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가 단지 상부구조일 뿐이라면, 정치적 영역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경제적 영역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경찰이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은 계급투쟁과 아무 관계가 없게 되고, 기업주에 맞서 싸우는 것은 핵폭탄에 반대하는 투쟁과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
국가와 자본을 완전히 융합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실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가 유지하는 억압 형태들은 자본의 축적 필요에서 곧장 비롯한다. 국가의 억압 형태와 자본의 축적 필요는 서로 충돌할 수 없다. 성적 억압, 인종차별, 가족 구조, 관료적 위계질서, 정치적 공포, 심지어 전국적 노동조합 조직조차 모두 국가는 곧 자본이라는 ‘논리’의 산물이다. 그런 견해의 결론은, 자본주의 질서의 토대 자체에 도전하는 근본적인 사회적 충돌과 기존의 제도적 구조를 개혁해서 억제할 수 있는 덜 근본적인 사회적 충돌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
오늘날 국가와 자본의 관계를 올바로 파악하려면 ‘단순한 상부구조’라는 견해와 ‘국가는 곧 자본’이라는 견해를 모두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자본과 자본주의 국가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상호작용하는 구체적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현존하는 국민국가들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상부구조로서 생겨났지만,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반작용해서 그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 토대와 상부구조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생겨난 혼란은 대부분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는 “토대”의 정의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토대’가 사실상 인간과 자연의 물질적 상호작용(생산력)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사회관계, 즉 사회적 생산관계라고 생각했다. …
사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구별하는 것은 ‘토대’와 ‘상부구조’만이 아니다. 두 가지 구별이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구별이 있고, 그다음에는 생산관계와 그 밖의 사회관계 사이의 구별이 있다.
혼란이 일어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결합이다. 그러나 이 결합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더 기본적’이다. 역동적인 것은 ‘생산력’이다. 왜냐하면 생산력은 고정적인 ‘생산관계’와 충돌할 때까지 계속 발전하기 때문이다.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상응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구별이 둘째 구별, 즉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구별보다 먼저다. 생산력 발전은 생산관계의 특정한 변화로 이어진다. 이런 생산관계의 변화가 이번에는 다른 사회관계의 변화를 낳는다. 비경제적 제도가 모두 기존 경제 관계의 재생산을 지원(하고 그래서 더한층의 경제적 변화에 저항)할 때까지 말이다.
이 구별의 의미는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생산력이 고정적이라면 어떤 사회가 체계적 변화를 겪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된다. 기존의 사회관계는 스스로 재생산하는 경향만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의 상호 관계에서도 기껏해야 임의적이고 우연한 변화만이 가능할 것이다. 사회적 생산관계든 더 광범한 사회관계든 혁명적 사회 변화(예컨대, 소규모 무리의 사회에서 정착촌의 사회로 또는 중세 봉건제 장원의 사회에서 선진 산업자본주의 도시의 사회로)가 실제로 일어나도록 결코 자극하지 못할 것이다.
• 자본주의 국가의 다양한 형태
자본주의 국가의 다양한 형태를 살펴볼 때 두 가지 잘못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는 상이한 형태들이 본질의 차이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본가 지배의 한 형태가 아니라고 본다. 우파 사회민주주의의 시조인 베른슈타인은 자유민주주의가 계급 정부의 폐지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해,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더는 자본가계급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 형태와 꼭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독재의 한 형태다.
또 다른 잘못은 이 다양한 형태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고전적 사례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스탈린주의가 파시즘에 관해 취한 태도다.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은 파시스트 체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바른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다양한 자본주의 국가 형태의 차이를 구분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이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 구조의 겉모습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는 선거가 있다든가, 국가자본주의는 일당 국가라든가 하는 등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형식적인 정치적 차이는 다양한 자본주의 국가 형태에 존재하는 사회적 내용의 차이를 반영한다. 자본주의 국가 형태는 국가가 자본가계급이나 노동계급과 맺는 다양한 관계를 구현하고 또 그런 관계를 조직하는 데 이바지한다.
• 좌파적 개혁주의, 국가, 그리고 오늘날 사회주의 정치의 문제
개혁 염원은 크지만 전통적 개혁주의 정치인들이 그 염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간극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 하나는 좌파적 개혁주의 운동의 재부상이다. 주류 개혁주의의 불충분함에 대해 좌파적 개혁주의 운동이 가하는 비판은 환영할 만하고 긍정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좌파적 개혁주의는 개혁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므로 대안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
좌우를 막론하고 개혁주의의 비극은 단순히 정권을 잡는 것과 권력 장악을 혼동해서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프로젝트는 국가의 나머지 광범한 부분을 건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생산수단] 통제권을 둘러싼 더 뿌리 깊은 경제 관계에는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 이처럼 개혁주의는 정치권력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노동자 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많이 끼쳐 왔다. 개혁주의 정치인은 선거 승리를 우선시하며 의회 바깥 활동 일체, 특히 노동자 조직의 활동을 선거 승리에 종속시키기 쉽다. 그 결과 개혁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를 이용해 반자본주의적 정책을 시행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 아래) 현실에서 벌어지는 반자본주의 활동을 약화시키곤 한다. 좌파적 개혁주의는 개혁주의의 결과를 비판하는 덕분에 부상하지만 왜 개혁주의가 그런 결과를 낳는지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 노동자 정당이 집권하면 노동자 정부인가?
좌파 정부는 국가기구와 단호히 절연하지도, 노동자 권력으로 가는 길을 닦지도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18년 독일에서는 좌파 정부 자체가 반혁명의 도구가 돼, 기성 국가에 반대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을 진압했다. 칠레에서는 좌파 정부가 국가와 협력하면서 대안적 노동자 권력 기구들을 억압하거나 무력하게 만들었고, 민중연합 정부의 기반이 분열하자 무장한 국가기구가 기력을 회복해서 민중연합 정부와 운동을 파괴했다. …
개혁주의 노동자 정당의 집권 가능성은 특히 부르주아 정당들이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을 때 많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런 정부는 근본적 사회 변화의 전제 조건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혁명가들은 우선 이것이 환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노동자 정당들이 정부 권력을 차지하더라도 국가를 그대로 둔다면 노동자들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둘째, 동시에 많은 노동자들에게 이 환상은 계급의식이 성숙한 결과라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노골적인 자본주의 기준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가 아니라 노동계급이 지배하는 사회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혁명가의 임무는 계급의식의 발전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좌파 정부의 구실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
우리의 임무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나서도록 하는 슬로건을 제기하는 것이고, 개혁주의 노동자들과 단결해서 행동하고, 그 투쟁 속에서 ‘좌파 정부’에 대한 착각을 깨는 것이다. 계급의식은 무엇보다 행동 속에서 변한다.
• 니코스 풀란차스의 정치 이론 비판
풀란차스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두 차원에서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좌파가 의회 제도를 사회주의 정치 활동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활용하고 그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와 병행해 노동자 평의회처럼 직접민주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조직되는 “자치” 기구가 발전해야 한다. 요점은 “사회주의로 가는 민주적 길, 곧 민주적 사회주의”를 찾아내는 것이다. …
의회 민주주의는 노동자 평의회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번번이 입증됐다. 어느 하나가 유지되려면 나머지 하나는 파괴돼야만 했다. 1936년 프랑스에서 공산당은 인민전선 정부를 수호하려고 대중파업 운동을 철회시켰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 갈 무렵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공산당들은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을 무장해제시켜 의회 제도를 보호했다. 칠레에서도 아옌데의 국민연합 정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 운동을 공격했다. 직접적 공격과 관료 집단을 통해 제한하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말이다. 거듭 반복된 잘 알려진 재앙들은 다 이런 전략의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