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서문 7
1부_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서문 17
1장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적 토대 23
2장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 31
3장 실천에서 이론으로 37
2부_마르크스주의의 변형들
서문 59
4장 카우츠키주의 63
5장 스탈린주의 75
6장 제3세계 민족주의 95
7장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 113
옮긴이 후기 117
후주 123
찾아보기 137
이 책의 저자 존 몰리뉴는 영국 포츠머스 대학 ‘예술사와 철학’ 교수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고참 활동가다. 한국에서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렘브란트와 혁명≫(책갈피),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공저, 이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한 책이다. 역사상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대립하기까지 하는 ‘마르크스주의들’이 속출”해 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 모두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므로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존 몰리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특징은 마르크스의 저작 전체 또는 특별히 엄선된 교의들을 충직하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급인 현대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계급의 이익·투쟁·해방을 이론적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구실을 한다.……반면에, 다양한 ‘거짓’ 또는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의 공통된 특징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프로젝트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형들”로 카우츠키주의(사회민주주의), 스탈린주의, 제3세계 민족주의를 끄집어 내 낱낱이 해부한다. 반면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로 이어지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전통이 무엇인지 규명한다.
한국어판 서문 7
1부_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서문 17
1장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적 토대 23
2장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 31
3장 실천에서 이론으로 37
2부_마르크스주의의 변형들
서문 59
4장 카우츠키주의 63
5장 스탈린주의 75
6장 제3세계 민족주의 95
7장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 113
옮긴이 후기 117
후주 123
찾아보기 137
존 몰리뉴는 1983년에 마르크스 사후 1백주년을 기념해 이 책을 썼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름과 이데올로기, 그 내용을 완전히 왜곡하면서도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전 세계의 많은 정권들과 정당들로부터 [존 몰리뉴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변형들”로 카우츠키주의(사회민주주의), 스탈린주의, 제3세계 민족주의를 꼽았다.
그 뒤 22년이 흐른 지금, 그의 주장이 올바랐음이 입증됐다.
사회민주주의는 극적으로 변화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앞서 간 길을 독일의 슈뢰더와 브라질의 룰라도 계속 따라가고 있다. 이 때문에 각국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심각하게 쇠퇴했다.
스탈린주의는 거의 사라졌다. ‘공산주의’ 체제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일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올바랐음이 입증됐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서방’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지배 기구와 산업체 경영진이 그대로 계승됐다.
스탈린주의가 사멸하면서 오늘날 제3세계 민족주의는 이제 아예 마르크스주의적 외피조차 두르지 않고 있다. 제3세계주의의 영웅인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조차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아니라 “볼리바르주의” 혁명을 이야기한다.
우파 이데올로그들은 이런 사태 전개가 사회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틀렸다. 지난 10년 동안 저항이 되살아나, 전 세계 수준에서 성장했다.
이 책은 급진화한 새 세대를 위해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쓰여졌다.
존 몰리뉴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이며 <소셜리스트 워커>의 정기 칼럼니스트다. 포츠머스 대학 예술사와 철학 교수이기도 하다.
한국에 소개된 주요 저서로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렘브란트와 혁명≫(책갈피),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공저, 이후) 등이 있다.
존 몰리뉴는 8월 방한해 18일부터 21일에 고려대에서 열린 ‘전쟁과 변혁의 시대’라는 토론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연합뉴스>, <오마이뉴스> 등 언론 보도 참조). 이 토론회에서 존 몰리뉴가 한 강연도 곧 출판할 예정이다.
반전 반자본주의 노동자운동 단체 ‘다함께’에서 신문편집자이자 국제연락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당 건설을 향하여 : 레닌 1893~1914≫(북막스),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코민테른≫(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 등이 있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뜨고부터 백 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심지어 서로 대립하기까지 하는 ‘마르크스주의들’이 속출했다. 따라서 고인(故人)의 1백 주기를 맞이하는 지금이야말로, 난마처럼 얽힌 이 매듭을 풀어 보기에 적당한 시점인 듯하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는 주장들의 심사 기준을 확립함으로써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답해 볼 만한 때인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어떤 점들이 문제가 되는지부터 분명히 해 두기로 하자.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몇몇 쟁점들(예컨대, ‘이윤율 저하 경향’이나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동하는 민주적 운동에서는 대체로 있을 법한 일이다. 진짜 문제는 이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 잡아 가두고 죽이고 전쟁을 벌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모든 대규모 사회 갈등에서 혁명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편에 선다는 것이다. 1917년 플레하노프와 레닌, 1919년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1936년 바르셀로나의 공산당원들과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 1956년 헝가리, 그리고 1981년 폴란드를 생각해 보라.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문제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규명하려는 것은 전혀 의미 없는 짓이라면서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빠짐없이 그 자격을 인정해 준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천박한 이론가들 입맛에 꼭 맞는 해답이다. 모든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스탈린이나 폴 포트(캄보디아의 학살자)와 한데 싸잡아 비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대학에서 마르크스를 팔아 밥벌이를 하는 학자들의 입맛에도 꼭 맞는 해답이다. 왜냐하면 그 해답 덕분에 이 학자들께서 돈이 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위한 교과서들’을 무척 많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며,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알튀세르주의자에 이르는 모든 사상 유파가 비빌 언덕을 찾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관조적인 문제 해결책이다. 행동은, 특히 정치적 행동은 실천뿐 아니라 이론에서도 단호할 것을 요구한다. 세계를 해석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문제를 직시할 수밖에 없으며, 진정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에 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의 저서들이 곧 마르크스주의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스승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따져 제자됨을 평가하려는 것도 아마 그러한 선긋기 노력 가운데 하나일 성싶다. 그러나 이 또한 사변적이고 심지어 종교적이기까지 한 해결책이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다루면 다음의 사실을 놓치게 된다. 즉, 엥겔스가 말한 대로 마르크스주의가 “교조가 아니라 행동 지침”이라면, 그것은 살아 움직이며 발전하는 이론이요 지속적 성장 능력을 지닌 이론으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 이래로 엄청나게 변화한 현실 ―을 분석하고 그것에 대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이론에 그것을 확립한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역사적 관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론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으면서까지 그 내용을 확립자 개인이 남긴 글들의 내용에 국한시켜도 좋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고 봤다. 따라서 어떤 철학이나 이론 또는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그 정체를 밝히려면, 먼저 그 토대가 되는 ‘사회적 존재’를 규명해야 한다.……
엥겔스의 ≪반뒤링론≫은 다음과 같은 단정으로 시작한다. “근대 사회주의는 그 내용으로 보건대 주로, 한편으로는 근대 사회를 풍미하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다시 말해서 자본가들과 임금노동자들 사이의 적대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을 지배하는 무질서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여기에다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곧 노동계급의 처지에서 그러한 모순들을 인식하는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면 엥겔스의 표현은 완벽해진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지적했듯이, “경제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과학을 대표하는 자들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론가들이다.”……≪공산당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구절도 나온다.
공산당은 오직 다음의 점에서만 다른 노동계급 정당들과 구별된다. 1)각국 프롤레타리아가 벌이는 나라 안 투쟁들에서 전 세계 공산당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공동 이익을 밝히고 그것을 앞세운다. 2)부르주아지에 맞서 노동계급이 벌이는 투쟁이 거쳐야 하는 각각의 발전 단계에서 전 세계 공산당들은 언제 어디서나 전체 운동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로써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의 이론이라는 정의에 힘과 살이 붙게 된다. 앞의 인용문은, 국적을(그리고 오늘날에는 인종이나 성도) 불문하고 어느 한 부문이 아닌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을 천명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특정한 나라나 지역 또는 직능 집단들의 일시적 이익을 위해 계급 전체의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기회주의의 본질 규명과 비판의 출발점 노릇을 한다.
우리가 제시한 것은 사회적 정의일 뿐 아니라 역사적 정의이기도 하다. 그 정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왜 역사상의 특정한 시점에서 발생했는지도 설명해 준다. 착취와 억압은 몇천 년이나 있어 왔고, 자본주의는 몇백 년이나 초보적 형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그와 함께 프롤레타리아도 성장해 자본주의를 타도할 만한 그들의 잠재력이 인지될 수 있고 나서야 비로소 마르크스주의는 출현할 수 있었다. 1843년 말에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 서클들과 접촉하고서야 비로소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에 도달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철저하게 속박당한 계급의 형성”을 발견하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지지를 처음으로 선포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당시에 그가 쓴 글을 보면, 프롤레타리아가 “기존 세계 질서에 사망 선고를 내렸을” 때 “그들은 다만 그들 자신의 존재의 비밀을 선포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로 기존 질서의 죽음을 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는 구절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적 토대를 검토할 때는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저항과 투쟁에 관한 이론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의 승리에 관한 이론이다. 이 점은 마르크스 자신이 밝힌 바다. 그는 계급과 계급투쟁의 발견자라는 사람들의 칭찬을 사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훨씬 전에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에 대해 서술했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여러 계급을 경제적으로 분석해 놓았다. 내가 새롭게 한 일은 다음의 사실들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1)계급들의 존재는 특정한 역사 발전 단계와 조응한다는 것. 2)계급투쟁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귀결된다는 것. 3)이 독재는 모든 계급을 폐지하고 계급 없는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만 존재하리라는 것.
레닌도 ≪국가와 혁명≫에서 같은 생각을 훨씬 더 힘주어 강조한 바 있다. 그는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마르크스주의자다. ……그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를 올바로 이해하고 인식하는가 하는 것을 평가하는 시금석이다” 하고 주장했다. 레닌의 단정은 누구보다도 카우츠키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몇십 년이나 마르크스주의 정설의 심판관 행세를 하고서도 정작 러시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노동자 혁명에는 등을 돌린 위인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한때의 과거사였을 뿐일까? 마르크스주의를 사회를 해석하는 방법으로나 여겨 그것에 ‘관심을 보이고’ 그것을 옹호하기까지 하는 식자(識者)들이 노동자 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쟁에 대한 이론에는 통 관심이 없고 하물며 그 실천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오늘, 카우츠키의 처신은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따라서 지금까지 프롤레타리아의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분석한 결과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세 가지 요소를 갖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는 국제 노동계급의 공동 이익에 관한 이론이다. 둘째, 마르크스주의는 근대 프롤레타리아가 탄생하고 그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을 전개한 결과이다. 셋째,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승리를 얻게 하는 이론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해서 정의를 내리면 마르크스주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한다는 원칙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특히 부르주아지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 연(然)하는 많은 사람들까지도) 이것을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의 근본 원칙이라고 생각해 왔다. 대체로 이러한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일 때는, 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사적 소유와 동격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는 비합리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탓에 경제 위기, 가난, 전쟁 들을 낳는다. 생산을 국가가 소유하고 경제를 국가가 계획한다면 사회는 좀 더 나아지고 좀 더 합리적인 체제가 될 터이고 이러한 악들도 깡그리 없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 떠오르더라도, 예컨대 게릴라전이나 의회 입법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더라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와는 아주 다르게 생각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계급투쟁을 벌인다. 프롤레타리아가 계급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르주아지를 정치적으로 물리치고 생산수단을 손에 넣는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일을 자신의 국가를 세움으로써만 할 수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그 문제를 바로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노동계급 혁명에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프롤레타리아를 지배계급 자리에 앉히고 민주주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해 부르주아지한테서 모든 자본을 차츰차츰 빼앗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 곧 지배계급으로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의 손아귀에 한데 모으고 모든 생산력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늘릴 것이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국유화를 목적으로 보고 노동계급을 수단으로 본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해방을 목적으로 보고 국유화를 수단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