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과 운동의 관계
운동들의 발전은 오늘날 급진 좌파의 과제를 보여 준다. 급진 좌파는 이런 운동들과 효과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운동의 일부가 되고, 운동을 건설하며, 운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정치적으로 투쟁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치러야 하는 결정적 시험이다. 전국 수준이든 전 유럽 규모이든 서로 다른 조직들의 선거 개입은 이런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지, 선거 개입 자체를 목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예컨대,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의 아주 효과적인 대통령 선거운동이 성공을 거둔 이유는 올리비에가 특히 프랑스 청년 다수의 반자본주의 의식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의식을 표현하는 정치적 매개체를 건설하는 데서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이 중요한 구실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거운동은 급진 좌파가 급진화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수단 중 하나일 뿐, 정치 개입의 특권적 형태가 아니다.
당연히, 급진 좌파는 정당 건설에 몰두한다. 반자본주의 운동 내에서 개혁주의와 자율주의 경향에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이 논쟁적 견해를 배격한다. 레닌주의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흔히 정당과 운동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잘못된 양자택일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정당과 운동 둘 다 건설하려 해야 한다. 효과적인 사회주의 정당은 운동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운동을 더 강력하게, 더 역동적이게, 더 응집력 있게 만들 수 있다. 예컨대,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전쟁저지연합의 주요 세력이다. 이 때문에 전쟁저지연합의 호소력이 더 약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예컨대 제국주의에 대한 공식적 비판이나 급진 이슬람에 대한 비난에 몰두함으로써 전쟁저지연합을 협소하게 만들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우리는 전쟁저지연합이 부시의 전쟁몰이, 그에 따른 인종차별적 공격, 시민적 자유 억압을 반대하는 활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성공적으로 주장함으로써 전쟁저지연합이 최대한 포괄적인 기구가 되도록 하는 데 일조했고, 그 결과 대중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다.
정당과 운동의 관계에 대한 이런 식의 평가는 더 광범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일련의 영원한 교과서들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며, 그 역사적 과정을 통해 연속적인 혁명가 세대들은 당대의 구체적 투쟁들에 개입해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정당을 건설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 그런 정당을 건설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레닌과 트로츠키를 읽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그것이 필수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현재 급진 좌파에 가능성을 제공한 역사적 상황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시애틀 시위, 제노바 시위, 9·11 이후 시기의 “당 건설”은 제2인터내셔널 시기나 러시아 혁명 직후, 스탈린주의의 전성기는 물론 1970년대나 1980년대의 당 건설과 같지 않다. 지금 우리가 건설해야 하는 당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역사적 상황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좌파의 부활과 재편은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고 한 가지 중요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5 그 두 가지 원인은 스탈린주의의 붕괴와 반자본주의 운동의 발전이다. 한 가지 도전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다. 중동부 유럽 스탈린주의 정권들의 몰락과 옛 소련의 해체는 처음에 국제적으로 좌파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서구식 시장 자본주의의 대안 체제처럼 보인 것이 존재한다는 데 여전히 희망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희망이 아무리 무의식적이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은 장기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의무를 청산하는 데 도움이 됐으며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정치를 스탈린주의라는 괴물과 연관 지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대결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줬다. 새 시대로 진입했다는 생각을 크게 강화시킨 것은 세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적 운동이 발전한 것이다. 그 과정의 획을 그은 것은 시애틀·제노바·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와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이었다. ≪역사의 종말≫ 이후 10년 만에 자본주의는 또다시 실천에서 도전받고 이데올로기에서 경쟁 상대를 만나게 됐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약점 ― 특히 이데올로기적 모순, 그리고 조직 노동계급과의 모호한 관계 ― 이 분명하다고 해서 국제적으로 좌파가 부활한 것의 엄청난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이 직면한 도전은 분명하다. 탈냉전 시대는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임이 입증됐다. 이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미국은 독일·일본·러시아·중국 같은 주요 경제적·지정학적 경쟁국들과 먼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중간급 자본주의 독재 정권들과 대결한다. 지금 이라크에 집중된 부시 정부의 전쟁몰이는 이 과정을 새롭고 위험한 국면으로 몰아갔다. 따라서 반자본주의 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은 그 초점을 확대하고 반전·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변하는 것밖에 없다. 이탈리아와 영국처럼 이 과제를 수행한 곳에서는 운동이 심화하고 확대됐다(사실, 영국에서 반전 시위들은 그 전까지 다소 흐릿했던 반자본주의 정서를 진정한 운동으로 확실히 변모시켰다). 반자본주의 네트워크들이 부시의 전쟁몰이 반대 운동을 활동의 중심으로 세우지 못했을 때,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운동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급진 좌파가 선거에서 이용한 세 가지 모델
급진 좌파가 선거에서 이용한 세 가지 상이한 모델을 살펴보자. 분명히 한쪽 끝에는 프랑스 모델이 있다. [프랑스의] 정치 문화는 공산당 정치가 여전히 상당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고 아주 빈번한 선거에서(이 토론 회보 지난 호에 실린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문서에 따르면, 1995∼2004년에 프랑스에서는 전국 선거가 여덟 차례나 있었다!) 부르주아 우파와 사회자유주의 경향의 좌파가 엎치락뒤치락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혁명적 좌파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풍토에서 선거운동에 참여해 왔다. 1968년 5~6월의 대규모 폭발 직후인 1969년에 알랭 크리빈이 새로 결성된 공산주의자동맹(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의 전신)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아를레트 라기예르는 1974년 이후 모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국가적 유명 인사가 됐다.
선거 과정에서 노동자투쟁당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둘 다 공공연한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그들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상당한 정치적 차이가 숨어 있다(비록 스타시스 쿠벨라키스는 이 토론 회보에 실린 그의 두 번째 글에서 두 조직 모두 특정한 “반정치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노동자투쟁당은 선별된 작업장 주변에서 일사불란하게 활동하는 당 건설 노선을 추구해 왔다. 그러면서 (중앙의 지도 아래) 매주 작업장 소식지들을 발행하고 모종의 영원한 진실들(특히 공산당과 사회당의 반노동계급적 성격)을 반복하는 사회경제적 선동과 선전에 집중해 왔다.
반면에,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은 기동성이 훨씬 더 뛰어난 듯하고 그 투사들은 광범한 정치 운동들에 참여하면서 정치적 주도력을 보여 줬다. 예컨대,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은 유럽의 반자본주의 운동 건설에 적극 참가하는 반면, 노동자투쟁당은 그 운동이 쁘띠부르주아 보호무역주의자들이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이라며 기피한다. 자연히 두 조직 간의 선거 협정들은 할리우드 스타들 간의 결혼 계약서처럼 세세한 사항들을 신중하고 주의 깊게 협상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아하고 정중하게 모욕을 주고받은 뒤에 때때로 각자 제 갈 길을 간다. 예컨대, 2001년 지방선거와 2002년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가 그랬다.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는 리스펙트 모델이 있다. 첫째, 리스펙트는 단일 정당이 아니라 다원적 연합이다. 둘째, 2004년 1월 리스펙트 창립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전면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이 아니라 전쟁·신자유주의·인종차별·여성차별에 반대하는 더 제한적인 강령이다.3 셋째, 리스펙트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주요 세력은 세 부분인데, 노동당 좌파 출신의 정치 활동가들이나 노동조합 활동가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더 소규모의 극좌파 조직들과 무소속 활동가들, 그리고 진보적 무슬림 지도자들이다. 외관상 이질적인 이런 결집은 공동의 반전운동 경험이라는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프랑스 모델과 리스펙트 모델의] 중간에는 스코틀랜드 사회당이 있다. 밀리턴트 경향(잉글랜드·웨일스 사회당의 전신)에서 점차, 그러나 고통스럽게 발전해 나온 스코틀랜드 사회당 창립자들이 하나의 뚜렷한 정치적 조류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 주민세에 반대한 대규모 반란 뒤에 글래스고 여러 지역에서의 사회적 선동을 통해서였다. 지역사회 정치와 선거 정치를 창조적으로 결합한 그들은 스코틀랜드 의회(부분적으로 비례대표제를 토대로 구성되는) 창설과 신노동당에 대한 노동계급의 이반에서 비롯한 기회를 이용해 1998년과 2003년 홀리루드 선거에서 각각 1석과 6석을 확보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 사회당은 아주 모순적인 현상이다. 광범한 사회주의 강령을 가진 성공한 의회주의 정당이면서도 당을 창립한 극좌파가 여전히 강력하게 통제하는 그런 정당이다.
비록 스코틀랜드 사회당 지도부가 다른 곳에서도 본받을 만한 모범으로 스코틀랜드 사회당을 띄우는 경향이 있지만, 이 세 모델 중 어느 하나가 ― 또는 다른 어떤 모델들이 ― 보편적 타당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그다지 사려 깊지 않은 듯하다. 분명히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과 노동자투쟁당의 방법은 매우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다. 즉, 혁명 ― 1789년부터 1968년까지 ― 이 계속 어떤 기준점 구실을 하고 라기예르가 선전한 아주 추상적인 마르크스주의조차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나라에서, 분명한 혁명적 사회주의에 기초해 출마하는 것은 그럴듯한 출발점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황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사실, 현재 상황 ― 제국주의 전쟁, 신자유주의 공세, 쇠퇴하는 사회민주주의 ― 은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돼 있는 혁명가들에게 21세기의 좌파 재구성에 일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리스펙트 전략을 추구하기로 결정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리스펙트가 보편적 모델이기 때문도 아니고 리스펙트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없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그런 전략적 분석이 다른 경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리스펙트를 탄생시킨 것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현상 ― 노동당 정치의 위기와 부시 정부의 상시적·세계적 전쟁 ― 의 수렴이었다. 분명히 이 둘의 지위는 동등하지 않다. 영국 사회민주주의의 쇠퇴는 그 기원이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기적 과정인 반면, “테러와의 전쟁”은 훨씬 최근의 현상이다. 비록 제국주의의 발전이라는 더 큰 배경 아래 진행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둘을 결합해 현재 영국 정치의 가장 유력한 현상으로 만든 것은 물론 토니 블레어다. 신노동당은 정책 홍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영국의 사회민주주의를 사회자유주의로 다시 포장해 사회민주주의를 구출하겠다고 약속했다. 2001년 총선 때 이 외관상의 치료법이 사실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블레어 노선은 노동계급을 더욱 이반케 하고 대다수 평당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노동당 정치의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전쟁이 터졌다. 진주만 공격 이래로 영국 지배계급의 전략이 미국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세계적 역할을 유지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노동당 소속의 총리는 누구라도 부시 정부의 전쟁몰이에 어떻게든 동참했을 것이다. 그러나 블레어가 “테러와의 전쟁”을 포용하는 데서 보여 준 독선적 열렬함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99년 코소보 전쟁 당시 있으나 마나 했던 정치인이 자신의 허전함을 달랠 커다란 대의명분을 결국 도덕적 제국주의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레어는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라는 제국주의 모험에 신노동당을 끌고 들어갔고, 그럼으로써 비교적 느리게 진행되던 정치 위기를 임박한 단기적 재앙으로 바꿔 놓았다. 영국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2004년 6월 10일 선거의 중요한 의미는 노동당이 재앙적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