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의 첫 책 발행 30주년
1992년에 창립한 도서출판 책갈피는 1년 뒤인 1993년 3월 1일 첫 책을 발행습니다. 바로 《소련 국가자본주의》(토니 클리프 지음)인데요. 이 책이 나온 지 올해로 꼭 30년이 됐습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소련과 동구권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합니다. 소련이 붕괴하며 많은 좌파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혁명이라는 전망을 차츰 잃고 있던 터에 나온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을 줬습니다.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면 도대체 사회주의는 무엇일까? 소련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라는 관점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양립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역사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토니 클리프(본명 이가엘 글룩스타인, 1917~2000)가 쓴 책입니다. 원서 초판은 1948년에 나왔어요.
국제 좌파의 역사를 좀 아는 독자들은 1956년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두 개를 기억할 겁니다.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해 혁명을 분쇄하고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가 전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의 악행을 폭로한 사건을요. 두 사건은 서구에서 소련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자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는데,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그보다 무려 8년 전에 나온 겁니다.
냉전이 고착된 상황에서 클리프는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놨습니다. 국제 노동계급에게는 미국도 소련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이 구호는 냉전의 양 진영 중 한쪽을 편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거센 시절에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를 보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클리프가 이 책에서 개진한 국가자본주의론은 그 뒤로 여러 논쟁과 토론을 거치며 더 다듬어지고 발전했습니다. 1949년 민족 해방 혁명으로 탄생한 중국을 포함해, 쿠바나 북한 같은 사회를 분석하는 기본 틀로 확장됐죠.
한국에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로 지정돼 한동안 판매되지 못했습니다. 책갈피는 2011년에 소련 붕괴 20주년을 맞아 번역을 다듬고 부록을 교체∙추가해,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국가자본주의론의 분석》으로 다시 출판했습니다.
오늘날의 의미
요즘 ‘신냉전’ 얘기가 많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프레임을 주장하며, 가장 중요한 적수인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필요한 동맹을 결집하려 합니다. 경제적·군사적 경쟁과 갈등이 심화하는 세계를 반영하는 일이죠.
그런 갈등 속에서 좌파들 측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권위주의보다는 낫지 않냐며 미국과 서방을 옹호하는 입장과 미국을 유일한 제국주의로 보며 중국과 러시아를 두둔하는 입장으로요.
그렇기 때문에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