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더 커진 노동계급의 잠재력(160~161쪽)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철저하게 소외된 경험이다. 즉, 노동자는 작업 방식, 작업 속도, 노동의 결실 어느 것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처럼 노동자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엥겔스가 썼듯이 자본주의는 “거대한 대중을 한곳으로 몰아넣어서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협업의 규모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다. 세계 최대의 공장으로 손꼽히는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는 3만 4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매일 자동차를 6000대씩 찍어 낸다. 노동자들은 끝없이 확장하는 작업장에 밀집해 있고 크고 작은 도시에 모여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개별적이지 않고 집단적이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를 “대변”하고 따라서 스스로 착취의 사슬을 끊고 스스로 해방할 수 있게 된 피착취 계급이다.
위기의 시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 준 연대 의식(484~486쪽)
평범한 사람들이 짓눌려 사는 모습을 보다 보면 지금 상태가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침내 움직여 반격에 나서면 우리는 진실의 또 다른 단면을 상기하게 된다.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연대 의식과 영웅적 행동, 창조력, 활력을 담은 비범한 행동을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보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봤던 것은 뉴올리언스의 노동계급이야말로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에서 구호 활동의 진정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시설 관리 노동자들은 지게차를 이용해 병자와 장애인을 날랐다. 간호사들은 의식을 잃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기를 대신해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직접 그들의 폐에 공기를 불어 넣었다. 정유소 노동자들은 정박장을 침범해 배를 ‘훔쳐서’ 홍수를 피해 지붕에 올라간 이웃들을 구조했다.”
변증법은 변화, 실천과 연결돼 있다(70~71쪽)
변증법은 변화나 운동을 다룬다. 그러나 변화란 강기슭이 수백만 년 동안 침식되는 것처럼 서서히 일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대한 홍수가 밀려와서 억겁의 세월 동안 침식돼야 나타날 일들이 한순간에 벌어질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변증법을 적용해 역사 변화를 이해한다. 그래서 그것이 단지 점진적 과정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파악한다. 근본적 사회 변화는 점진적이었던 적이 거의 없다. 미국의 노조는 해마다 하나둘씩 생겨난 것이 결코 아니다.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은 1934~1938년, 즉 겨우 5년 남짓한 기간에 폭발적인 조직화와 대중 파업 속에서 등장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변증법을 요약한다. “헤겔의 논리는 진화의 논리다. 그러나 대학 교수들과 자유주의 문필가들이 ‘진화’라는 개념을 평화로운 ‘진보’라는 개념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거세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켜켜이 쌓이는 변화가 어느 순간 낡은 껍데기를 산산이 부수고 파국과 혁명을 몰고 온다는 것을 이해하고, 마침내 진화의 일반 법칙을 사고에 적용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은 통속적 진화론자와 구분되는 변증론자다.”
자본가는 위험을 무릅쓴 대가로 이윤을 얻는가?(125~126쪽)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일자리 없이 굶주리지 않도록 고용해 주는 호의를 베풀고 ‘위험을 무릅쓴’ 대가로 자본가가 받는 ‘보상’이 이윤이라고 설명하려고 오랫동안 애를 썼다. 19세기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1848년에 자본가가 “자본을 자신을 위해 소비하지 않고 참은” 것에 대한 “보상”이 이윤이라고 썼다. 그러나 밀도 자본가의 수중으로 모여드는 잉여가 어디에선가 생겨나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밀은 “이윤이 발생하는 이유는 노동이 자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인정했다. 솔직히 말해 노동이 이윤의 원천임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본가가 받는 “보상”은 사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 맺은 결실을 “소비하지 않고 참은” 결과물이다. 잉여를 생산의 확장을 위해 재투자하든 개인의 사치에 써 버리든 자본가는 자신이 만들지도 않은 부를 분에 넘치게 쓴다. 이윤은 사장의 절제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의 절제가 만든 것이다.
인종차별의 근원(418~419쪽)
인종차별은 단순히 노예제의 유산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부다. 영국의 아일랜드 억압을 다루면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그것에 의존하는 근본적 이유를 지적했다. 오늘날에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노동조합은 남부에서 가장 약했다. 그래서 남부의 임금은 다른 지역보다 낮게 유지됐다. 그러나 남부에서 노동조합이 약한 주된 이유는 바로 인종차별이었다. 남부의 고용주들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적대감을 이용해 노동자들이 성공적으로 조직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은 전체 계급투쟁과 떨어뜨릴 수 없다. 노동운동의 오래된 구호처럼 한 명이 다치면 모두가 다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일부가 받는 특수한 차별은 노동계급 전체의 처지를 악화시킨다. 역으로 그런 차별을 없애고 차별받는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은 모두의 처지를 끌어올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가 노동에 미치는 영향(132쪽)
이론상으로 기계식 생산의 발전은 노동의 수고와 노동시간을 줄이고 모든 이에게 일자리를 공급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계 설비는 노동시간을 줄이지만 자본의 손에 들어가면 노동시간을 늘린다. … 기계 설비는 노동강도를 덜지만 자본의 손에 들어가면 노동강도를 높인다.” 노동생산성은 천문학적으로 높아졌지만 우리의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보다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경우 그보다 길다. 생물물리학자이자 생태학자인 고故 에릭 로치는 “1950년대에 평균적인 노동자가 주 40시간 노동으로 생산한 것을 이제는 주 11시간만 노동해도 생산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그러나 오늘날 주 11시간, 하루 2.2시간 노동 비슷한 것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임금 상승률이 생산성 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해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비율, 즉 전체 노동일에서 지불되지 않는 노동이 차지하는 비율이 계속해서 올랐다.
엥겔스가 꿰뚫어 본, 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458쪽)
자본주의에선 생산이, 특히 자연의 법칙을 이해해 생산력을 향상하는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 그러나 이 발전은 인간의 필요에 따른 조화로운 계획 속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엥겔스는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하는 데서 노동이 한 구실》이라는 짧은 글에서 자본가들이 오로지 “생산과 교환을 위한 인간 활동의 의도된 직접적 사회적 효과”에만 골몰하며, 그 “의도”한 효과도 오로지 “판매에서 나오는 이윤”을 동기로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계획 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생산의 성격 탓에 자본가는 장기적이거나 부수적인 효과에 개의치 않고 맹목적으로 이윤을 추구한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쿠바의 스페인인 농장주들은 산비탈의 산림을 불태워서 얻은 재를 수익성 좋은 커피나무의 비료로 썼다. 열대성 폭우가 와서 무방비 상태인 겉흙이 모두 쓸려 내려가 바위가 황량하게 드러난들 그들에겐 무슨 상관이겠는가?”
민주당과 미국 개혁주의의 한계(211~218쪽)
미국 민주당을 ‘서민의 당’이라고 여기는 착각은 미국 좌파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미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민주당은 더 보수적이고 더 대놓고 자본가를 편드는 공화당의 서민적 대안을 자처했다. 그러나 두 정당은 공히 자본주의와 친밀하게 엮여 있고 자본주의에 헌신한다. 두 정당은 언제나 대기업의 후원을 받았고 해외 정복을 지지했으며 파업 진압에 군대를 투입한 전력이 있다. 게다가 공민권운동 이전에 민주당은 인종 격리법인 짐 크로 법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2008년 금융 위기에 대응해 오바마 정부는 만성 실업에 시달리거나 집을 빼앗긴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은행가를 구제하는 데 대체로 초점을 뒀다. 오바마 정부는 ‘오바마케어’를 최고 업적으로 내세우지만, 국가가 돈을 대는 단일보험자 제도는 애초에 논외로 한 채 민간 의료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보험 가입자가 늘어나 노다지가 펼쳐질 것을 기대한 제약회사와 보험회사들은 이 계획을 두 손 들고 환영했다.
세계에 관한 이해와 실천의 상호작용(47쪽)
자본주의를 근본부터 바꾸는 과업에 가장 헌신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가장 좋은 처지에 있다. 그러므로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통찰과 폭로가 담긴 글을 쓴 학자와 연구자가 적어도 인생에서 한 번쯤은 사회를 바꾸는 급진적·혁명적 실천에 가담하거나 그런 실천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적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회를 진정으로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한 계급을 대변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전복하고 마침내 모든 계급을 철폐할 역사적 소명을 띤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할 수밖에 없다” 하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이 주장의 요지는 길 가다 마주친 UPS 택배 노동자에게서 온갖 사회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법을 들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적할 방법을 모색하며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운동만이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회 동역학의 참모습을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력, 이윤, 윗사람의 자비로운 후원에 개의치 않는” 노동계급, 차별받는 사람들, 투쟁에서 그들의 편에 서는 사람들만이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실제 모습을 이해할 잠재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