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서 저항이 증가하는 이유
일단 미국의 존재를 용인했던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왜 2004년부터 반대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재건’의 실체를 봐야 한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해 주기를 바란 것은 아프가니스탄인만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도 거의 모든 사람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상당한 원조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2002년에 재건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고 심지어 전쟁저지연합의 사람들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인들과 유럽인들은 미국이 자기네 이익을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아프가니스탄을 재건할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미국 정부는 과거에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파나마를 재건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소말리아와 아이티는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그대로 방치해 버렸다. 훗날 이라크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날 터였지만, 미국 정부에게는 재건 개념이 없었다.
한편으로 그 이유는 일단 미국에게 대들면 영원히 비참해진다는 본보기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정부가 국내에서도 사회복지를 포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5년에 목격했듯이 미국 정부는 뉴올리언스를 바그다드처럼 취급했다. 그들은 국내에서도 가동하지 않는 복지 프로그램을 해외에서 가동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사담 후세인은 모든 이라크인들에게 먹고살기 충분한 만큼의 식량을 배급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이라크 침공 직후 가장 먼저 이 배급을 중단하려 했다. 그러나 식량 배급을 중단하면 굶주린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미국 정부는 결국 식량 배급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실은 미국인들에게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미국에서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주리는 마당에 그 사실이 알려졌다간 큰일 날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개발 원조는 거의 없었고, 예외적으로 카불의 주민들 200만 명에게만 식량이 공급됐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나마 제공된 원조도 NGO들이 착복했다. 1980년대부터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사실상 제 기능을 거의 못했다. 정부의 기본적 업무(도로 관리, 식량 수송, 교육과 의료 제공 등)는 거의 외국계 NGO가 도맡아 했다. 탈레반 치하에서 정부는 법질서 유지와 종교적 구실만 맡았고 나머지는 NGO가 처리했다. 카르자이 치하에서 정부 기능이 약간 확대되기는 했지만 NGO가 여전히 대부분의 일을 한다.
NGO는 두 가지 방법으로 원조를 착복했다. 첫째는 봉급과 수당이었다. 예를 들어, 카불에서 NGO 간사들이 살만한 주택(높은 담장, 경비원, 방호 시설이 달린)의 임대료는 한 달에 2000~1만 달러 정도다. 이에 반해 아프가니스탄 노동자 일인당 월 평균 소득은 30달러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카불의 주거 지역은 1980년대 이슬람주의 정당들 간의 내전으로 대부분 파괴됐고 그 후 복구되지 않았다. 고참 NGO 간사들은 아프가니스탄 장관들보다 훨씬 더 많이 번다. 카불의 한 NGO 사무실에서 일하는 외국인 간사 한 명의 월급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현지인 스무 명의 월급을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이는 외국인 간사에게 딸려 오는 자가용과 운전기사는 뺀 수치다. 게다가 현지인들이 일을 더 잘하고 대게는 경험도 더 많으며 언어 장벽도 없다. 그러나 외국인 간사들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수입 격차를 합리화하려고 현지인 동료들을 모자란 사람 취급한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또한 NGO의 고위급 외국인 간부들이 돈을 횡령하거나 뇌물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급진 정치 성향의 경험 많은 개발 요원들은 아마도 그 말이 사실일 거라 말한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부패를 과장했을 수도 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미국의 원조였지만 막상 눈에 보이는 것은 믿기 힘들 정도로 풍족한 NGO 활동가들의 삶이었으니 말이다. NGO들은 아프가니스탄의 도시 불평등이 심해지는 데도 일조했다. 또, 외국인들뿐 아니라 일부 현지인들도 가세한 온갖 낭비와 음주·파티 문화, 그리고 절망적 소외를 조장하는 데도 일조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이전에도 성매매가 있었지만 NGO가 들어오면서 중산층의 성매매가 널리 확산됐다. 2006년에 미군이 보행자를 치어 죽였는데 이에 항의하는 성난 시위대에게 발포해 소요가 발생했다. 그때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카불의 NGO 사무실들을 불 질렀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탈레반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을 상대로 자살 폭탄 공격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물게 민간인을 상대로 테러가 발생하면 탈레반은 자신들이 연루되지 않았음을 공개적으로 밝힌다. 그러나 탈레반은 외국인 NGO 간사들을 죽이는 것은 꺼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만큼 NGO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제 발전을 기대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저항이 증가하는 두 번째 주요 이유는 점령군의 행동이다. 미군 병사 조니 리코는 우르즈간 주州에서 복무했다. 그의 책 ≪피가 푸른 잔디를 키운다≫는 자신의 부대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묘사하는데, 그의 묘사는 다른 파편적 언론 보도와 맞아 떨어진다. 리코의 부대원들은 전장에 투입되도록 훈련 받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부대 밖에 “적”들이 있고, 그들을 찾아 순찰을 돌 거란 말을 들었다. 병사들은 ‘전투’를 고대했고(비록 나중에 진짜 전투를 경험하고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진짜 사나이’가 되길 원했다.
병사들은 순찰을 돌면서 문을 박차고 들어가 사람들을 거칠게 다뤘고, 마치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행동했다. 마침내 누군가 병사 한 명을 쏘자 그들은 공중폭격을 요청했다. 이에 격분한 가족과 주민들이 그 다음 주에 이 부대를 공격하자 이들은 더 많은 공중폭격을 요청했다. 마침내 격노한 민간인들은 ‘탈레반’이 됐고 이 계곡은 교전 수칙에 제한을 받지 않는 특수부대의 관할로 넘어가 쑥대밭이 됐다. 그러고 나서야 미군은 이 계곡을 떠났다. 이런 패턴이 동부와 남부의 파슈툰족 지역 곳곳에서 되풀이 됐다. 애초에 미군이 파슈툰족 지역을 순찰이 필요한 지역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파슈툰족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저항을 낳은 세 번째 요소는 불안정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처음에는 미국의 지배를 어느 정도 용인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기초적인 치안도 유지되지 않았던 것이 부분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점령군은 치안을 돌보지 않았고 사법 기능을 수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점령군 자신이 예측 불가능한 커다란 위험 요소의 하나였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 지역에서 공식 법원이나 제대로 된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고 난민들 다수가 고향에 돌아온 뒤로 토지소유권은 훨씬 더 불분명해졌다. 새로운 대지주들이 예전처럼 힘을 과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버락 오바마와 플랜 B에 대해
오바마의 계획은 럼스펠드 사퇴 이후 이미 계속 진행 중인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는 미군의 수를 기존의 3만 명 수준에서 앞으로 2년 안에 5만 명 수준으로 늘리자고 제안했는데, 이 계획은 이미 실행되고 있다. 오바마는 ‘경량화 군대’의 규모도 늘리고 개발 원조도 늘리고 카르자이 정부를 인정할 수도 있는 저항 세력과는 평화 협상도 하자고 주장한다.
오바마 제안의 첫 번째 부분, 즉 병력 증파는 전쟁을 확대하자는 의미인 듯하다. 반면에 두 번째, 즉 평화 협상과 인도주의적 원조는 평화를 의미하는 듯하다. 사실 두 부분은 모두 새로운 전략의 일부다. 탈레반은 주로 동부와 남부에서 군소 군벌들을 격퇴하며 성장했다. 미국이 추진하는 계획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 중앙정부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통제력을 넓히자는 것이다. 그래서 저항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지역에서 군벌들을 갈아치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부동맹이라는 거물 군벌들을 제거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북부동맹은 정권 내부에서 영향력이 워낙 크고 탈레반에게 그렇게 많이 밀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계획에서 국가 건설 부분에 해당하는 개발 원조는 전쟁에 협력하고 중앙정부에 충성하는 현지 실세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것이다. 국가 건설 계획에는 베나지르 부토의 생각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부토는 파키스탄에서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소수종족연방보호지역FATA까지 확대되기를 바랐다. 2007년 가을에 베나지르가 [망명에서] 파키스탄으로 돌아오자 <네이션>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부토는 소수종족보호지역에서 폭력을 이용해 종교를 확산시키려는 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개발, 자치, 민주주의를 보장할 것이다.” 부토의 정당[파키스탄인민당]과 그 동맹들은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지역을 포섭해서 통합하겠다는 전략을 계속 공언하고 있다. 2008년에 부시 정부는 파키스탄 정부가 소수종족보호지역에서 전쟁 동맹 세력을 매수하는 데 쓸 “개발 원조 자금” 7억 5000만 달러를 향후 5년 동안 파키스탄에게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파키스탄 전문가 크리스틴 페어는 급진 세력들이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4년 늦었다’고 말했다. 최근 보고서에서는 ‘우리가 그 돈을 누구에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부시 정부에 뒤질세라 버락 오바마와 조지프 바이든은 2008년 7월에, 앞으로 5년 동안 파키스탄에 대한 비군사 원조 금액을 75억 달러까지 늘리는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
오바마는 새로운 접근법에 동의한다. 올해 초에 연설에서 오바마는,
“미국의 힘을 모두 통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럼스펠드 사퇴 후 ― 지은이] 육군과 해병대가 새로 만든 반란 진압 교본에 제시된 것처럼 능력을 더 폭넓게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그 교본은 퍼트레이어스가 썼다. 오바마는 “성공하려면 우리 민간의 역량을 향상시켜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군대도 때로는 위험한 곳에서 경제적·정치적 재건 임무를 해낼 수 있는 민간의 협력이 없으면 폭도들과 테러리스트들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최상·최고의 인재를 영입하고, 외교관의 수와 능력을 배양하고, 군대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전문가와 그 밖의 민간인을 육성해서 민간의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 분명히 오바마는 새로운 전쟁 계획을 인도주의라는 미사여구로 치장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은 인도주의적 원조를 가로막을 것이다. 이미 1년 전에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거의 절반이 원조·개발 노동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출입 금지” 지역으로 설정됐다. 국제적십자위원회 같은 NGO들은 대부분 무장 호위를 받으며 분쟁 지역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점령군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미국 정부의 직접 원조를 늘려 NGO들의 구실을 대체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원조가 군사화하면 진정한 목표가 전쟁을 지속하려는 것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점령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오바마가 뭐라고 말하든 외국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인들을 위해서 주둔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은 재앙적인 침공과 군사점령 상황에서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국가 건설”이라고 오만하게 주장한다. 강대국에 예속되지 않으면 어떤 나라도 발전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른바 ‘국가 건설’은 국가의 주권(확실히 진정한 국가 건설의 출발점인)을 거부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에 저항하는 운동은 모조리 막강한 화력을 사용해 분쇄하는(그래서 재건이 필요하다) 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단지 부패와 낭비의 문제만도 아니고 원조가 부족한 문제만도 아니다. 계획 전체가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통제력과 이익을 증대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야말로 진짜 문제다. 모든 제국주의적 프로젝트에는 추악한 부정 비리와 부패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점령의 재앙적 결과는 바로잡으면 되는 실수가 아니라 식민지 점령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고 우리가 점령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일 뿐이다.
많은 외국 군대 병사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런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들의 증언은 효과적인 반전운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할 것이다. 이 전쟁에는 병사들이 피 흘릴 가치가 전혀 없다. 그러나 진정한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이다. 반소 전쟁 기간에 레이건 지지자들은 아프가니스탄인이 단 한 명만 남더라도 자신들은 소련군에 맞서 싸우겠노라고 농담을 했다. 지금도 미국은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인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