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주의’ 하면 사람들은 흔히 소련의 스탈린 억압 정치나 영국 노동당 정부 또는 그 밖의 ‘좌파’ 정부들을 떠올린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관료나 억압적 국가가 사회 생활을 모두 통제하는 것 또는 몇몇 개혁 조처들로써 아니면 국가가 좀 더 나서서 지금 상태를 손질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딱히 ‘이거다’ 싶게 입맛 당기는 게 없을 때는, 참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속속들이 밝히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하지만 마르크스 자신도 그랬듯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려다 자칫 초점을 흐리거나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 수도 있는 일이라 그것을 삼가 왔다. 미래 사회가 참된 사회주의 사회라면, 오직 그 사회를 건설하는 노동자들만이 사회의 모양새가 어떠해야 할지 꼼꼼하게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작용하는 추세와 동력에 대한 연구로부터 과학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몇몇 일반 원리들을 밝히는 것에 머물러 왔다. 이러한 원리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자나 개량주의자가 망쳐 놓은 ‘사회주의’가 얼마나 다른지 뚜렷이 보여 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근본 목적이 계급 없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단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비롯하는 기나긴 사회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 출발점은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경향(즉,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생산수단을 점점 더 집중시키는 경향)이라 하겠다.
둘째로, 자본주의는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를 낳는다. 그 이름은 노동계급인데, 이 계급은 자본의 성장과 함께 성장한다.
사회주의로 가는 결정적 첫걸음은 노동계급이 정치 권력을 잡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깨뜨리고 노동자 국가를 세우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불렀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독재가 아니라 노동계급 자신이 사회를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1871년의 파리 코뮌을 보고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권력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하나하나 밝혔다. 입씨름만 하다 마는 의회를 실제로 일하는 기구로 교체하고, 모든 국가 공무원을 선거로 뽑고 필요하면 소환할 수 있게 하며, 어떠한 공무원도 숙련 노동자의 임금보다 높은 봉급을 받지 못하게 하고, 상비군을 없애고 노동자 시민군을 둔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직접 생겨난 노동자 권력의 조직 형태―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를 우리에게 보여 줬다.
국가 권력을 잘 다지고, 어쩔 수 없이 반(反)혁명에 매달리는 자본가들을 물리치고 나면 노동계급은 계급 없는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노동계급은 그들의 권력을 가지고 주요 산업들과 기업들을 모두 거둬들여 사회의 소유로 돌리고 그것들을 노동자 관리 아래 둘 것이다. 또한,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새로운 사회를 꾸려 나가게 된다. 그렇게 해야 경제를 민주적으로 계획할 수 있게 되고, 사회의 부(富)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며, 이렇게 늘어난 부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게 된다.
또한, 새로운 사회에서는 완전한 법적 평등이 자리 잡히고 집안일과 아이 기르기를 사회가 나눠 맡게 됨으로써 겉모습뿐 아니라 실속 있는 평등이 이뤄져 여성들이 온갖 굴레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인종·성·민족에 따른 편견들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현대 과학과 기술이 이룩한 크나큰 성과들을 잘 살려서 사람들이 위험하고 재미없는 데다 고되기만 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노동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은 교육을 더 많이 받고 더 넉넉한 문화생활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특권을 누리는 전문가층이 설 땅도 사라지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가르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새로운 사회에서는 값을 치르지 않고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들도 꾸준히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해 가다 보면 화폐가 쓸모없어지고 분배는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대로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는 것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1920년대] 러시아를 보고 사회주의로 옮아가는 것이 한 나라에서는 마무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운 바 있다.
이러한 일들이 이뤄지고 자본주의가 세계 모든 곳에서 무너져 내린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지니고 있는 막대한 자원들을 사람들의 필요에 맞게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억누르려는 사람도 없고 지켜야 할 특권도 없어진 이상, 국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에서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인류가 하나 되어 참된 자유를 누리는 새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인간 본성이 바뀔 수 있을까?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억눌리고 빼앗긴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인간 본성을 들먹인다. “전쟁? 그거야 인간의 몸에 싸움을 좋아하는 피가 흐르기 때문이지.” “인종차별? 사람이란 원래 낯선 사람들이나 자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마련이지.” “여성을 억누르고 있다고? 그것도 사람이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지. 남자하고 여자는 서로 다르게 태어났잖아.”……
하지만,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이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 많든 적든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욕구들을 사람이 지니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어쨌든 사람이 살아가자면 공기와 의식주 따위가 있어야 한다. 또한, 사람은 성적·정서적 욕구들도 지니고 있다. 그저 목숨만 이어갈 뿐 아니라, 인간답게 살려면 서로 사귀고 정을 주고받고 사랑하며 어느 정도 자유를 누려야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욕구들 때문에 사회주의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회주의 사회라야 인간의 이러한 변함없는 욕구들을 자본주의나 그에 앞선 어떤 사회들보다 훨씬 더 잘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인간 본성’ 어쩌고 할 때 앞에서 든 것들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란 ‘타고나기를’ 자기만 알고 욕심이 많기 때문에 연대와 평등이 넘치는 사회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생각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아 두자. 그 기원은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설이며, 따라서 과학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하다못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만 안다면야 저럴 수가 없지” 싶게 친절하고 너그럽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하지만 워낙 자본주의 사회가 이윤을 노린 생산에 바탕을 둔 사회다 보니 느느니 욕심이요 모질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 됨됨이에서 좋은 점들은 자꾸 빛이 바래고 만다.
그러니까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이 어떤 사회, 어떤 물질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람 됨됨이도 저마다 달라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옳게 지적했듯이, 인간 본성이란 바로 “사회 관계들이 한데 어우러진 것(총체)”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본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크게 다른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에게는 개인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본성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18세기의 지주는 그것을 인간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동성애를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 여겼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남성들은 그것을 차마 눈 뜨고 못 볼 것으로 생각했다. 정통 힌두교 신자들은 몇백 년 동안이나 결혼 상대자는 으레 집안 어른들이 정해 주는 것이려니 했다. 서구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이 그것을 ‘본성에 맞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회를 바꾸라. 그러면 ‘인간 본성’도 바꿀 수 있다.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말에서 더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은 사람이란 환경을 바꿔 가는 과정에서도 뭔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파업을 생각해 보라. 파업은 흔히 노동자들이 임금을 더 많이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시작된다. 하지만 파업을 하다 보면 흔히 연대감과 집단의 자부심이 높아지고 이것이 처음에 들고 나왔던 문제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다.
혁명이란 일종의 한바탕 크게 벌어지는 파업이다. 혁명이 일어나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들고일어나서 사회를 자기 손으로 꾸려 간다. 새싹이 자라나듯 그들이 지닌 ‘인간다움’도 조금씩 자기 모습을 찾아간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혁명 없이는 지배계급을 자리에서 몰아낼 수 없기 때문에, 또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자신의 몸에 눌어붙은 지난 시대의 더러운 얼룩을 깨끗이 씻어 내고 새로운 사회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혁명은 필요하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을 다 똑같이 만들어 버리지 않을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개성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을 거야.” “사회주의는 사람들을 다 똑같게 만든다구. 얼마나 숨이 막힐까.” “사회주의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부정한다구.”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봤음직한 볼멘소리들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잠깐 자본주의가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해 왔는지 살펴보자. 자본주의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성과 개인의 자유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지켜 왔노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성을 마음껏 꽃 피웠던 것은 언제나, 특권을 누리는 소수였다. 교복과 주입식 교육에서 군복과 군사훈련에 이르기까지, 연립주택과 고층빌딩에서 생산라인과 줄지어 늘어선 타자수 집단들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로 숨 막힐 듯한 획일성이다. 예술과 오락과 스포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대중을 구경꾼으로 만든다. 열에 아홉 사람은 대중매체가 만들어 낸 몇몇 ‘스타’들이 노는 모습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노릇밖에 못 한다.
이 모든 일들은 체제의 기본 특성들 때문에 빚어진다. 체제는 계급들을 갈라 놓고 이윤을 위한 생산을 조직한다. 지배계급에 드는 사람이 극소수뿐이라는 것은 다수인 노동계급을 집단 순응 상태에 묶어 놓아야만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생산이 이윤을 올리는 데에 매달리도록 조직되므로, 무수히 많은 개개인의 창조적 노동은 개성과 창조성을 빼앗긴 채 그저 그에 상응하는 시간의 추상적 노동력으로 바뀌게 된다. 경쟁에 쫓기는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사람 취급하기는커녕 그저 대차대조표의 한 항목이나 기계의 부속품처럼 다룰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말하는 개인주의는 언제나 기업인들의 개인주의였을 뿐이다. 그들은 사회의 필요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쥐어짜 자본을 늘리는 자유를 누려 왔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주의조차 이제는 대부분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관료화된 대기업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자본가 경영자도 축적 장치의 한 나사일 뿐이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유력한 특징인 소련이 개인의 자유를 모두 박살낸 ‘사회주의’의 전형처럼 언제나 들먹여져 왔다. 그러나 소련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사회일 뿐이다. 그것도 자본주의에 깃든 반(反)개인주의 경향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가장 중앙집권적 착취 형태를 지닌 사회가 되고 말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개인주의를 덮어놓고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르주아지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자행되는 부르주아 개인주의에 반대할 뿐이다. 사회에 이바지하는 개인주의, 사회 생활을 더욱 다양하고 활기에 넘치며 인간답게 만드는 개인주의라면 우리 모두가 지지하는 바이다.
사회주의의 출발점은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이다. 하지만 그러한 집단 행동은 아울러 그것에 참여한 노동자 하나하나의 활동과 자유의 폭을 넓혀 준다. 그러한 집단 행동은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요구들을 주장하고, 권리를 지키며, 대차대조표의 항목이 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 주는 수단이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개인의 자유는 이중으로 신장된다. 노동자 평의회에 참여함으로써 노동자는 저마다 사회를 운영하는 데 직접 참여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통제하게 됨에 따라 노동자들 손으로 작업 환경을 만들 수 있게 된다. 피임 기구와 낙태 및 탁아 시설들이 제대로 제공됨에 따라 여성은 아이를 가질 것인지 아닌지 자기 뜻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모두가 일자리를 갖고 같은 보수를 받게 됨으로써, 경제적으로 기댈 곳을 찾아서 결혼이나 성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그러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빈곤이 사라지고 노동시간이 크게 줄어들어 사람들은 자기 재능을 마음껏 계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는 주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했듯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 사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