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에 대한 환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이 커지고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경제 위기, 심각한 사회∙정치 양극화, 기후∙생태∙보건 위기를 낳는 자본주의 특유의 모순 때문이다. 2010년 미국의 18~29세 인구 가운데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답한 사람이 68퍼센트였던 반면, 2018년에는 겨우 45퍼센트만이 그렇게 답했다(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본다고 답한 사람은 51퍼센트였다).
이런 세계를 만들어 낸 주류 정당들에 대한 환멸도 커지고 있다. 파키스탄계 영국인 마르크스주의자 타리크 알리는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가 똑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다며 이들을 “극단적 중도파”라고 불렀다. 특히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우경화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대중의 신뢰를 잃었다.
개혁주의의 모순
이런 환멸 때문에 오른쪽에서는 프랑스의 마린 르펜 같은 극우파가, 왼쪽에서는 그리스의 시리자 같은 급진 좌파가 성장했다. 때로 이런 변화는 기성 정당 안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집권과 버니 샌더스 열풍이 대표적이다.
영국에서는 이것이 노동당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에 노동당 좌파인 제러미 코빈이 당 대표로 선출되자 급진적 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이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대다수 노동당 국회의원과 당내 우파는 코빈을 한사코 반대했다. 이들은 2019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하자 코빈을 대표직에서 사임시키더니 급기야 코빈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반유대주의자로 몰아 당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안타깝게도 코빈을 포함한 노동당 좌파는 대중을 동원해 이 세력에 맞서기보다 거듭 타협하고 후퇴했다.
영국 노동당 역사에서 배우기
의회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지 30여 년, 진보 정당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20여 년 된 한국에서 120년 역사의 영국 노동당은 늘 중요한 준거점이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양대 부르주아 정당이 지배하던 영국에서 어떻게 노동당이 성장해 집권까지 할 수 있었는지, 전 국민 무상 의료 서비스인 국가보건서비스(NHS)는 어떻게 도입될 수 있었는지, 신자유주의를 노골적으로 받아들이고 제국주의 전쟁에 동참한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개혁주의의 최종 파산을 뜻하는지, 제러미 코빈은 어떻게 부상할 수 있었고 왜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 등등은 한국의 진보∙좌파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중요한 질문들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쓴 노동당의 역사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쓴 영국 노동당의 역사다. 이것은 앙상한 도덕주의적 비판일 것이라는 세간의 편견과는 거리가 멀다. 지은이들은 872쪽에 달하는 이 방대한 책에서 노동당의 사회적∙조직적∙재정적 기반과 이데올로기∙강령∙정책뿐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당의 정치적 실천이 어땠는지를 역사적으로 다룬다. 또, 1920년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분석을 따라 노동당을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적 노동자 정당”으로 규정하며 혁명가들이 개혁주의 정당의 당원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살펴본다.
이 책은 2008년에 같은 제목으로 나온 책의 개정 증보판이다. 개정 증보판에는 18장 “신노동당 정부”와 19장 “밀리밴드에서 코빈까지”가 추가됐으며,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룬다.
* 노동당의 정치적 실천은 강령과 어떻게 다르며, 그 둘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 당내 분파들의 상대적 강점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당내 좌파와 우파의 활동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가?
* 누가 누구를 통제하는가? 노동당 의원단, 중앙집행위원회, 당대회는 각각 어떤 구실을 하는가?
*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당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또,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 노동당은 투쟁의 침체기에 성공을 거두는가? 아니면 고양기에 이득을 얻는가?
* 노동자들의 충성심은 노동당이 개혁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는가? 개혁 없는 개혁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
*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당의 개혁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확신시킬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