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이 자본주의의 환경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생태경제학자들이 제본스의 역설이라고 부른 것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영국 경제학자인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는 현대 신고전주의 경제 분석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한계효용이론에 입각한 주관적 가치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제본스가 처음 명성을 얻은 계기는 ≪석탄 문제≫(1865)였다. 제본스는 영국의 산업 성장이 저렴한 석탄에 의존하기 때문에 더 많이 파낼수록 석탄 가격이 상승해 경제가 정체하리라고 예상했다. 인구 증가가 식량 증산보다 훨씬 빠르다는 맬서스식 논리에 옥수수 대신 석탄을 집어넣은 제본스는 “우리의 존립은 더는 옥수수 생산에 의존하지 않는다. 곡물법 폐지라는 역사적 사건은 우리를 옥수수보다는 석탄에 의존하도록 만든다”고 했다(≪석탄 문제≫, 3차 개정판, 194~195쪽). 제본스는 기술이나 대체 가능성(즉, 석탄을 다른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제본스는 놀라울 정도로 계산을 잘못했다. 그가 저지른 주요 실수는 석유와 수력발전 같은 석탄 대체물의 중요성을 저평가한 것이다. 1936년에 제본스의 주장을 논평하면서, 케인스는 그의 주장이 “너무 경직되고 과장됐다”고 언급했다(≪전기 에세이집≫, 1951, 259쪽).
그러나 제본스의 주장 중 생태경제학자들을 끌어당기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석탄 문제≫ 7장 “연료의 경제학에 관하여”다. 여기서 제본스는 석탄 같은 자연 자원을 사용할 때 효율성이 증가하면 수요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규모가 커지기 때문에 오히려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제본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연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소비가 감소할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완전히 혼동한 것이다. 그 정반대가 진실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경제 양식은 소비 증가를 낳을 것이다. 이는 유사한 사례에서 검증된 원칙에 따른 주장이다.……심지어 일반 자원에 비해 크고 특수한, 석탄 같은 동력원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소비를 확장시키는 것은 석탄을 사용하는 경제 그 자체다.……이 역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기는 어렵지 않다.……예컨대, 생산되는 석탄에 비해 용광로에 사용되는 석탄량이 줄어들면 판매 이윤이 증가해 새로운 자본을 유인하게 되고 선철의 가격은 떨어지지만 석탄 수요는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전체 용광로 수가 늘어나 개별 용광로의 감소한 소비를 보충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이 항상 같지는 않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여러 제조업 중 어떤 것이 진보하면 대다수의 다른 제조업을 촉진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석탄층의 잠식 증가를 이끈다는 점이다.……바론 리비히의 말처럼 문명은 동력의 경제이고 우리의 동력은 석탄이다. 우리의 산업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도록 만들어 준 것은 석탄을 사용하는 경제 그 자체이고, 우리가 경제를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만들어 갈수록 우리 산업이 더 많이 번영하게 되며 문명의 힘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제본스는 더 깊이 들어가 증기기관의 역사는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일련의 경제들의 역사이고 각 시대마다 증기기관의 사용이 생산 규모와 석탄 수요를 더욱 증가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엔진의 발전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석탄의 새로운 소비가 가속된다. 모든 제조업은 새로운 충격을 받게 되고 인간 노동은 기계 노동으로 계속 대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본스의 역설이 가진 현대적 중요성은 미국의 자동차 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1970년대에 좀 더 에너지 효율적인 자동차가 등장했지만 에너지 수요를 줄이지는 못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차를 가지게 되면서 길 위에 나선 차량이 곧 두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냉장고 기술이 향상되면 더 큰 냉장고가 더 많이 팔릴 뿐이다. 실제로 개인적 소비와 무관한 산업 내부에도 이와 유사한 경향이 존재한다.
노동자와 환경주의자들은 서로 대립하는가?
오늘날 많은 저명한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운동이 계급투쟁보다 우위에 있고, 계급투쟁을 극복한 대표적 운동이라고 자임하는 정치적 관점을 가진다. 이를테면 영국 녹색주의의 지도자인 조나단 포리트는 독일 녹색당의 등장이 “좌와 우로 나뉘어 장황한 논쟁이나 하는 계급 전쟁이 불변이라는 신화”를 끝장냈다고 선언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환경 위기의 원인을 사회주의 생산양식이 아닌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찾을 수 있는 한)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모두 전 지구적 환경 위기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한편 녹색당이 제시한 자연 자체의 가치에서 비롯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역사상의 계급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급적 사회 논쟁에서 빠져 나온 녹색 사상가들은 사회에 계급이나 사회적 구분 따위는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환경문제의 원인을 대부분 소비자의 소비 습관, 출산율, 산업화의 특징에 돌리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마주해 온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지배적 관점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이 장에서 고목림이 처한 위기와 미국 태평양 북서부의 목재 산업에 관련된 사례를 검토하고, 급속한 환경 파괴가 자본주의 사회와 계급투쟁을 규정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축적 과정의 고유한 일부라는 반대의 견해를 논할 것이다. 오직 지구만 대변하고 계급과 그 밖의 사회적 불평등을 무시하는 생태 운동은 인간의 생산적 에너지, 건조 환경, 지구의 생태 자체의 무제한적 상품화를 지향하는 자신들의 관점으로 환경문제를 대체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지배적 힘의 관계는 강화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지구 운동은 인간과 자연의 지속 가능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녹색주의자들의 목표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며 심지어 대중적 힘을 분산함으로써 환경 운동의 반대자만 양산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계급 대 생태라는 총체적 딜레마는 태평양 북서안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태평양 북서안은 마지막 남은 고목림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벌어진 곳으로, 이곳에서 목재 생산 노동자들과 단일 쟁점 환경 운동가들이 서로 충돌했다. 목재에 의존해 생계를 꾸려 가는 공동체에서 “보존주의자들”은 “민중의 적”이라고 비난받았고, 단일 쟁점 환경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입각해 통나무 벌목꾼이나 다른 목재 생산 노동자들을 “자연의 적”으로 규정했다. 마이클 레너는 월드워치연구소의 ≪지구환경보고서 1992≫에서 “북부 점박이올빼미 사건은 일자리와 환경보호 사이에 놓인 해결할 수 없을 듯한 갈등, 그리고 더 크게는 경제의 건강과 그것이 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연 세계의 건강 사이에 놓인 더욱 광범한 긴장의 상징이 됐다”고 기록했다.
삼림 생태계와의 지속 가능한 관계와 목재 산업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이 최대한의 성과를 이루려면 국가를 상대로 한 공통의 노동-환경 강령을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환경 활동가들과 목재 생산 노동자들이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미국 환경주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편협한 보존주의적 공세, 조직 노동자들의 상상력이 결핍된 비즈니스 유니언적 대응, 노동계급과 환경주의자라는 가장 강력한 적대 세력에 대항해 목재 자본과 연방 정부 안에 포진한 목재 자본의 동맹자들이 채택한 분할 정복 전략이 어우러져 그러한 연합의 형성을 막는다.
1992년까지만 해도 태평양 북서안의 고목림을 보호하기 위한 기나긴 투쟁 끝에 승리의 환호성을 지른 쪽은 환경 운동가들인 것처럼 보였다. 부시 행정부는 북부 점박이올빼미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역의 벌목을 촉진하려고 시도했지만 법원의 결정으로 좌절됐다. 클린턴의 당선으로 연방 정부가 환경 사안을 더 많이 강조할 것이라는 희망도 생겨났다. 그러나 환경주의자들의 승리감은 6년 뒤, 완전한 패배는 아니더라도, 배신감으로 바뀐다. 1995년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발효된 예산무효법의 구난벌목조항은 환경법과 별도의 법안으로, 고목림에 대한 탐욕스러운 벌목의 길을 다시 열어 주는 계기가 됐고 알락쇠오리, 북부 점박이올빼미와 그 지역의 수많은 종들의 생존을 위협하게 됐다. 이제는 멸종위기종보호법 자체의 존속조차도 의회의 지속적 공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위협적인 일은 1990년대에 기업의 재정 지원을 받는 ‘현명한 이용’ 연합이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수천 명의 노동자와 자원 채취 기업 임원, 토지 소유자, 젖소 방목지 소유자, 전미부동산협회 등을 조직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기존의 환경법을 훼손하고 싶어 하는 친기업적 정치인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기반과 “포퓰리즘적”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줬다.
그러므로 지금은 광범한 노동-환경 동맹을 구축할 수단을 찾아내고 태평양 북서안의 고목림 보호 투쟁이 환경주의자 전체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다. 북서부에서 목재 생산 노동자들과 삼림 생태계 보호론자들이 어떻게 단결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전히 단결을 유지해 가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목림 위기가 형성돼 간 과정을 탐구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자본과 국가가 수행한 구실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생태 위기의 계급적 기원을 드러냄과 동시에 오늘날 환경 운동 전반이 겪고 있는 일자리 대 자연이라는 장애물을 계급에 기반한 진보적 대응을 통해 넘어서도록 하는 일반 원칙도 함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맬서스는 생태 사상가이고 맬서스를 반대한 마르크스주의는 반생태주의인가?
2백 년 전인 1798년 처음 출판된 토마스 맬서스의 ≪인구론≫은 부르주아 사상의 요새가 됐으며 그 방면에서 단일 작품으로 이만한 공헌을 한 책은 없었다. 영국 노동계급이 이보다 더 싫어한 책은 없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렇게까지 비판한 책 또한 없었다. 고전적 형태의 맬서스의 인구법칙은 19세기 중반에 지적 패배를 겪게 된다. 그러나 맬서스주의는 새로운 형태로 재등장해 왔는데 19세기 후반 다윈주의 혁명으로 사회다윈주의가 발흥했을 때 처음으로 부활했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신맬서스주의 생태학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재등장했다.
오늘날 보통 생태 사상가로 소개되는 맬서스는 (주로 맬서스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생태주의로 낙인찍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전통과 대립했다. 그러므로 테드 벤턴 같은 생태주의적 사회주의자조차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맬서스의 인식론적 보수주의에 유토피아적 과민 반응”을 보인 나머지 “인구를 수용할 수 없도록 제약을 가하는 근본적 자연의 한계는 없다고 주장한” 것은 물론 일반적 자연의 한계를 폄하(하거나 부정)했다고 탓할 정도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모든 생태적 장벽을 극복해내는 기술의 능력을 맹신하는 “프로메테우스주의”로 맬서스가 주장한 자연의 한계에 맞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맬서스의 ≪인구론≫ 출간 2백 주년에 즈음해 맬서스의 주장, 그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응의 본질, 생태학과 사회에 대한 최근 논쟁과의 관계 등을 재검토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일반적 해석과는 달리 맬서스의 이론은 장차 도래할 ‘과잉인구’의 위협에 대한 논의였다기보다는 항상 있어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적용될 식량 공급에 대한 항구적 인구압의 존재에 대한 논의였다. 이 말은 전통적 의미의 ‘과잉인구’ 따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844년 엥겔스가 맬서스의 논리에 따르면 “지구에는 단 한 명이 살더라도 과잉인구로 가득 찬 것과 같다”고 적은 것은 전적으로 올바르다. 생태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와 달리 맬서스의 논지는 본질적으로 매우 비생태적(심지어 반생태적)인데 그의 주장은 미래의 사회 조건, 더 근본적으로는 빈민의 조건 향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러므로 코벳이 맬서스를 ‘사기꾼 목사’라고 부르며 거칠게 대한 것처럼, 영국 노동계급이 맬서스를 증오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사람들이 맬서스가 과학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적들에게 매수된 대변인, 후안무치한 지배계급의 아첨꾼이라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마르크스는 맬서스를 과도하게 비판했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맬서스의 사상과 그 뒤를 이어 발전한 사회다윈주의, 신맬서스주의적 국면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마르크스가 내린 결론이 최선의 결론임을 알게 될 것이다.(맬서스의 지지자들조차 맬서스의 사상을 면밀히, 최소한 대중적 수준에서조차 분석하지 않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맬서스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 윤리(와 인종과 성 윤리)를 대변했다는 점으로 볼 때, 맬서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필요물이다. 그러므로 맬서스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맬서스를 존재하게 했고,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맬서스에 대한 기억을 끊이지 않게 하는 체제에 대한 비난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