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북미 대화가 동아시아 평화를 가져올까?
민족 공조로 제국주의의 위협에서 벗어나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는 남북한 당국의 의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북미 관계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한반도 상황은 세계 제국주의 체제의 상황과 연동돼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체제의 정치/경제 상황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가 한반도 상황에 훨씬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금 세계는 장기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강대국 간 경쟁과 갈등이 점증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머지않은 미래에 매우 위험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한반도 정세와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좌우하는 주요한 변수다. 따라서 지금은 트럼프가 북한과 대화하고 있지만, 상황 변화에 따라 그 기조는 언제 다시 바뀔지 모른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저항할 정치 세력이 아니다. 남북 군사합의, 대북 제재 문제 등에서 트럼프 정부와 견해가 다소 다르지만, 미국과의 공조를 근본에서 흔들 선택은 하지 않으려 한다. …
일각에는 문재인 정부를 압박해 견인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어불성설이다. 문재인 정부는 자본주의/제국주의 세계 체제에 얽히고설킨 한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그 나름으로) 표현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일본의 경제 보복은 미국의 일본 ‘패싱’ 때문이다?
한반도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미국은 일본을 “패싱”하고 있지 않다. 올해 6월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거기서 일본을 인도/태평양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규정했다. 트럼프 시대에도 미국의 “아시아 중시”가 계속될 것임을 보여 준 이 보고서는 중국의 경제/군사적 급부상이 21세기를 규정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부상하는 중국이 이 지역 경제 질서와 안보를 흔들고 아시아 국가들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은 미일 동맹을 주춧돌 삼고 그것을 중심으로 인도/호주/한국/아세안 등 동맹국들을 연결함으로써, 중국에 맞서 지역 “평화와 번영”(즉, 미국 중심의 기존 질서)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
이런 전체 그림을 보지 않은 채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가 지역 평화의 견인차가 되고 있는 양 착각하고 일본 “패싱”이라는 그릇된 인상에 기대어 한일 갈등을 보면, 반제국주의 운동의 핵심 쟁점과 대상을 놓치게 된다. 아시아의 긴장과 갈등을 부추기는 미일 동맹과 그에 협조해 온 한국이 문제인데, 마치 트럼프와 문재인은 한반도 평화 세력을 대표하고 이를 망치려는 일본 제국주의만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일본 제국주의 반대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 진보/좌파는 일본의 과거사 부정과 군사 대국화에 일관되게 반대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 정부를 일본에 맞서는 같은 편이라고 믿고 지지하는 입장이다. 진정한 진보/좌파라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면서 그와 독립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 트럼프에 협조해 한반도 평화를 보장받는다?
2003년 부시 정부가 이라크에 전투부대를 파병해 달라고 노무현 정부한테 요구하자, 노무현의 외교안보 참모인 이종석을 중심으로 한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파병을 정당화했다. “이라크에 파병하는 대가로 북한 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다고 봤[다.] … 이것이 북핵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한국의 이라크 파병이 도움이 된다는 시각, 즉 ‘평화 교환론’이다.” 그래서 이종석은 2004년 노무현 정부의 자이툰 부대 파병이 “‘평화를 증진하는 파병’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강변한다. …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구상은 한 번도 작동한 적이 없었다. 2003년 미국 국무 장관 콜린 파월은 노무현 정부의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이라크 파병을 연계할 수 있음”을 듣자마자, 그 구상을 단칼에 거절했다. …
이라크인들을 희생시켜 한반도의 평화를 얻는다는 구상은 처음부터 매우 역겨운 구상이자 어불성설이었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면, 부시는 얼마든지 그 여세를 몰아 북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셋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해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돕기로 한 노무현의 결정은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에 역행하는 짓이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평화 교환론’은 2006년 북한 핵실험을 통해 완전한 파산으로 드러났다. …
일각에서는 ‘우리’가 트럼프의 원군이 되자고 주장함으로써, 트럼프가 세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틈바구니에서 ‘우리’ 한반도만이라도 안전지대로 빠져나가자는 민족 이기주의적 발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지독하게 반동적인 트럼프가 활개치는 것을 좌시하는 것은 결국 부메랑이 돼 한반도로 돌아올 것이다. 트럼프 같은 노골적 제국주의자들이 만드는 위험한 세계에서 한반도만 홀로 항구적으로 안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