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중국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지도부를 자처할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시행하는 중국에서는 노동계급이 농민을 지도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오늘날 중국의 현실에 비춰 이런 주장을 평가한다.
39~40쪽
1차 국공합작은 사회 계급들 사이의 관계도 아니고 노동자 정당과 농민 정당의 동맹도 아니었다. 그런 동맹을 가능케 할 기구들, 즉 노동자 소비에트도 전국적 농민 연합 조직도 없었다. 국공합작은 노동계급을 지도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정당이 중국인 자본가·지주를 이끌려는 정당에 종속되기로 하는 합의였다.
47쪽
농촌 유격전은 나름의 제약이 있었다. 유격전은 일정한 곳에 자리 잡은 노동계급이 선택할 수 있는 투쟁 형태가 아니었다. 노동자가 유격전에 참가하려면 전업 군인이 돼야 했다. 유격전의 정수는 공개적 정치 토론이 아니라 은폐와 기습이었다.
59쪽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 중국공산당의 정책이 확립됐다. 전쟁 전에 이미 공산당은 지주제와 타협하는 길로 나아갔다. 전쟁을 거치며 ‘반일’ 지주는 ‘항일 투쟁에 반대하지 않는 지주’가 됐다. 공산당은 개혁을 해야 하지만 지배계급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개혁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61~62쪽
옌안에서 공산당은 1927년 이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 이때의 공산당은 1927년의 공산당과 질적으로 다른 조직이었다. 어림잡아 보면, 1944년 말에 당원의 93퍼센트는 중일전쟁이 터지고 나서 입당한 사람이었고, 그 신입 당원의 90퍼센트는 농민 출신이었다.
75쪽
신민주주의 국가는 착취받는 한 계급이 나머지 계급들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공산당은 옛 국민당 국가기구를 ‘분쇄’하기는커녕 그것을 흡수하려 했다. … “빈민과 착취받는 사람 전체”를 무장시킨다는 것은 아예 논외였다.
76~77쪽
일찍이 1942년에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다음으로 하루 10시간 노동제와 누진적 실적급 임금제를 실시해야 한다. 임금을 이용해 생산을 늘리고 노동 의식을 고취하는 것이다. … 평등주의적 공급제 임금체계는 숙련노동자와 미숙련노동자의 구분, 부지런한 노동자와 게으른 노동자의 구분을 흐린다. 그래서 노동자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린다. 노동자의 적극성을 촉진하면서 생산의 양과 질을 높이려면 임금체계를 공급제에서 누진적 실적급제로 바꿔야 한다.”
91쪽
1958년의 대약진운동은 후진성의 한계를 돌파하고, 생활수준을 어느 정도 개선시키라는 인구 대다수의 절박한 요구를 물리치고, 모든 산업부문의 성장을 엄청나게 가속하려는 장대한 시도였다.
104쪽
인민공사가 “전 인민의 소유”를 확립한 뒤 단 “몇 년” 만에 “공산주의로 이행”하자는 얘기는 쏙 들어갔다.
106쪽
국가가 고립된 상태에서 물질적 후진성과 집약적 경작 방식은 소생산자 경제의 사회구조를 끊임없이 재창출하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 중국에서 이 과정은 한편으로는 ‘부농 경제’의 부활로,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 지역 당 조직의 부패와 타락으로 다양하게 묘사됐다(당 간부들이 부농처럼 행동하거나 부농과 긴밀히 협력했기 때문에 이 둘은 흔히 같은 과정이었다).
128, 135쪽
1966년 중반에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파리코뮌에 비유했었다. 이제 [1967년에] 그는 ‘상하이 코뮌’이라는 발상을 철저히 거부했다. … 우리는 하나의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즉, 혁명적 용어로 묘사된 개혁 운동이 당의 통제를 벗어나 민중 혁명으로 나아갔지만 끝내 좌절됐다는 것이다.
136~137쪽
문화혁명 이후 중국 국가의 역사는 세 국면으로 나뉘는데, 중앙 지도부에서 일어난 잇따른 격변이 그 구분선이 된다. … 대체로 1969~1973년에는 정책이 ‘우경화’했고, 1973~1975년(덩샤오핑이 복권돼 공직에 있을 때)에는 ‘좌경화’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른바 ‘좌파’라는 신참들은 정책의 ‘우경화’ 국면에 우세했고, ‘우파’는 ‘좌경화’ 국면에 우세했다. 이런 역설은 오로지 [좌우파] 호칭이 잘못됐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기본 전략의 일치에 견주면 논쟁의 상징들은 정책적으로 주변적 의미밖에 없었다.
161쪽
생산 목표를 달성하라는 압력(그리고 벌금 부과나 더 가혹한 처벌) 때문에 생산 속도 향상 압박은 계속됐다. 언론은 사람들이 쉼 없이 24시간 또는 그보다 더 일하게 되는 상황을 보도했다. 한 철도 “영웅”은 39시간 연속으로 일했다. 1955년 안산의 제철소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왔다. “4월의 어느 한 주 동안 이 기업의 몇몇 노동자들은 쉬지 않고 35시간이나 일했다. 다른 사람들도 쉴 새 없이 17시간을 일했다.”
162쪽
국가는 노동비용을 엄격히 억제함으로써 당기 생산에서 어마어마한 몫을 가져갔다. 1954년 전총 위원장[라이뤄위]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52년에 국영기업 노동자들은 1인당 연평균 1억 위안의 가치를 생산했다. 그중에서 노동자들의 월평균 임금 50만 위안을 제외하면 94퍼센트가 국가를 위해 창출한 자본에 해당했다.”
167쪽
1956년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유일한 대대적 임금체계 개혁을 단행했다. 그 목적은 유인책과 임금격차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170~171쪽
헤이룽장성 남부 다칭 유전의 노동자들은 서리 맞는 것을 피하려고 천막이나 땅굴에 지내면서 일을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 이 노동자들은 남는 시간에 흙으로 오두막을 지었다. 이제 그 지역에는 50만 명이 살고 있지만, “신축 가옥인데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고, 10여 가구가 함께 쓰는 옥외 화장실과 공동 목욕탕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극단적 형태의 ‘자력갱생’이다! 다칭이 제공하는 잉여생산물을 국가가 아주 자랑스러워할 만도 하다.
178쪽
중화인민공화국 초창기에는 노동조합의 구실을 둘러싼 논란이 없었다. 노동조합의 구실은 앞서 해방구 시절에 이미 정해졌다. 즉, 국가의 생산 목표를 실현하는 데 조력하라는 것이었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1920년에 트로츠키가 개진한 주장을 망설임 없이 고수한 듯하다.
180쪽
리리싼과 그의 동료들(전총 집행부의 3분의 1)은 “경영진은 전체의 장기적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하지만 노조는 개별적이고 즉각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해야 한다. 경영진은 생산을 대변해야 하지만 노조는 분배를 대변해야 한다”는 견해를 고수하다가 비판을 받고 노조 지도부에서 쫓겨났다.
188쪽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임시직 노동은 국민당 정부 때의 일반적 상황과 달리, 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체해서 노동력을 희석하는 데 체계적으로 이용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 ‘노동자-농민 제도’ 아래서, 도시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농촌으로 ‘하방’당할 수 있었고(그러면 도시 노동자로서 받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게 돼, 기업과 지방정부는 노동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젊은 농민들은 도시로 가서 임시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그러나 도시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물질적 혜택은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 경우에도 기업과 지방정부는 지출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191쪽
마오쩌둥을 포함해 지도부의 어느 누구도 이 제도를 비판하지 않았다. ‘노동자-농민’ 제도가 3대 차이의 하나를 종식시키는 방식이라고 정당화된 것을 보면 이 제도를 떠올린 영감의 원천은 마오쩌둥 본인일지도 모른다.
214쪽
신중국 정부는 국유화에 바로 착수하지 않았고, 경영자와 민간 기업의 권한을 신중하게 보호했다. 그러나 노동 재편의 일환으로 공공 부문에서는 연합생산위원회와 직공대표대회, 민간 부문에서는 노자협상회의를 통해 협의하게 하는 조치도 장려했다. 단, 공공 부문의 위원회들이 임금과 복지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223쪽
중화인민공화국 노동자들의 지위는 다른 사회의 노동자들과 질적으로 다를까? 선전의 내용이 다를 뿐 객관적으로 똑같다. 어떤 실질적 기준으로 보더라도 1949년 이후(또는 1968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계급의 지도부나 대표가 아니었다. 중국 노동자들은 중국 현대사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였다.
245쪽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공산당이 남긴 기록을 보면, 공산당 지도부는 농민들에게 특별히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을 ‘대변’할 의무감을 느끼지도 않았음이 꽤 명백하다.
259쪽
중국에서는 공식 정책이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추진된 단계도 없었다.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는 저우언라이가 말했듯이 평등주의는 “후진성을 부추기고 진보를 가로막는 프티부르주아 세계관의 한 유형이며,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 체제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스탈린식 입장을 항상 고수했다.
262쪽
부르주아지를 단지 탐욕스럽고 게으른 집단으로 정의한다면, 이 용어들은 객관적 사회구조와 아무런 연관도 없게 돼 버린다. 누군가가 오늘은 프롤레타리아지만 내일은 부르주아가 되고 모레는 다시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계급투쟁’은 어떤 사람이 프롤레타리아적 근면성을 발휘하다가 잠시 부르주아적 나태함에 빠지는 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263쪽
국가가 벌이는 도덕 캠페인으로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면, 마르크스든 그의 유물론이든 터무니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한 공산주의 개념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 된다.
275쪽
여성은 [인민공사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노동 점수를 하루 7~8점밖에 얻을 수 없지만, 남성은 9~10점을 얻을 수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말한 3대 차이에 포함되지 않는 [성별] ‘분업’이 고착되게 만든다. 도시 지역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더 평등해 보이지만, 수많은 나라에서 그러듯이 여성은 저임금 일자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중국 언론에 한 번 등장한 (그러고 나서 잊힌) 악명 높은 사례, 베이징의 분뇨 수거 할머니들 사례가 대표적이다. 남녀 간 노동 점수에 차등을 두는 제도는 여성이 남성보다 육체적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상투적 논리지만, 중국 여성들이 고된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로 반박되는 것이기도 하다.
275쪽
광대한 농촌 부문이 여전히 표준적·전국적 임금체계에 포함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득 수준이 더 평등해지기를 염원하는 것은 분명 공상에 가깝다. 중국 정부는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정부의 관심사는 기껏해야 도시에 사는 소수이고, 그조차 소득 격차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상이한 소득을 상이한 소비수준으로 표현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289~290쪽
중국에서는 국가 관료들이 선출돼야 한다거나, 소환 대상이 돼야 한다거나, 평균임금 이상을 받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 어떤 단계에서도 제기되지 않았다. 중국 국가의 관료들은 임명되고, 베일에 싸인 채로 일하며, 소득과 지위 면에서 특혜를 누린다. 마오쩌둥이 반대하는 것은 이런 관료의 존재가 아니라, 관료의 권력 독점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기풍[방식]이었다.
292쪽
마오쩌둥은 [1973년 9월 중국을 방문한]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를 만나 프랑스 제4공화국 정부의 불안정성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폴레옹의 방법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의회를 해산하고, 자신과 함께 통치할 사람들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어떻게 마오쩌둥은 반혁명의 목적을 외면한 채 반혁명의 수단을 칭송할 수 있는 것일까?
293쪽
중국공산당은 집권할 때 옛 국가를 ‘분쇄’하지도 않았고, 국민당의 ‘무장한 사람들의 조직체’를 해체하지도 않았다. 새 정부는 기존 국가기구를 인수하고 국민당 군대를 인민해방군에 흡수시켰다. 공산당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그것을 순전히 보조하는 것 이상의 구실을 한 노동자·농민 대표들의 기구도 없었다.
296쪽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국가의 외관 장식 중 하나이고, 사실 레닌이 ‘말잔치나 하는 장소’라고 비판한 서구 나라들의 의회보다도 실질적 권한이 없는 기구다. 주요 정책들, 이를테면 한국전쟁 참전과 토지개혁, 1차 5개년계획, 대약진운동, 소련과의 결별, 문화혁명, 미국과의 데탕트는 모두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관여 없이 시행됐다.
299쪽
문화혁명 때도 그[마오쩌둥]는 당 간부들에게 그 격랑 속에서 힘을 합쳐 ‘국가 기밀’을 수호하라고 촉구했다. 정부 예산이든 5개년계획이든 관련 정보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중국에 호의적인 한 관찰자도 2차 5개년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주의 정권의 역사 최초로, 전체 인민은 목표치를 전혀 모르는 채로 5개년계획에 착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301쪽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평등’이라는 측면에서도 중국은 세계의 다른 많은 국가들과 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303쪽
[1965년 1월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갖춰야 합니다. … 어떤 나라든, 어떤 미사일·원자폭탄·수소폭탄이든 우리는 그것들을 능가해야 합니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원자폭탄이 터져 인류의 절반이 사라지더라도 나머지 절반은 살아남을 것입니다.”
339쪽
볼셰비키가 보기에 10월 혁명은 일시적 승리였고, 이 혁명의 정당성은 러시아가 세계 질서의 전복을 위해 “자기 민족의 이익을 최대한 희생시킬” 수 있게 됐다는 점에 있었다. 국가 간 관계는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러시아와 관계 맺은 국가를 전복할 혁명운동이 (볼셰비키의 물질적 원조를 받으며) 건설되는 동안 [혁명 러시아가] 생존할 필요성에 좌우됐다. 러시아가 다른 국가와 맺은 관계가 그 나라 지배계급에 대한 정치적 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됐다.
351쪽
중국의 원조 제공은 서로 연관된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유엔에 가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의 영향을 차단하는 것이다. … 원조를 제공받는 정부의 정치 성향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된 적이 결코 없다.
356쪽
미국의 베트남전쟁으로 어둠이 드리운 기간 내내 미국과 중국의 대표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회담을 열었다(1971년 5월까지 바르샤바에서 미·중 회담이 137번이나 열렸다). … 이 회담들로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안정됐다. 즉, 인민해방군은 미군이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을 가르는 북위 17도선을 넘지 않는 한 베트남에 개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덕분에 중국은 미국의 개입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문화혁명에 착수할 수 있었다. 반대급부로 미국은 중국이 예컨대 (1954년과 1958년처럼) 대만을 공격해 베트남에서 작전 중인 미군이 분산되고 그럼으로써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숨통이 트이게 되는 일을 벌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362쪽
이미 1962년 무렵에는 소련과 중국의 결별이 세상에 드러나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1964년에 가서야 불현듯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날 소련은 부르주아지의 독재, 대부르주아지의 독재, 독일 파시즘식 독재, 히틀러식 독재 체제입니다. 그들은 악당 무리입니다.” … 즉, 스탈린 통치 기간 내내 소련에 잠복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독점 부르주아지’가 1953~1956년에 니키타 흐루쇼프의 지도를 받아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고, ‘자본주의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367쪽
묘한 역설들이 생긴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부터 좌파가 전통적으로 반대해 온 대상인 나토에 이르기까지, 즉 유럽과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 중국의 지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화사는 소련의 위협에 맞서 군비 지출을 늘리고 나토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국 보수당 정부의 국방백서에서 발췌한 내용을 <런민르바오>에 실었다. 중국 정부가 가장 열렬히 환대하는 인물은 더없이 반공주의적인 우파 정치인들이다.
370~371쪽
마침내 [1975년 11월 20일에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죽었을 때, … 중국 언론은 중국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주더가 스페인 국가원수 프랑코의 서거를 애도하다.” 주더, 총리 저우언라이, 외교부 장관 [차오관화] 명의의 조화가 보내졌고, 이튿날 주더는 새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대관식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축전을 보냈다.
385~386쪽
미국의 오랜 동맹국 … 이란의 샤[국왕] 정권은 대외적으로는 초강대국[미국]과 제휴했고, 국내에서는 억압적이고 ‘봉건적’이었다. 그렇지만 1971년 4월 지칠 줄 모르는 저우언라이는 … 베이징을 공식[친선] 방문한 샤의 누이 아슈라프 팔레비 공주를 맞이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했다. 그 이란 공주는 마오쩌둥 주석의 환대를 받았고, 심지어 노동절 기념 행사에서는 마오쩌둥과 함께 단상에 올랐다(이것은 행진하는 대중에게도 틀림없이 즐거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 이제 샤는 ‘진보 세력’의 일원이 됐다. 지하에서 활동하던 이란 좌파는 샤 정권의 부패와 억압적 성격을 비난할지 몰라도 중국이 볼 때는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였다.
389~390쪽
7월 수단 군부의 한 분파가 친소련 공산당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 니메이리의 정권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이내 실패했다. 니메이리는 강경하게 대응하며 공산당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니메이리의 승리를 축하했고, 그에게 4500만 달러 상당의 무상 원조를 제공했다. 한편, 소련과 북베트남은 니메이리가 저지른 학살을 강력히 항의했다. 중국은 수단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수단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아니라, 오로지 중소 경쟁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했다(이는 소련과 미국도 공유하는 태도였다).
393~394쪽
중국은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를 열렬히 지지했다. … 중국 언론은 칠레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떤 단서나 경고도 없이 혁명으로 묘사했다. 피노체트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가 중국을 난처하게 했을지 몰라도 이제 쿠데타는 중국의 우방국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이었다. 칠레 주재 중국 대사관은 피노체트에게 사냥당하는 아옌데 정부 지지자들에게 피난처가 돼 주기를 거부한 외국 대사관 세 곳 중 하나(나머지는 영국 대사관과 프랑스 대사관)였고, 중국은 동구권에서 맨 먼저 새 [피노체트] 정권을 승인했다. … 그 후 중국은 아옌데에게 해 주던 재정 지원을 피노체트에게도 이어서 해 줬다. … 칠레의 새 정권에 우선적으로 접근할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소련을 앞지를 기회를 얻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뿌리치기 힘든 커다란 유혹이었다.
405~406쪽
마오쩌둥은 … 무장투쟁(무장봉기)과 통일전선을 중국공산당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두 요소로 평가했다. 이 둘을 결합한 결과는 역설적이다. 즉, 마오쩌둥주의 단체들은 다른 노동계급 정당들과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거부하면서, 부르주아 정당들과는 기꺼이 협력한다. 그 결과는 좌파적 종파주의 미사여구를 장착한 민족주의다.
424~425쪽
중국의 대외 정책은 서독의 독일공산당 내 친중국 세력과 [이들이 만든] 독일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파)에 비슷한 역설을 안겨 줬다(친소련 성향 공산당의 약칭은 DKP다). 중국이 서독을 초강대국들에 반대하는 진보 국가로 기꺼이 여기게 됐을 때, 그리고 서독 의회 내 우파[기사당]의 지도자인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1975년 1월 방중 때] 환대하고 있을 때, 서독의 마오쩌둥 지지자들은 충심으로 나토 강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429쪽
마오쩌둥 지지자들은 마오쩌둥 사상과 중국 정부의 대외 정책을 충직하게 지지하는 한, 반혁명적이다. 반대로, 노동자로서 자신의 본능에 맞춰 마오쩌둥주의를 각색하는 한, 혼란에 빠진다. 어느 경우든 집단적 자력 해방을 이룰 수 없다.
432쪽
입수할 수 있는 증거에 비춰 볼 때,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자나 농민의 계급적 이익을 체현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든 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노동자 국가’로 볼 수 없다.
441쪽
노동자들의 지배가 없으면, 계급 세력균형의 변화가 없으면, 국유화는 자본주의의 합리화나 기성 지배계급의 입지 강화를 의미할 뿐이다.
465~466쪽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이 “중간계급”이라고 부른 ‘다수’의 이익에 맞춰 지향을 바꿨다. 마오쩌둥이 “중간계급”을 대하는 태도는 마르크스가 독일의 ‘민주적 프티부르주아지’를 대하는 태도나 레닌이 러시아의 프티부르주아지를 대하는 태도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467쪽
마르크스주의가 타당하다면, 인간의 사상이 물질적 환경의 산물이라면, 마오쩌둥 사상은 독자적으로 중국을 개조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물질적 필요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를] 중국 사정에 맞춰 우연히 조정한 것, 즉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이 옳다면 사상이 유물론적으로 결정된다는 말은 거짓임이 틀림없다.
469쪽
우리는 한편으로는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국가와 혁명》과 마르크스의 《자본론》, 다른 한편으로는 10월 혁명 직후 볼셰비키가 구사한 전술들 사이의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저작에는 그런 연속성이 없다. 중국공산당의 행위를 이해하려 할 때, 마오쩌둥이 철학 영역에서 한 그리 대단치 않은 시도는 읽을 필요가 없으며 그 저작들이 마오쩌둥의 전술적 대응에 지침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사후의 편의적 합리화였을 뿐이다.
480쪽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교리로, 철학적 관념론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올바른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는 마오쩌둥하고만 함께 있었다. …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들을 사용해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다른 어떤 것, 마르크스주의와 모순되는 어떤 것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마오쩌둥 사상을 ‘수정주의’의 일종으로 여기는 것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
485쪽
마르크스주의는 고립되고 낙후한 중국에서 온전히 보전될 수 없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온전히 유지되려면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국제적 계급과 연결돼 있어야 했다. 중국에 한정돼 있고 중국 안에서조차 그 기반이라고 하는 중국 노동자들과 동떨어져 있는 마르크스주의는 ‘허위의식’, 즉 미사여구로 표현되는 것과는 다른 [진짜] 목적을 숨기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