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상조의 혁명이었나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10월혁명이 시기상조였다고 주장한다. 괜스레 소수 음모가들 때문에 의회 민주주의를 위한 훌륭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특히 황광우나 로빈 블랙번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한데, 1917년 러시아는 낙후한 사회였으므로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견해에 대한 일종의 풍자만화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후진국인 러시아 한 나라(一國)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이룩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1913년 러시아의 평균 국민소득은 1688년 영국보다도 거의 20퍼센트나 적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이 수치는 더 낮아져 1917년의 러시아는 20세기 사회라기보다는 18세기 프랑스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1억 6천만 인구 가운데 도시 공업 노동계급은 단지 3백만 명 남짓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노동자 혁명으로 탄생하는 노동자 국가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더 발전한 다른 노동자 국가들의 원조를 받는 것밖에 없다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믿었다.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선진 공업국에서 노동자 혁명이 성공해 노동자 국가가 수립된다면 러시아가 급속히 공업화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특히 러시아에 트랙터와 각종 기계류를 보내 줘, 러시아 농민의 생활 조건이 향상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농민은 노동자 국가에 충성하게 될 것이다. 서구 혁명이 실패한다면 소비에트 러시아의 운명은 군사적·경제적 고립, 물자 부족 악화, 그리고 결국은 노동자 국가로부터 농민의 이반일 것이다.
레닌은 1918년 1월 11일 3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단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최종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소비에트 권력을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노동자·농민 부대는 위대한 세계 군대의 여러 부대들 가운데 하나다.” 그해 3월 초에도 그는 “절대 진리는 독일 혁명 없이는 우리가 멸망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고 말했다. 또, 1921년 7월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국제 혁명을 시작했을 때 국제적인 세계 혁명의 지원 없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가 불가능함은 우리에게 명백했다.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즉각 또는 적어도 매우 신속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혁명 전과 심지어 후에도 우리는 생각했다.
볼셰비키는 자신이 국제 사회주의냐 아니면 파멸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국제 혁명은 몇몇 이상주의자들의 몽상이 아니었다. 당시 전 세계가 혁명의 격랑에 휘말려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왕정이 무너지고, 노동자·수병·병사 평의회가 세워졌다. 헝가리·바바리아·핀란드·라트비아 등지에서 소비에트 정부들이 짧게나마 권력을 장악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공장점거가 벌어졌다. 터키 황제(술탄)가 타도됐다. 영국 군대는 아일랜드 민족해방운동과 싸우면서 마비 상태에 빠졌다. 영국 국내에서도 지배계급은 두려움에 휩싸였으며, 머시와 클라이드 항구의 포함(砲艦)이 수병 반란으로 말미암아 발이 묶였다. 세계 모든 나라의 수많은 노동자와 피억압자들이 볼셰비키의 전망과 용기에 고무됐다. 그들에게 볼셰비키는 전쟁과 실업과 빈곤의 대안을 제시하는 듯했다. 신생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국제 공산당들을 결속해 수백만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서구 각국에서 혁명적 좌파인 신생 공산당은 비록 역량을 급속히 신장시키고는 있었지만 세력이 너무 미약하거나 조직이 너무 빈약했던 나머지,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 때문에 빚어진 정치적 공백은 개량주의 정당들과 중도주의 정당들이 메웠다. 전자는 심지어 독일 같은 일부 나라들에서 자신들에 대한 좌파 반대자들(로자 룩셈부르크 등)을 살해하라고 시키기까지 했고, 후자는 말로는 혁명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막상 실천에서는 결연한 행동보다는 기득권에 안주하기를 더 좋아했다.
러시아 혁명은 쿠데타였나?
10월혁명이 쿠데타(무력 정변)였다는 견해도 틀린 상식이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음모가들이 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잡았다는 것이다. 권력욕에 눈이 먼 교조적 과대망상가들인 볼셰비키가 다수의 희망을 거슬러 권력을 잡기 위해 꾸민 음모의 산물로, 수많은 대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사건이었다고도 한다. 일당독재와 공포정치 등 스탈린주의의 여러 양상들은 볼셰비키의 이러한 비민주적 집권 방식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잘못된 역사적 진술, 잘못된 인용, 막연한 추측들에 근거하고 있다. 예컨대 레닌의 ‘권력욕’이나 ‘파괴 본능’ 또는 ‘폭력 숭배’ 따위에 관한 허구적 또는 상상의 서술이 그런 것들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런 그림을 머릿속에 갖고 있으면 오늘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러시아 혁명과 거의 관계가 없게 된다.
10월 봉기가 2월혁명과 닮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자생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중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10월혁명은 무장한 노동자들이 용의주도하게 계획해 도시의 핵심 지역들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수의 지지 없이 실행됐다는 것은 참말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대중의 대망을 실현했기에 열성적 지지를 받은 혁명이었다. 애써 정부를 수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점은 볼셰비키에게 적대적이었던 멘셰비크(멘셰비키 당원) 수하노프가 정직하게 증언하고 있다.
민중의 압도 다수가 그 당[볼셰비키]을 따랐는데도, 또 그 당이 사실상 이미 진정한 권력과 권위를 모두 획득했는데도 국민적 봉기가 아니라 군사적 음모라고 얘기하는 것은 분명히 어불성설이다.
전시공산주의가 국가통제주의의 기원인가?
내전 동안 모든 노력을 소비에트 공화국 수호에 기울여야 했다. 국가 경제는 노동자 정부의 군대(적군)에 필요한 사항들에 맞춰졌다. 이런 엄격하고 군사화된 희생·배급 체제를 두고 볼셰비키는 (공산주의가 아닌데도) 부적절하게 “전시공산주의”라고 불렀다. 전시공산주의의 주요 요소는 기업의 전면 국유화, ‘1인 경영’, 노동 규율 강화, 농민 곡물 징발 등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시공산주의가 독재적인 소련 국가통제주의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으로 블랙번은 전시공산주의가 군사적·경제적 비상사태의 산물이 아니라, 레닌·트로츠키의 권위주의 정치가 낳은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스탈린이 떠오르게 된 것은 이것의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라고 한다.
사실, 볼셰비키가 10월혁명 직후 취했던 경제 조치들은 온건했다. 그들은 전면적인 국유화를 원하지 않았고, 기존 소유자들을 압박하고 달래서 점진적으로 공장에 대한 노동자관리를 확립하려 했다. 레닌이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른 이 정책은 노동자 혁명이 고립된 상황에서 숨 돌릴 여유를 찾고 힘을 모으기 위해 채택한 것이었지만, 강력한 두 세력에 의해 볼셰비키는 몇 달 만에 그 정책을 포기하고 전시공산주의 정책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첫째, 자본가들이 노동자관리에 대항해 공장폐쇄로 맞섰다. 공장폐쇄에 대한 노동자들의 자연스런 대응은 공장 국유화를 국가에 요구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1918년 5월에 국유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볼셰비키를 앞지르고 있었다. 1918년 7월까지 국유화된 사기업들 가운데 단지 20퍼센트 정도만이 국가 주도로 국유화된 것이었고, 나머지는 현지 공장위원회의 주도로 국유화된 것이었다. 볼셰비키 지도자 밀류틴은 다음과 같이 썼다.
국유화 과정은 아래로부터 진행됐고,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사태를 따라가지도, 장악하지도 못했다. 현지 [공장위원회] 조직이 스스로 국유화를 실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들이 많이 공포됐는데도 그랬다.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노동자에 대한 당의 독재를 뜻했나?
레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실은 노동자에 대한 당의 독재를 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0월혁명 전인 1917년의 어느 때에 레닌은 소비에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볼셰비키가 아니라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새로운 국가의 최고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말한다. “소비에트는 국가권력을 전면적으로 장악함으로써만 훌륭하게 발전해 잠재력과 능력을 온전히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에트는 할 일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에트는 그냥 싹일 뿐이다(그런데 너무 오래 싹으로 남아 있으면 치명적이다). 아니면 노리개가 되든지.”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손안에 권력을 쥐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공장, 자신의 동네, 소도시, 대도시, 그리고 나라를 운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민중이 자치를 배우고 과오를 피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수단으로서 실행해 보는 것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가? 민중의 진짜 자치로 즉시 나아가는 것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가? …… 중요한 것은 피억압 노동 민중에게 자신의 역량에 대한 확신을 고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빵과 우유와 갖가지 식료품, 의복, 주택 등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적절히, 가장 엄격히 규제되고 조직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함을 실천에서 그들에게 입증함으로써 가능하다. …… 우리의 편협하고 늙고 관료적인 기구의 눈에는 불가능한 듯한 많은 것들이 수백만 대중에게는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백만 대중은 자본가들, 지주들, 관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노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처벌이 두려워서 일하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10월혁명 직후 레닌이 처음에 쓴 논설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 통제에 관한 규정 초안”이었다. 거기서 그는 노동자들이 자기 직장을 장악하는 과정의 첫 단계를 개괄적으로 설명했다. “노동자 통제는 기업의 모든 노동자들과 모든 사무직 고용인들이 행사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할 만큼 기업이 작다면 직접 행사해야 할 것이고, [큰 기업이라면] 총회에서 즉시 선출되는 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행사해야 할 것이다. 총회에서는 선거 의사록을 적어야 하고 선출된 대표들의 명단을 정부와 지역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들에 보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장관리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국가의 이익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레닌은 상이한 공장들이나 상이한 노동자 부문들이 서로 조정되지 않은 행동을 할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국가계획이 있어야 한다. 새 노동자 국가가 노동자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표한다면 국가계획과 현장 수준의 노동자 통제 사이에 충돌이 없을 것이다. “…… 프롤레타리아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잊지 않는다면 노동자 통제는 재화의 생산·분배에 관한 포괄적이고, 전능하고, 가장 양심적인 국가적 회계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레닌의 의도는 매우 분명했다. 혁명이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러시아가 침공받지 않고 내전에 빠지지 않는다면, 말하자면 만사형통이면, 러시아 노동자·농민이 자신의 삶을 최대로 자율적으로 영위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황은 급속히 악화돼 노동자 국가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해야 했다. 그에 따라 상황에 맞춰 애초의 의도가 제약을 받아야 했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사회주의였나?
1928년은 모든 것을 청산한 한 해였다. 그때부터 관료는 혁명의 성과를 모두, 그 잔재까지 철저히 파괴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고 추월하자”고 역설했다. 3년 뒤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선진 국가들에 비해 50~100년을 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간격을 10년 만에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해내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분쇄할 것입니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에서 공업화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소비에트를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20퍼센트의 성장률을 제안했다. 이제 스탈린은 그것을 40퍼센트까지 상향 조정했다. 민주주의와 국제주의를 폐기 처분한 채 말이다. 스탈린파 관료에게 공업화는 모든 것을 소련 국가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것을 뜻했다. 이를 위해 스탈린파 관료는 노동자 권력의 마지막 잔재조차 분쇄해 버리기로 했으며, 농민의 세력도 궤멸시켜 버리기로 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막을 내리고 스탈린주의 러시아를 향한 소위 “제2의 혁명”에 돌입했다. “제2의 혁명”은 스탈린파 관료가 주도한 반혁명이었을 뿐이다. 이 반혁명으로써 관료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자리를 굳혔다. 모든 것이 서방과의 경쟁이라는 목표를 위해 희생됐다. 그들이 일으킨 것은 ‘궁정 쿠데타’처럼 상층부에서의 사소한 변화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반대파를 ― 농민의 반대이든 여전히 10월혁명의 이상에 충실했던 당내 인사들의 반대이든 간에 ― 분쇄하는 데 착수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산업체와 공직과 경찰, 군대를 통제했다.
관료는 “부농(쿨락) 계급의 폐지”에 착수했다. 국가의 농업 지배를 위해 강제 집산화를 실시했던 것이다. 농민은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했다. 자연히 많은 농민들이 이에 저항했고, 이들은 엄청나게 야만적인 탄압을 받았다. 무수히 많은 농민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피살자들이 모두 부농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시에서 관료는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낮추기로 단단히 작정하고 있었다. 1928년까지는 노동자들이 그래도 10월혁명이 획득한 성과의 덕을 봤다고 말할 수 있다. ‘트로이카’(3각공조체제)라는 제도를 통해 노동조합과 공산당원 노동자들은 경영 방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파업권을 누렸고 파업 건수의 3분의 1 가량은 승리로 끝났다. 당직자들의 봉급은 숙련 노동자의 임금과 똑같았다. 때로 국가는 노동자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움직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노동자 권력의 흔적은 연명하고 있었다. 1928년 말쯤에는 3각공조체제의 실권이 축소됐다. 이제 더는 파업이 허용되지 않았고 언론에 보도조차 안 됐다. 1930년 말부터는 노동자들은 허가 없이 일자리도 못 바꾸게 돼 버렸다.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은 실로 유혈 낭자한 반혁명이었다. 1930년의 임금은 1937년에는 절반으로 깎였다. 임금격차는 더 벌어졌다. 낙태와 이혼의 권리들이 부정됐다. 교육은 권위주의적 획일 속에 속박당했다. 해외의 혁명가들에게 화를 안겨 주는 정책이 강요됐고, 그런 자멸적 정책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것이 바로 독일 공산당이 사회민주당과의 반나치 공동전선 구축을 거부하도록 한 정책이었다. 나치의 승리에 대한 주된 책임은 스탈린과 코민테른이 져야 한다. 이제 코민테른은 더는 국제 혁명을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련 대외 정책의 도구가 돼 버렸다.
스탈린은 소련을 일종의 거대한 강제노동수용소로 만들어 버렸다. 1928년 당시 소련의 정치범 ― 주로 내전의 전범들과 반혁명 사범들 ― 은 3만 명이었고 이 수치는 감소하고 있는 추세였다. 그리고 이들은 적절한 대우를 받았고 결코 강제노동형은 받지 않았다. 1931년쯤에는 2백만 명이나 수용소에 수감돼 있었고, 1933년에는 그 수가 5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1942년에는 무려 1천5백만 명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이들은 결코 “반혁명 분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노동자·농민·교사,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동조했던 사람들이었다.
1935년에서 1937년까지 모스크바 재판이라는 일련의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들을 거쳐 대량 학살이 이뤄졌는데, 피살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오랜 수호자들”이었다. 모스크바 재판은 민중에 대항한 내전에서 관료가 완전히 승리했음을 뜻했다. 이로써 1928년에 시작된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최종 승리를 거두고 관료는 민중적 통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1934년의 17차 당대회에 참가한 “1천9백66명의 대의원 가운데 1천1백8명이 체포됐고, 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당대회에서 추천된 후보 중앙위원들 1백39명 가운데 98명, 즉 70퍼센트가 체포돼 총살당했다.” 제17차 당대회 대의원의 80퍼센트가 1921년에도 당원이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스탈린주의 반혁명 전에 입당한 이 사람들은 모두 당에서 숙청당해 그 자리는 노동자 운동과 아무런 연계도 없었던 사람들로 채워졌다. 스탈린주의 러시아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완전한 대립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