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주는 의미
이러한 과학은 그것을 전공하는 과학자들이 공부하면 될 텐데 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우리가 왜 과학을 공부해야 할까요? 그 해답을 얻으려면 과학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과학의 첫 번째 의미는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과학적 사고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말하며, 과학적 사고방식은 과학 정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의 위력이라고 하면 과학적 지식이나 그것을 특별히 기술로 응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요즘에는 그 위력과 힘을 협소하게 물질문명, 더 좁게는 무기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서 순식간에 점령했지요. 이때 두 나라의 실질적 차이는 어느 쪽이 군사력이 강하냐 하는 것이었고, 이를 결정하는 무기들은 기술의 응용에서 나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과학의 위력은 과학을 기술에 얼마나 잘 응용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 자연과학의 위력이란 기술의 응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의미는 과학을 통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연과학이란 자연현상, 곧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근원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자연과학을 탐구하다 보면 인간과 우주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세계관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며, 이것이 ‘과학이 우리 삶에 주는 새로운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결론 부분에서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과학의 현실적 의미를 들 수 있겠네요. 우리는 현대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습니다. 디포 소설에 나오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현대사회에서 자연과학은 아주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좋든 나쁘든 말이지요. 자연과학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 소양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 문명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로는 과학 지식의 이용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학 지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용한다면 과학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을 잘못 이용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핵무기 같은 것은 본말이 전도된 과학 문명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인류 전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지요. ……
마지막으로 과학의 의미는 문화의 중요한 근간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나요? 몇 해 전에《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이 꽤 많이 읽혔지요.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흔히 이런 책에서 다루는 예술품들을 생각하고 과학을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과학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는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서울의 종묘 등을 생각할 수 있겠네요.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 또 무엇이 있죠? 수원 화성과 팔만대장경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화유산의 공통점은 인간의 활동을 통해 얻어진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과학 활동의 탐구 대상입니다. 과학 활동은 자연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것인데, 인간도 자연에 포함되니 당연히 과학 활동의 대상이지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인간은 과학 활동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자연과학은 그런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과학 활동의 주체라는 면에서 보면 과학도 다른 인간 활동과 마찬가지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 중에 종묘와 함께 종묘제례악이 있지요. 문화재라면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기 쉬우나 무형문화재도 있지요. 인간이 만든 창작물인 과학도 음악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자연과학은 사실 공학보다 인문학에 더 가까운 편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과학이 공학, 기술과 깊은 관련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문학, 철학, 예술 등 인문학과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단과대학 편재에 문리과대학이 있지요. 실제로 널리 알려진 외국 대학의 경우 대부분 문리과대학이 대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학교에서는 문리과대학을 1975년에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으로 나눴지요. 우리나라 대학 중에는 심지어 자연과학대학과 공과대학을 묶어서 이공대학을 만든 곳도 꽤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학문의 본질에 비춰 볼 때 타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좋은 이론
일반적으로 어떤 현상을 설명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중에서 어떤 이론을 선택해야 할까요? 취사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위의 예에서 우리는 왜 지구중심설을 버리고 태양중심설을 택했을까요? 둘 다 현실성에서는 문제가 없는데 말이지요.
숭례문이 국보 1호입니다. 흥인지문은 보물 1호고요. 생각난 김에 왜 흥인문이 아니라 갈 지(之) 자를 넣었는지, 그리고 현판이 흥인지문은 가로로 되어 있는데 숭례문은 왜 세로로 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 있어요? 흥인지문의 지는 동쪽의 땅기운을 북돋우기 위해서 넣었고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국보가 보물보다 급이 높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숭례문이 흥인지문보다 더 우수한가요? 예술품을 보면 어떤 것은 아주 좋고, 어떤 것은 상대적으로 좀 떨어진다는 등의 평을 하지요. 물론 이러한 평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불타 버린 사건은 그야말로 기가 막혀서 뭐라 말할 수 없네요.)
이론에서도 ‘좋은 이론’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론도 다 같지는 않아서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말하는 데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술품에서 “이 작품이 저 작품보다 좋다”는 평은 어떤 뜻인가요? 고등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학생들 모두 같은 풍경을 그렸는데 미술 선생님께서 어떤 학생의 그림은 좋고 어떤 학생의 그림은 그에 비해 좋지 않다고 하셨다면 그 기준이 뭘까요?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작품을 좋게 평하셨겠지요.
좋은 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정확성이라든가 보편성이라든가 다산성이라든가 하는 요소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핵심적인 것 두 가지만 설명하지요. 먼저 이론에서 임의 요소가 있는데 너무 많지 않아야 합니다. 임의 요소가 너무 많으면 이론의 의미가 없어지지요. 몇 가지의 임의 요소로만 출발하되 경험과 연결할 때 최대한 넓은 관측 결과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이론의 중요한 첫째 조건입니다. 관측을 통해서 감각 경험과 연결하는 것이 이른바 실증적 검증 과정인데, 이때 가능한 한 넓은 관측 범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보편성이 클수록 좋다는 거지요.
다른 한 가지 조건은 관측 결과를 명확히 예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이론이 되려면 일어난 일에 대해 잘 설명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의 핵심은 앞에서 이야기한 반증가능성이지요. 결과를 명확히 예측했는데 실제로 관측하니 예측과 다르다면 반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이론이 관측 결과를 명확히 예측하지 않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한다면 반증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것은 반증가능성이 없으므로 좋은 이론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앞날을 기억(예측)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람들에게 가서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기겠냐고 물어본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명확하게 말하지 않지요. 알 수 없는 말을 한참하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적당히 두루뭉수리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반증할 수 없지요. 나중에 이러니까 맞았다고 하는데 다르게 했어도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명확하게 예측하지 않기 때문이고, 따라서 반증가능성이 없도록 만드는 거지요. 이런 것은 과학 이론이라 할 수 없어요.
이른바 ‘유사과학’, 더 확실하게는 ‘사이비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국 이 두 가지 조건 중에 적어도 한 가지는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실증적 검증이 되지 않거나 명확한 예측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요. 사이비과학이냐 아니냐는 이를 잘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요새는 재미있게도 말로는 과학의 시대라서 여기저기마다 뒤에 과학을 붙이지요. 무슨 무슨 과학이라고요. 하기야 침대도 과학이라고 하니까요. 구체적 예를 들기는 곤란하지만 신과학이니 창조과학이니 하는 야릇한 과학이 많은데 그런 것이 사이비과학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아닌지는 이 두 가지만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이론이 되려면 넓은 범위의 관측 결과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데, 따라서 과학의 발전이란 더 보편적인 이론 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네요. 고전역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갈릴레이의 낙하의 법칙이라든가 관성의 문제 등에서 태동해서 이런 것들을 더 보편적인 이론 체계로 확장한 것이 뉴턴의 고전역학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더 보편적인 이론 체계로 확장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들어 봤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레이에서 뉴턴으로, 그리고 아인슈타인으로 가는 것이 바로 더 보편적인 이론 체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복잡계 현상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로 넘어가 볼까요? 21세기 자연과학, 특히 이론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복잡계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이론과학은 보편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너무 복잡하면 보편지식의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비교적 쉽고 간단한 현상만 이론 체계를 구축해서 이해할 수 있지요. 그래서 이론물리학자들은 어려운 것은 이해할 능력이 없어서 거의 빤한 것만 다루면서 그럴듯하게 보이려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일면 타당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자연에도 복잡해서 전통적으로 물리학이 다루지 못했던 현상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생명현상이나 인간의 사회현상 같은 것은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에 그동안 이론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겨 왔지요. 간단한 현상과 복잡한 현상, 어느 쪽이 자연의 더 본원적 모습인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아무튼 20세기 후반부터 혼돈이나 협동현상, 떠오름 같은 개념이 정립되면서 많은 구성원으로 이뤄진 다양한 계에서 상호작용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을 활발하게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복잡해서 이론과학으로 다룰 수 없었던 현상까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지요.
20세기까지 지배적인 자연과학적 사고의 핵심은 결정론과 환원론이었지요. 복잡계 현상을 이해하려면 이에 대한 수정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러니까 21세기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출발해서 자연현상을 해석하자는 거지요. 이른바 결정론을 보완해서 예측 불가능성을 기본 요소로 고려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환원론에 대비해서 전체론(전일론)적 관점에서 ― 환원론은 환원주의라고 쓸 수 있지만 전체론은 전체주의라고 하면 다른 뜻이 되어 버립니다 ― 자연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나무를 보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숲을 보자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고전물리학의 두 가지 요소로, 운동을 다루는 고전역학과 전기와 자기, 빛을 다루는 전자기학을 지적했습니다. 그럼 전자기 현상은 어떨까요? 전자기 현상을 기술하는 법칙도 관측자에 따라 변하지 않고 같으면 좋겠지요. 다시 말해서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가 역학 법칙뿐 아니라 전자기 법칙에도 적용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면 더 보편적인 이론 체계를 추구하는 물리학자는 행복하다고 느끼지요.
실제로 어떤지 살펴볼까요. 간단한 전자기 현상을 생각해 봅시다. 정지해 있는 전하, 곧 전기를 띤 알갱이가 있으면 전기마당이 생깁니다. 여기에 다른 전하를 갖다 놓으면 전기의 부호에 따라 끌어당기거나 밀치게 되지요. 정지해 있는 전하가 자신의 주위 공간에 전기마당을 형성했고, 다른 전하는 그 전기마당에 놓여 있으므로 전기력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한편 전하가 움직이는 경우, 곧 전류가 있으면 자기마당이 생깁니다. 이는 전기 이음줄에 전류를 흘려서 만드는 전자석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전자석은 자기마당을 만들어 내고, 자기마당에 놓인 다른 자석 또는 전류에 자기력을 미치게 됩니다. 여기서 전하가 움직인다고 해서 전기마당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전기마당은 어차피 생기는데 움직이면 거기에 더해져서 자기마당이 또 생기므로, 결국 힘이 달라집니다.
이러한 추론은 매우 중요한 결론을 가져옵니다. 이 지우개가 전하라고 하면, 여러분이 볼 때는 이것이 정지해 있으니까 주위에 전기마당만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움직이면서 보면 이 지우개는 뒤로 움직이니까 전류가 흐르는 거지요. 그러면 자기마당이 생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보면 전기마당만 있는데, 움직이면서 보는 나에게는 전기마당뿐 아니라 자기마당도 나타납니다. 놀랍게도 전자기 현상의 기술에서는 서로 등속운동을 하는 두 관측자가 다르다는 거네요. (예컨대 전자기마당에서 움직이는 전하가 받게 되는 전자기힘, 곧 로렌츠힘이 두 관측자에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에 따라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가 역학 법칙에는 성립하지만 전자기 법칙에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보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물리학자는 이런 상황에서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보편성이 없이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는 결과는 우리가 자연현상에 대한 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본질적으로 아예 시간과 공간 같은 기본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뛰어나다고 하는 이유는 무모할 만큼 과감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전물리학 체계를 잘 이해하고 있으면 거기에 대한 선입관념이 강할 테고 본질적으로 출발이 잘못되었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왜냐면 고전역학이 케플러 법칙처럼 일상적인 일들을 너무나 완벽하게 해석해 냈는데 어떻게 그걸 의심할 수 있겠어요? 이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갈릴레이가 당시 받아들여지던 낙하의 법칙 ―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것보다 먼저 떨어진다는 것 ― 을 의심한 것만큼이나 힘들지요.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고,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역학 법칙만이 아니라 전자기 법칙도 관측자에 관계없이 똑같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등속운동 하는 관측자에게는 역학 법칙만이 아니라 전자기 법칙도 똑같다”고 전제했는데, 이는 결국 고전물리학의 모든 것이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요약하면 “서로 등속운동 하는 관측자는 동등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이것은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를 확장한 것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더 정확하게는 특수상대성원리라고 부릅니다. 동등하다는 말은 모든 자연현상의 해석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며, 모든 물리법칙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상대성원리라면 보통 이것을 가리키지요.
예술로 본 상대론
그 전까지 서양미술의 주류는 사물을 그리는데 원근법을 이용했습니다. 먼 것은 작게 그리고 가까운 것은 크게 그리는데, 멀리 있는 것이 실제로 작은 것은 아니니까 이는 사실 눈속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피카소는 원근법으로는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보는 시점을 한군데로 고정하지 않고 여러 군데에서 봐야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상대성이란 개념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에 따라 여러 화점에서 관찰하고 이를 재구성해서 표현한 작품이 바로 위의 그림입니다.
서양은 20세기 들어와서야 이러한 의미를 생각했는데 동양은 어땠을까요? 조선시대의 화가 겸재 정선을 알지요? 그림 11-15는 겸재의 <금강전도>입니다. 보다시피 어느 한 지점에 화점을 놓고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의 화점에서 그렸지요. 이러한 한국화 기법을 삼원(三遠)이라고 하는데 높고(고원), 깊고(심원), 평평한(평원) 지점, 적어도 세 군데의 성격이 다른 화점을 잡아서 그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실제 본성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다고 믿은 거지요. 겸재 정선이 18세기 초에 그린 그림이니 피카소보다 200년가량 앞섰네요.
양자역학의 관점
이것을 실제로 확인하기 위해서 데이비슨과 저머가 전자의 에돌이 실험을 수행했고 빛의 경우와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전자도 빛과 마찬가지로 에돌이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지요. 앞에서 논의한 영의 겹실틈 실험에서 빛 대신에 전자를 써도 역시 간섭무늬를 얻게 됩니다. 전자 같은 물질 알갱이도 파동 성질을 지닌다는 이른바 파동-알갱이 이중성이 확증된 겁니다.
파동-알갱이 이중성이란 언제나 파동과 알갱이의 성질을 같이 가졌다든지, 그 중간이라든지 하는 뜻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파동처럼 거동하고 어떤 경우에는 알갱이로서 거동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겹실틈에 전자를 보내면 두 실틈 중에 어느 쪽으로 지나갈까요? 전자를 1만 개쯤 보내면 대략 5000개는 한쪽, 5000개는 다른 쪽으로 가겠지요. 그런데, 각 전자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전자를 보내면서 두 실틈 중 어느 쪽으로 지나갔는지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쳐다보면 놀랍게도 간섭무늬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위치를 측정하면 전자는 더는 파동의 성질을 가지지 않고 완전히 알갱이처럼 행동합니다. 그런데 위치를 측정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전자가 어디로 갔는지 쳐다보지 않으면 전자는 파동처럼 행동합니다. 우리가 측정하면 각 전자는 이쪽이나 저쪽 중에 한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쳐다보지 않으면 파동처럼 거동해서 이리로도 가고 저리로도 갑니다. 다시 강조하는데 ‘우리가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를 뿐이고 실제로는 어느 한쪽으로 간 것이다’가 아니지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비유합니다. 그림 12-3에서처럼 겨울 스키장에서 누군가 스키를 타고 내려온 자국이 있습니다. 두 발로 타니까 눈에 나란히 두 짝의 스키 자국이 나 있습니다. 내려오다 보니 높은 고목나무가 하나 있네요. 그런데 눈에 스키 자국이 나무 양옆으로 한 짝씩 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무 어느 쪽으로 지나간 걸까요? 지나갈 때 봤다면 어느 한쪽으로 지나갔겠지요. 그러나 보지 않았다면 양쪽으로 지나가서 다시 합쳐진 셈입니다. 이것이 이제 논의할 양자역학의 관점입니다.
현대 우주론의 바탕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우주의 불어남(팽창)을 이미 예측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마당방정식을 풀어 보면 멈춰 있는 우주는 안정되어 있지 않아서 우주는 결국 불어나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마당방정식에 새로운 항을 추가했습니다. 우주가 멈춰 있도록 하려고 일부러 마당방정식을 변형했지요. 말하자면 서로 끌어당기는 중력 때문에 멈춰 있기 어려우니까 이에 대응해서 서로 미는 힘을 집어넣은 겁니다. 이를 우주상수라고 부르지요. 이렇게 해서 멈춰 있는 우주를 얻어 내고 행복했는데,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우주가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허블이 관측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를 집어넣어서 우주가 꼼짝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일생 최대 실수라고 스스로 인정했지요. 그런데 사실은 “우주상수를 집어넣은 것이 내 일생 최대의 실수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최대 실수입니다. 현재는 우주상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상수가 필요하다고 몇 해 더 우겼으면 과연 통찰력이 놀랍다고 다들 경외심을 가졌을 텐데, 안타깝네요.
아무튼 이론적으로 뒷받침되고 관측으로 확인되었으니 이제 불어나는 우주, 팽창우주는 우주를 이해하는 핵심적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에 따르면 옛날에는 우주가 작았지요. 시간을 계속 거슬러 가면 결국 태초에 우주는 한 점에서 이른바 ‘대폭발(빅뱅)’로 탄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여기에서 시작한 것으로, 대폭발 이전에는 시간이란 개념을 생각할 수 없어요. 사실 시간이란 수수께끼 같은 문제지요. 아무튼 대폭발이 우주의 탄생, 창조의 순간인 셈입니다. 우주의 창조를 비롯한 우주론이 중세에는 형이상학이나 신학의 문제로 여겼는데 이젠 과학의 영역이 된 거지요. 따라서 현대 우주론의 바탕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허블의 빨강치우침 관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어나는 우주
일반상대성이론이 이론적 우주론의 바탕이라고 지적했지요. 이러한 우주론적 원리를 전제하고 일반상대성이론의 마당방정식을 풀면 우주의 모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주 자체는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정지우주는 사실은 불안정합니다. 우주에는 은하를 비롯한 물질이 분포되어 있는데 그런 물질은 중력이 작용하므로 서로 끌어당깁니다. 그러면 우주가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끌어당기니까 결국 한 곳으로 모여들게 되겠네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우주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도 멈춰 있는 우주는 불안정한데 이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를 집어넣어서 우주가 멈춰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우주상수는 서로 당기는 중력에 대응해서 마치 서로 미는 힘을 주는 셈이지요.
그러나 현재 우주는 멈춰 있지 않고 불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팽창우주의 근거가 지난 강의에서 다룬 빨강치우침의 관측입니다. 멀리 떨어진 천체에서 오는 빛의 빛띠를 분석해 보면 파길이가 원래보다 길어져 있음을, 곧 빨간빛 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관측했지요. 도플러효과로 해석하면 천체가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므로, 결국 우주가 불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팽창우주가 성립이 되었지요. 사실은 허블이 빨강치우침을 관측하기 전에 이미 프리드만과 (가톨릭 사제였던) 르메트르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마당방정식으로 우주가 불어날 수 있음을 보였고,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가능성을 논의했습니다. 그러니 이론적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이 팽창우주를 뒷받침하고 있고, 관측에서도 빨강치우침이 팽창우주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주가 불어난다는 의미를 혼동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우주가 공 모양이고 그 반지름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런데 공의 안쪽이 우주라면 그 바깥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비어 있어요? 물질이 없는 빈 공간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깥에는 물질만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도 없습니다. 우주가 불어난다는 것은 공간이 늘어나고 있음을 뜻합니다. 바깥에 빈 공간이 있어서 우주가 그쪽으로 점점 확장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공간 자체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겁니다. 풍선을 불어서 늘어나는 것을 우주 팽창에 비유할 때, 풍선의 부피가 불어나는 것이 우주가 불어나는 것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 비유에서 우주는 풍선의 안쪽이 아니라 풍선의 겉면입니다. 곧 우주를 2차원으로 나타낸 것이지요. 풍선을 불면 겉면이 어떤 식으로 늘어나죠? 바깥에 비어 있던 공간을 겉면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없던 면이 생겨나게 됩니다. 곧 공간 자체가 늘어납니다. 우주가 불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 바깥에 바탕이 되는 빈 공간이 있어서 이를 우주가 점점 채워 가는 것이 아니고, 공간은 우주가 전부인데 공간 자체가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거지요.
유전자 결정론 비판
그중에서도 많이 시끄러웠던 것 중에 하나가 유전공학에 관련된 문제지요. 이른바 줄기세포, 배아 복제, 유전자 조작 같은 겁니다. 이러한 유전공학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사실 현대 기술의 핵심 쟁점입니다. 몇 해 전에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분이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고 아주 유명해졌잖아요? 이러한 유전자 조작에 담겨진 기본 전제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유전자 안에 있다’라는 믿음입니다. 지난 강의에서 생명현상을 간단히 소개했는데, 생명에서 유전정보란 매우 중요한 문제지요. 어떤 생명체의 유전자 정보를 다 안다면 그 생명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유전자 조작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유전자 정보를 완전히 알면 그 생명체를 완전히 이해한 것인가요?
지난 시간에 언급한 복잡계 현상을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성원 하나하나를 안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협동현상으로 떠오르는 전체의 집단성질을 자동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집단성질이란 새롭게 떠오르는 거지요. 생명도 이같이 떠오르는 현상입니다. 더욱이 이미 지적한 혼돈이라는 현상 때문에 초기조건의 미묘한 차이가 결과를 완전히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비효과처럼 말이지요. 생명도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유전자 여닫이를 통해서 유전자의 발현이 달라지는데, 그 여닫이는 미묘한 차이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결과를 완전히 예측하기는 불가능할 수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유전자 정보만 알면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는 생각,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론물리학의 관점에서는 분명합니다. 그동안 생물학의 주류는 분자생물학으로서 이를 공부하다 보면 대체로 유전자 결정론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물리학, 특히 복잡계의 관점에서 보면 동의하기 어렵지요. 물론 유전자가 아무런 구실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상당히 강력한 제한 조건을 제공합니다. 강조하는 점은 환경과 유전자는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러한 환경과 유전자의 상호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론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상호작용을 무시하고 환경을 따로 떼어 버리고 유전자만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는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러한 분리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