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평등을 규명하는 열쇠, 착취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불평등의 원인으로 착취에 관심을 갖는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착취는 요즘 흔히 사용되는 용어법처럼 악덕 기업주가 제3세계 저임금 공장에서나 자행되는 악행을 뜻하는 게 아니다. 착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으로부터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 불평등은 자본주의 체제의 생래적 특징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지난 20년 동안 벌어져 온 일이다. 이처럼 부와 빈곤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다. 부유한지 빈곤한지에 따라 서로 다른 출발선을 강요당하는 불평등한 구조는 인과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 인과적 관계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 사이에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가의 부는 노동자를 착취한 결과이고, 노동자의 빈곤은 자본가에게 빼앗긴 결과다. 바로 계급 관계인 것이다. 이것은 노동시장 분단에서 불평등의 원인을 찾는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이다. 노동시장에서 직종에 따라 나뉜 사람들, 학력이나 기술 수준에 따라 나뉜 사람들, 기업 규모나 고용 형태에 따라 나뉜 사람들 사이에는 부와 빈곤의 인과관계가 없다. 그저 위계를 매길 수 있을 뿐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도 마찬가지다. …
마르크스는 불평등의 양상을 단지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불평등을 자본주의 체제의 동학과 연결지어, 그것이 왜 생기고 확대되는지 보여 줬다. 불평등을 계급과 연관짓는 것에는 혁명적 함의가 있다. 즉, 불평등이 자본주의 외부의 요인들, 가령 전자본주의적 유습이나 우연한 불운 같은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발전 자체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 노동계급은 누구인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해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노동계급이다. “이들은 오직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때만 생존할 수 있고, 오직 자신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대시킬 수 있을 때에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공산당 선언》) 임금을 받는 대신 자본가를 위해 노동해 이윤을 만들어 주는 게 그들의 일이다. 자본가는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의 노동에서 잉여가치를 뽑아내지 못한다면 그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노동계급을 너무 좁게 정의해서는 안 된다. 흔히 특정 산업의 육체 노동자만을 노동계급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은 노동자라고 하면 손으로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상식’과도 관련이 있다. 좌파 일각에서도 노동계급을 생산적 노동을 하는 사람들로만 협소하게 정의하는 경향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은 재화를 만드는 육체 노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 마르크스의 개념으로 본 생산적 노동자에는 재화뿐 아니라 일부 서비스를 생산하는 노동자들, 또 그런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복잡한 분업에 육체 노동뿐 아니라 정신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포함된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자만을 노동계급으로 보지 않았다. … 노동계급은 흔히 통용되는 것처럼 제조업 육체 노동자뿐 아니라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무보수 노동을 최대한 쥐어짜려는 (고용주의) 압박을 받는 사람들을 두루 아우른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임금에 의존해 사는 이들의 자녀, 노동자였다가 퇴직해 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 등도 노동계급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
둘째, 노동계급을 반대로 너무 넓게 정의해도 안 된다. 모든 피고용자가 다 노동계급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 고용된 처지에 있는 피고용자 가운데는 생산수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최고경영자들은 오너가 아니라 고용된 전문 경영인일지라도 어디에 얼마나 투자할지, 생산을 늘릴지 줄일지, 노동과정을 어떻게 조직할지 등을 결정할 수 있다.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를 그것의 법률적 소유 여부로 규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정규직의 호조건은 비정규직 희생의 대가인가?
특히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핵심’ 노동자(또는 내부자)의 괜찮은 조건이 ‘주변’ 노동자(또는 외부자)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런 생각은 자유주의자들은 물론 노동운동 내 좌파까지 넓게 퍼져 있다. …
그러나 국제노동기구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OECD 조언대로 정규직 보호조항을 약화시킨 나라들에서는 비정규직의 처지가 하나같이 더 나빠졌다. … ‘조직된 부문이 잘 싸워서 전체 노동자의 조건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옛말이 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여전히 조직된 부문이 자기 조건을 방어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나머지 노동자들의 조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현대자동차나 주요 공공부문의 노동조합들은 여전히 기준 설정자 구실을 한다. 2000년부터 최근까지 임금 추이를 살펴봐도,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중소하청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은 비록 격차가 좁혀지지는 않았지만 등락을 함께해 왔다. …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기업주의 공세로부터 자신의 노동조건을 지키고, 그럼으로써 더 열악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그들을 조직해 함께 투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격차 축소 방안이다. 그러나 양보론으로는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세에 맞서기 어렵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조건을 잘 방어할수록 나머지 노동자들이 희생된다는 논리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축시키고 혼란과 사기 저하에 빠뜨릴 뿐이다. 또, 양보론은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세에 일관되게 맞서 싸울 의지가 없는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좋은 변명거리가 된다. 정부와 기업주의 조건 하락 압박에 타협하면서, 마치 자기 조합원의 이익만이 아닌 대의를 지키기 위한 것인 양 정당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