해 봐야 하는 이유다.
시민운동의 위기를 개혁주의의 위기로 조명하기
시민운동의 위기는 개혁주의의 위기라는 더 큰 문제 속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NGO를 체제의 부속물일 뿐인 것으로 (잘못) 보지만, 개혁주의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시민운동의 위기는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 전망을 상실한 채 한국 사회를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사회로 바꿔 보려 한 시민운동의 (온건한) 개혁 비전이 2000년대 들어 좌절을 맛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 밀레니엄은 NGO의 기대와 달리 전쟁과 신자유주의라는 화두 속에 시작해 계급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고 사회를 양극화시켰다. 빈부격차를 가리킨 20 대 80이라는 말은 10 대 90을 거쳐 “1퍼센트 부자”라는 말로 정착했다. 이런 양극화 속에서 특정 계급이나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 중립성을 표방하는 시민운동은 좌우의 압력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경제 위기 심화와 함께 이런 압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전쟁과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위기의 표현들로서, 야만의 시대, 줬던 개혁도 빼앗으려는 시대를 고했다. 국가를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는 시민운동의 비전은 세계가 점점 더 불안정해지면서 위기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운동은 “한국, 브라질 등 새로운 민주국가들의 출현이 이러한 [부시의] 패권주의에 도전하는 ‘평화와 민주주의의 축’으로 작용하리라 기대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노무현 정부는 실리를 내세워 부시의 전쟁을 지원했고, 이 과정은 “노무현 정부 초기에 존재했던 자신의 지지 기반, 혹은 시민들의 자기결정권과 충돌하고,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시민운동 활동가들은 2000년대는 의제도 달라졌고, 제도화 중심의 활동 방식도 위기를 맞았다고 평가한다. 1990년대에 시민운동의 주요 의제였던 정치·사법 개혁과 반부패는 기성 정치권도 공감하는 문제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제도 개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00년대에 떠오른 의제들 ―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한미FTA 등 ― 은 “제도권 내부의 의제가 되지 못한 구조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이슈”들이었고, 이 문제들을 다루는 데서 “시민단체들에게 익숙한 활동 방식, 즉, 미시적 수준에서의 ‘현실적 대안’을 찾는 방식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NGO의 대중행동 없는 운동의 약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시민단체들, 특히 대변형 단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나 제안이 정치권 혹은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이를 압박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특히 주요 언론이 보수적이고 공격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조건에서 시민단체가 가진 유효한 수단이 많지 않다는 것이 확연해졌다.” 그런데 시민운동 활동가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거다’ 싶은 의제를 제기하는 의제 선점력과 창조적인 행동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로 이런 한계를 극복하려는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반짝 눈길을 끌 수는 있지만, 정부를 압박할 힘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NGO가 정부를 압박할 힘을 가지려면 대중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갈등이 첨예해지는 경제 위기 시기에, 양보를 강제할 힘 없이 “제도권 내부의 기회 구조”에 기대는 방식은 한계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다른 방식으로 의제의 변화를 설명하기도 한다. 1990년대 대변형 시민운동의 경우 의제 설정 기준의 가치 지향이 “우리 사회의 근대적 합리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명성, 형평성, 공정성 등”이었다면, “최근 성장하는 시민운동은 본질적으로 다른 패러다임에 기초한 의제 설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태와 한반도 분단 극복을 포함한 평화, 인권, 성평등이라는 가치 지향이 세계화와 정보화로 인한 사회 변화와 마주하면서 구체적 의제로 우리 사회에 던져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신사회운동론의 문제의식(구사회운동을 대체한다는 식의)을 말하는 것이라면 별로 새롭지 않다. 서구에서 그것은 1970년대에 등장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1990년대 중반에 나타났다.
오히려 새롭게 주목할 것은 1999년 시애틀 시위 이후 이런 의제들이 기업 세계화, 즉 자본주의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때로는 공동의 적에 맞서 노동운동과의 연대 가능성도 보여 줬다. 환경 문제를 생각해 보면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이윤 논리에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시민운동은 시장 만능주의에 반대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전쟁에 반대해 평화적 국가를 추구한다. 그러나 체제의 위기가 깊어질수록 이런 개혁의 여지는 점점 줄어든다. “이윤보다 인간”이라는 기업 세계화 반대 운동의 국제적 공통 구호를 성취하기 위해서도 자본의 논리 자체와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 하는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그것을 통해서만 전쟁과 기아와 환경 파괴라는 야만을 종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