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세계를 어떻게 바꿔 왔을까요?
여성의 삶과 조건이 수십 년 동안 크게 변하기는 했지만 대다수 여성의 삶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여성은 평균임금이 남성의 68퍼센트에 불과하고 비정규직 비율도 더 높으며 성적 괴롭힘으로 고통받고 육아와 집안일의 일차적 담당자입니다.
우파 정치인들이 “역차별” 운운하는 것은 취업난 등에 따른 청년들의 불만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는 것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안티 페미니즘’ 논란의 배경에는 남성 일반을 권력자나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급진 페미니즘에 대한 정당한 반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상을 남 대 여 대립 구도로 보는 급진 페미니즘의 이런 태도는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서 실업과 성차별 등에 맞서 싸우는 데 난점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사회의 근본 대립이 성별이 아니라 계급 간에 있다고 보며, 남녀 노동계급이 단결해서 자본주의와 그것이 낳는 성차별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지금까지 출판한 도서 가운데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을 가장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책 2권을 골라 소개합니다.
책갈피 추천 책 01
이 책의 원서 제목은 《Material Girls: Women, men and work》입니다. 중의적인 제목이라 한국어판에서는 원서 제목을 그대로 쓸 수 없었지만, 저마다 그리는 여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의 진짜 여성의 삶을 그리겠다는 지은이의 의도를 보여 줍니다.
지은이는 모든 권리를 누리고 더는 차별받지 않는 자유주의자의 여성상이나 늘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차별당하고 피해만 입는 페미니스트의 여성상이 아니라 여성차별의 현실 속에서 각종 어려움을 겪지만 자신을 해방할 잠재력을 키우고 있는 오늘날 현실의 여성을 그립니다.
이 책은 영국의 사회주의자인 린지 저먼이 썼습니다. 린지 저먼은 2000년대 초부터 전쟁저지연합의 사무총장을 맡아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반대 운동을 이끌었고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반전운동을 건설하며 활약하고 있습니다. 여성해방·계급·전쟁에 관해 많은 글과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도 이런 강점이 잘 드러납니다.
린지 저먼은 집회, 강연, TV 토론회에 자주 등장하는 대중 연설가로도 유명한데요. 이 책에서도 특유의 간명하고 익살스러운 글솜씨를 보여 줍니다. 한 독자는 “깔깔거리며 단숨에 재미있게 읽었다”고 소감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 책은 각 장이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독자 여러분이 관심 있는 주제를 골라 읽을 수도 있고, 비교적 얇은 책이니 처음부터 탐독해도 좋겠습니다.
지금 이곳의 이야기
이 책의 원서는 2007년 영국에서 출간됐는데, 마치 2020년대 한국을 묘사한 것만 같습니다. 특히 2장과 5장이 그렇습니다. 2장 “섹스: 영국의 특이성”에서는 오늘날 사회에 성적 이미지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사람들의 성적 관계는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5장 “남자들은 어쩌다 …”에서는 이른바 ‘젠더 갈등’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여성 노동의 변화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된 린지 저먼의 또 다른 책 《계급이란 무엇인가?》는 오늘날 노동계급의 현실과 그들이 겪는 변화를 잘 보여 줬는데요. 《멈춰 선 여성해방》에서도 여성의 노동을 다룬 4장이 특히 뛰어납니다. 지은이는 세계대전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사회 변화가 여성의 삶과 노동에 미친 변화를 세심하게 보여 줍니다.
여성은 평균임금이 남성보다 낮고 비정규직 비율도 높은데 대체 왜 그런 건지 갸우뚱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여성의 교육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임금을 낮게 규정하는 법률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죠. ‘여성 자신이 시간제를 원한다’는 둥의, 논박이 필요한 주장도 있습니다. 이 책은 여성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장벽이 무엇인지 잘 보여 주고, 그럼에도 노동에 참여하면서 여성이 전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갖게 됐다고 지적합니다.
여성을 위한 전쟁?
지난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여성 인권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해묵은 주장이 다시 제기됐는데요. 이는 서구 일부 나라의 무슬림 여성 히잡 착용 금지 논란과도 연관된 주제입니다. 지은이는 베테랑 반전 운동가답게 6장에서 이 뜨거운 쟁점을 깊이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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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영국에서는 노동운동이 패배를 겪고 급진 페미니즘 조류가 성장한 결과,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급진 페미니즘의 주장, 특히 가부장제 이론을 받아들이고 개혁주의로 빠져들면서 좌파 사이에 크게 논쟁이 일어났습니다(지금 한국은 노동운동이 큰 패배를 겪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좌파가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죠).
이때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국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여성해방과 혁명》을 써서 여성들의 투쟁 역사를 다뤘습니다. 그는 “여성해방이 계급투쟁과 얼마나 깊이 연관돼 있는지 보여 주려” 했습니다.
네, 이 책은 역사책입니다. 누구나 쉽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론서나 사회과학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이 책을 먼저 읽는 게 더 수월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 어느 독자가 남긴 소감은 이 책의 장점을 잘 보여 줍니다. “여성운동사에 대해 기존의 여성주의와는 다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함께 전진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역사의 주체이자 역사 창조자로서 조명합니다. 17세기 영국 혁명, 18세기 프랑스 혁명, 19세기 파리코뮌, 20세기 러시아 혁명에서 여성이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했고 무엇을 성취했는지 감동적으로 보여 줍니다.
○ 파리코뮌의 여성
“파리의 노동자, 여성과 남성은 인간의 잠재력과 자유를 잠깐이나마 드러내 보였다. 여성은 바리케이드에서, 새로운 협동조합과 교육에서, 그리고 성 도덕에 관한 새로운 사상에서 훌륭한 용기와 주도력을 보여 줬다.”
○ 러시아 혁명의 여성
“1917년 혁명을 시작한 것은 바로 페트로그라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 러시아 혁명은 여성해방의 이정표였다. 그것은 여성의 완전한 경제·정치·성 평등을 역사의 의제에 올린 최초의 사건이었다.”
함께 후퇴
반면에 이런 혁명들이 쇠퇴하거나 패배하면 여성들이 그동안 성취한 개혁도 왜곡되거나 도로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줍니다.
이런 후퇴는 늘 억압적 방식으로만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여성은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이혼의 자유를 쟁취했지만, 자본주의 열강의 포위 공격과 내전, 외국 노동자 혁명들의 패배로 위기가 심각해지자 여성들 자신이 (해고를 피하기 위해) 동일임금을 포기하거나 (자신과 자녀의 생존을 위해) 이혼의 자유를 제한해 달라고 요구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지은이는 이 모든 후퇴와 변질의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 줍니다.
여성 노동자를 조직한 경험
이 책은 미국·독일·러시아·프랑스·영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면서 겪은 성공과 실패를 다룹니다. 이 다양한 경험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정치와 조직이 어때야 하는지, 부르주아·중간계급 페미니스트와의 관계는 어때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