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크스주의 세계경제론의 방법
1857~1858년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쓰면서 앞으로 자신이 경제학 비판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에 관한 일종의 연구계획, 즉 오늘날 우리가 ‘경제학 비판 플랜’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향후 연구계획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 방식을 보여 준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의 서문에 제시된 플랜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은 ‘자본-토지소유-임금노동’을 내용으로 하는 ‘전반부’, 혹은 전반체계와 ‘국가-외국무역-세계시장공황’을 다루는 ‘후반부’, 혹은 후반체계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마르크스는 생전 이 후반부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진행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후반부가 마르크스의 이론체계 전체에서 갖는 위상에 대한 논쟁이 계속돼 왔다 …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세계경제론의 주된 내용은 세계화와 자본축적 체제 및 국가 간의 상호규정 혹은 중층결정 관계를 명시적으로 고려해 세계화에 대한 총체적,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수행하는 것이 돼야 한다.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방법에 의거한 제국주의론의 재구성과 마르크스 공황론의 글로벌 자본주의 위기론으로의 확장 및 마르크스 국제가치론의 확장을 통한 세계적 양극화의 메커니즘 해명은 그 필수적 요소들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양극화와 세계 대공황, 생태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세계화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세계화운동과 사회주의 세계화 방안이 구상될 수 있을 것이다.
• 마르크스의 세계시장공황론
진보진영의 논자들 다수는 2007~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가 과도한 세계화, 혹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이들은 2007~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에 대한 대책으로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국가적 규제, 즉 케인스주의적 혹은 국가자본주의적 처방을 제시한다. 그런데 세계화가 운운되기 훨씬 전인 19세기 중반에도 주기적 공황은 일상적이었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는 동시대의 주기적 공황을 분석하고, 이것이 화폐나 신용 혹은 자본주의의 특정 형태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내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임을 논증했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동시대의 공황을 세계시장공황으로 규정했으며, 이와 같은 세계시장공황의 구체적 분석을 자신의 플랜의 후반부, 이른바 ‘후반체계’의 최종 과제로 설정했다. … 2007~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는 세계적 규모에서 작동하는 이윤율의 저하에서 비롯된,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의 과잉축적의 결과 심화된, 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소비의 모순 및 현실자본과 화폐자본 축적의 모순의 중층결정의 산물로 설명될 수 있다. 2007~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 정세에서 마르크스의 세계시장공황론의 적실성은 마르크스 사상에 중심적인 ‘세계자본주의-세계시장공황-세계혁명’ 테제의 긴급한 현재성, 따라서 각종의 일국적 개혁주의적 변혁 프로젝트의 비현실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 세계적 양극화: 마르크스 가치론적 관점
세계화가 가속되면서 국제적 통합이 이뤄지고 국가 간 불평등이 완화된다는 신자유주의 주류 경제학의 비교우위설이나 네그리와 같은 일부 좌파의 제국론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적 양극화 현상은 마르크스의 가치론에 의거할 때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호황과 불황은 교대된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적 양극화 경향은 지구온난화처럼 계속 악화되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적 소득분배의 불평등 경향은 20세기 내내 증대됐다. 오늘날 진보진영이 주목하는 세계적 양극화 경향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기에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 시기, 즉 케인스주의의 전성시대인 전후 1970년대까지의 자본주의 황금시대에도 지속된 경향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
세계적 양극화 경향이 자본주의 세계체제 그 자체에서 가치법칙의 작용의 결과라면, 세계적 양극화 경향의 근본적 해결 역시 국가나 시장이 아닌 ‘국가와 시장 간의 교대 운동, 진자 운동’ 자체의 혁명적 전복, 세계시장에서 가치법칙의 작용 그 자체의 지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21세기 미국 제국주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경도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설정의 핵심 부분인 제국주의론을 부정하고 이를 세계화론 혹은 ‘제국론’ 등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 세계화론, ‘제국론’과 같은 제국주의 해소론은 결국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자본주의의 모순이 격화되고 있는 오늘날 세계의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이론이다. ‘비교자본주의론’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대체로 ‘자본주의 이외 대안 부재’의 전제 아래 ‘라인 모델’이나 ‘유럽연합 강화론’ 혹은 ‘아시아통화기금’(AMF) 등에서 대안을 찾으려 한다. … 이는 ‘자본주의 이외 대안 부재론’에 투항한 것이다. … 반면, 미국 제국주의 헤게모니 약화론의 정반대 편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제국주의 헤게모니의 일방적 강화론, 미국 최강제국주의론 역시 적대와 모순으로 점철된 오늘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현실, BRICs의 부상과 제국주의 간 경쟁 재연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한 것이 아니다. … 오늘날 미국 제국주의의 헤게모니의 모순의 핵심을 노자대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모순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중투쟁의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1999년 시애틀 대안세계화운동 이후 세계적으로 고양되고 있는 반자본주의/반전운동과 노동운동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세계화의 모순과 유로존 위기
기존 연구들에서 유로존 위기의 원인으로 주장되는 그리스 등 일부 남유럽 주변부 국가들에서 방만한 재정이나 독일과 같은 유로존 중심부 국가들에서 경상수지 흑자의 누적과 주변부 국가들에서 경상수지 적자의 심화, 유로존의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경쟁력 격차의 확대, 혹은 금융화 등은 오히려 세계시장공황의 현상들이거나 이미 발발한 공황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생산부문에서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 경향이야말로 유로존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유로존 위기는 2007~2009년 미국발 글로벌 경제 위기에 연속된 위기로서, 마르크스적 의미의 세계시장공황으로서, 한동안 미국발 글로벌 경제 위기의 무풍지대인 듯 했던 ‘사회적 유럽’도 자본주의 공황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 줬다. 자본주의에서 위기는 자본주의의 어떤 특정한 유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일반에 내재적 경향이다. 따라서 유로존 위기에 대한 좌파의 대안은 유로존의 개혁 혹은 탈퇴가 아니라, 제1차세계대전 당시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사회주의 유럽합중국 건설과 같은 국제주의적인 글로벌한 접근이 돼야 한다.
• 제1차세계대전과 트로츠키의 대안
1914~1916년 트로츠키는 당조직론에서는 물론 전략/전술에서도 레닌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 때문에 이 시기는 트로츠키를 반레닌주의 이단으로 모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차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자료를 충부하게 제공하는 시기인 반면, 트로츠키를 레닌의 정통적 계승자로 간주하는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양자의 차이를 가능한 한 외면, 최소화하고 싶게 하는 계륵 같은 시기다. 실제로 평화강령과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중심으로 한 제1차세계대전 시기 트로츠키의 대안에 대해 당시 레닌은 평화주의, 혹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이는 그 후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되풀이돼 왔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 시기 평화강령과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중심으로 한 트로츠키의 대안은 고전 마르크스주의 혁명 전략의 핵심인 이행기강령의 구체화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비판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또 평화강령과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중심으로 한 제1차세계대전 시기 트로츠키의 대안은 당시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 전략과 근본적으로 차별적이고 상호대립했다. 하지만 이는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처럼 최소화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1917년 혁명을 통해 실천적 타당성이 입증된 것은 트로츠키의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트로츠키가 제출한 평화강령과 유럽합중국 슬로건은 자본의 세계화와 그에 따른 모순이 그때보다 훨씬 더 진전, 격화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 더 현재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트로츠키의 평화강령과 유럽합중국 슬로건은 최근 유로존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정세에서 반전 급진 좌파의 대안으로 다시 환기되고 있다.
• 대안세계화운동의 이념과 마르크스주의
일부 대안세계화운동 논자들은 상품화, 상품물신성, 탈상품화, 금융화, 대항헤게모니, 직접민주주의, 네트워크와 같은 대안세계화운동의 핵심 개념들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존재하지 않거나 이와 상충되는 개념들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안세계화운동의 핵심 개념들은 실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체계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정치에서 중심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개념들이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전체 체계 속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되지 않고, 그 자체로 고립돼 특권화될 경우,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상이한 이론과 정치로 귀결될 수 있으며, 이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주요한 대안세계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2008년 촛불운동의 경우 반MB,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요구도 관철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그 주된 이유를 당시 자율주의자들을 비롯한 일부 참여자들이 ‘운동의 새로움’, 이른바 ‘다중’의 ‘직접행동’과 ‘자발성’을 특권화하면서, 모든 종류의 ‘지도’를 거부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 노동계급과의 연대가 이뤄지지 못한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안세계화운동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지향하는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직 노동운동을 비롯한 전통적 사회운동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한 이론적 수준에서 대안세계화운동의 이념의 핵심 개념들을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전체 체계 속에 정당하게 위치 지우고 발전시키는 작업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