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21세기로 접어드는 세계는 옛 세대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해졌지만 빈곤과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32쪽
미국의 소득분배는 제3세계 나라와 비슷해지고 있다. 즉, 상위 1퍼센트는 진짜로 엄청나게 부유하고, 상당한 소수(대략 12퍼센트)는 1주일에 40시간, 1년에 50주씩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인데도 공식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한다.
48쪽
정치적 우파가 사회적 불평등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 들거나 심지어 불평등을 옹호하기도 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평등이라는 이상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짜증내는 태도는 중도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58쪽
평등이 구체적인 사회적·정치적 요구로 나타난 것은 근현대 세계의 막을 연 위대한 혁명들의 결과였다.
65쪽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 요구를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 정말이지 사회적·정치적 투쟁들로 분열된 사회에서 제기된다. 이런 사회구조의 어떤 점이 평등자유 염원을 부추기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법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취급되지만 사회의 심층에는 체계적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여전히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67쪽
사회주의의 의의는 그것이 프랑스혁명의 평등 약속과 1789년 이후의 격변으로 등장한 사회의 현실이 다르다는 인식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93~94쪽
롤스의 철학적 전략에서 놀라운 점은 롤스도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칸트에서 출발하지만 그 토대 위에서 평등주의적 정의론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97쪽
롤스가 말한 정의의 제2원칙, 즉 그 유명한 차등의 원칙에는 급진적 평등주의의 성격이 있다.
98~100쪽
롤스의 급진성에는 다른 측면도 있다. 기회의 평등을 능력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달리] 롤스는 생산수단처럼 양도할 수 있는 자원뿐 아니라 개인이 양도할 수 없는 천부적 재능을 사용해 얻은 이익도 정의의 원칙에 따라 분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 따라서 차등의 원칙은 (적어도 흔히 생각하는) 기회의 평등보다 더 심층적 형태의 평등을 함축한다.
102쪽
롤스의 정의의 제1원칙을 실행하려면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달성해야 한다. 이것은 자유와 평등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의 주장보다는 자유와 평등은 함께 간다는 발리바르의 주장을 분명히 뒷받침한다.
107~108쪽
평등의 척도가 될 만한 주요 후보로는 롤스가 말한 사회적 기본재 외에도 복리, 자원, 이익에 대한 접근권(또는 복리를 얻을 기회), 역량이 있다. 이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 평등주의자들이 제안한 재분배의 본질이 무엇인지 또 애초에 평등의 실현을 추구하는 심오한 윤리적 이유가 무엇인지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10쪽
사람은 자신이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냥 포기해 버린다. 불평등과 빈곤이 극심한 상황에서 최소 수혜자들의 선호를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은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7~118쪽
자유와 평등을 연관시키려는 센의 노력은 … 중요하다. … 신자유주의자들은 평등이 실현되면 개인의 자유가 급격히 축소될 것이라는 이유로 평등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센은 이런 식으로 자유와 평등을 대립시키는 것은 “‘범주 오류’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자유와 평등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는 평등의 적용 대상이고, 평등은 자유의 분배 형태다.”… 우리는 평등이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균등하게 해서 … “개인의 성장과 완성”에 기여한다는 더 적극적 이유에서 평등을 소중하게 여길 수도 있다.
128쪽
언뜻 보면, 양도할 수 있는 생산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는 양도할 수 없는 타고난 재능의 불평등한 분배만큼이나 불가피한 운의 사례 같다. 그러나 평등에 관한 최근의 논쟁들은 착취 문제를 하찮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129쪽
평등주의적 분배는 개인의 생산 기여도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결코 새롭지 않다. 사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에서 ‘기여 원칙’은 이런 개인적 차이와 그에 따른 [불리한 처지에 대한] 보상 요구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기여 원칙에 따르면 개인들은 자신의 노동에 비례해서 보수를 받아야 한다)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130~131쪽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도록 강요당하고, 그래서 착취당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그런[착취당하는] 조건으로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지가 없다. 이것은 노동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 착취는 생산 자원이 처음 분배될 때 어떤 부정의가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정의롭지 않다. … 더욱이 착취는 그 결과로 이익에 대한 접근권이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도 부정의에 일조한다. 다시 말해, 1장에서 거론한 부자와 빈자의 양극화는 대체로 착취의 결과일 수 있다.
132쪽
로버트 브레너는 1973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 경제의 실적을 살펴본 후 “이 시기 내내 수익성이 유지되고 1990년대에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은 지난 세기 동안, 어쩌면 남북전쟁 이후로 전례 없이 임금이 억제된 덕분이었다” 하고 말한다. 따라서 부와 빈곤, 또 그에 따른 유리한 처지와 불리한 처지의 매우 불평등한 구조는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
158쪽
평등주의적 정의 이론들이 사회적 자원의 상당한 재분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최근에 존 로머는 미국의 교육 분야에서 ‘심층적’ 기회의 평등을 달성해서, 어린 학생들이 어떤 환경에서든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서 성인이 됐을 때 소득이 같게 하려면 백인 학생에게는 1인당 900달러를 써야 하는 반면 흑인 학생에게는 1인당 2900달러를 써야 할 것으로 계산했다.
168쪽
유럽중앙은행 같은 자유방임주의 수호자들은 선진국 경제를 괴롭히는 만성적 대량 실업이 주로 ‘구조적’ 실업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런 대량 실업은 공급 측면의 결함들, 특히 지나치게 경직된 노동시장, 너무 힘이 센 노동조합, 너무 후한 복지 혜택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도 갈수록 이런 진단을 지지한다.
176쪽
경쟁력과 인적 자본의 관계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암시하는 주장, 즉 교육받을 기회가 확대되면 저절로 실업이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181쪽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매우 극심하고 (앞에서 살펴본 대로) 현재의 자원 분배는 전혀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부유층에서 빈민층으로 [자원이] 극적으로 이전돼야만 상황을 바로잡기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불편한 진실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규모의 재분배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든 간에 [최선책이 아니라] 차선책이나 차차선책에 만족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곧 사회정의라고 착각하며 위안을 삼을 자격이 없다.
182쪽
제3의 길이라는 사회민주주의 전략의 근본적 모순은 평등주의적 목표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결합하려는 데 있다.
208쪽
정보와 결정이 중앙과 생산 단위들 사이에서 수직적으로 오가지 않고 다양한 생산자·소비자 집단들 사이에서 수평적으로 오가는, 훨씬 더 분권화한 계획 체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독창적 능력을 넘어서는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211쪽
불평등한 구조와 태도, 그에 따른 행동 방식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인데도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따라서 고정불변의 사실처럼 보이는 것이다. 케인스주의 시대의 부정적 특징이 무엇이었든 간에 당시에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고 심지어 변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회·경제 생활 영역이 상당히 확대됐다. 지난 세대의 신자유주의적 반동은 자율적 인간 개입의 범위를 크게 좁혔다. 다시 한 번 시장 메커니즘은 인간의 소망에 꿈쩍도 하지 않는 자연력으로 실체화했다.
215쪽
필요한 것은 이익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을 확실히 보장하는 쪽으로 상당히 나아가는 것이다. 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는 데는 한참 못 미치더라도 어쨌든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몇 걸음조차 오늘날 널리 퍼진 부정의한 사회구조에서 이득을 보는 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서는 결코 안 된다.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곧 혁명을 제안하는 것이다.
215쪽
변화의 가장 큰 장애물은 특권층의 반발이 아니라,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믿음이다. 위협적인 경제 환경에 직면해서, 또 자본주의에 반대한 전통적 대안들이 지리멸렬해진 상황에서 개인들은 절망에 빠지기 매우 쉽다. 내가 보기에 평등주의의 이상에 진지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의 의무 하나는 이런 분위기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227~228쪽
능력주의가 [1789년] 혁명 전의 프랑스처럼 귀족이 지배하는 사회를 겨냥했을 때는 비판적 통렬함이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거의 대부분 타고난 신분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역동적 기업가’를 두둔하는 변명이 되기도 쉽다. 예컨대, 1871년의 파리코뮌을 짓밟고 건설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재능 있는 사람에게 열린 출세의 길”을 구호로 채택했다.
228쪽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1875)에서 능력주의라는 이상을 암묵적으로 비판했다. 사람들이 생산적 노력을 얼마만큼 했는지에 따라 보상한다는 것은 “불평등한 개인적 재능을, 따라서 노동자들의 불평등한 생산능력을 타고난 특권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을 더 발전시킨 사람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자 존 롤스다. 그는 《정의론》(1971)에서 “자신의 더 큰 천부적 능력이나 공적을 사회에서 더 유리한 출발점으로 이용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했다.
228쪽
능력주의가 비록 얄팍한 이상이기는 하지만, 영국이 얼마나 불평등한 사회가 됐는지를 폭로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231~232쪽
진정한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상향 이동뿐 아니라 하향 이동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상류층의 자녀라 해도 재능이 없으면 사회구조의 아래로 전락할 것이다. 그래서 재능 있는 하층계급 자녀에게 [상향 이동의]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영국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 바로 그것이다.
235쪽
능력주의는 매력적이지 않은 얄팍한 이상이다. 능력주의가 정말로 실행된다면, 재능 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 독식 사회’로 쉽사리 귀결될 수 있다. 《능력주의의 발흥》(1958)에서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 사회의 긴장이 폭발해서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을 묘사했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라도 달성하려면, 부와 소득의 대규모 재분배와 특권에 대한 단호한 공격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