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은 항상 인류의 기원과 사회제도의 기원에 대한 논의와 뒤얽혀 있다.
8쪽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류를 자연적·생물학적 세계의 산물로, 역사를 자연사의 일부로 봤다. 그러나 또한 인간의 특수한 성격이, 자신들을 만들어 온 환경에 반작용하고 이 과정에서 환경과 인간 자신을 모두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봤다.
15쪽
다윈은 두뇌 크기와 지능의 성장이 두 발 보행으로의 이행과 손을 사용한 도구 제작 이전에 일어났다고 추측했다. 엥겔스는 일련의 사건들이 반대의 순서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바로 손이 자유로워진 덕분에, 유인원들 사이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로 협력적 노동이 가능해졌으며 이로부터 두뇌의 발전이 나왔다는 것이다.
24쪽
우리의 유전적 “특별함”을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바로 뭔가에 특화되지 않고 본능적 행동이라는 제한된 범위에 전혀 속박받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43쪽
찰스 울프손이 말했듯이, … “엥겔스 이론의 대체적 개요는 현대의 연구로 대부분 확증되며, 이런 점에서 엥겔스의 글은 현재 인류 진화가 밟았을 경로로 생각되는 것에 대한 매우 훌륭한 과학적 예측이다.”
58쪽
다른 동물의 소리나 몸짓과 대조되는 인간 언어만의 구분되는 특징은 우리가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물과 상황을 언급하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62쪽
사실상 모든 학문 분과에서 언어와 의식의 발전을 물질적 실재의 발전에서 분리해 내려는 시도가 계속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과학을 위한 투쟁은 관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 이 양자(오늘날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이란 형태를 취하는 관념론과 사회생물학이라는 형태를 띠는 기계적 유물론)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62쪽
인간 진화의 이야기 속에는 아직 풀리지 않았거나, 증거가 부족해서 절대로 풀리지 않을 수도 있는 수많은 세세한 내용들이 있다. … 예를 들어, 유인원 집단 하나가 최초로 두 발 보행을 하게 된 이유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논쟁이 있다.
69쪽
“유인원이 인간이 되는 과정에서 노동이 한 역할”이 주류 사회과학에서 무시당했다면,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은 체계적으로 매도당했다.
83쪽
수렵·채집민 사이에 전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매우 드물었다(엥겔스가 이 부분에서는 틀렸다). 이따금 서로 다른 군집들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것이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84쪽
군집사회들의 ‘원시공산주의’적 특성을 이해하려면 그 사회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들여다봐야 한다.
86~87쪽
한 가지 중요한 세부 사항에서는 [엥겔스가] 틀린 듯하다. 즉, 그는 대부분의 수렵·채집 사회에서 혈통 집단이 한 역할을 과대평가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수렵·채집민들의 군집은 느슨하며 유연하다.
88쪽
그렇지만 평등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훨씬 더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나눔에 대한 강조, 강한 협동적 가치들, 군집의 유연한 구성은 현대 수렵·채집민 삶의 특징인 것과 마찬가지로, 수만 년 전 우리 선조들의 삶의 특징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가치는 유랑하는 수렵·채집민들의 삶에서 나온 욕구들과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103쪽
[초기 농경] 사회의 생존은 생산을 유지하는 가구들의 개별적 관심과 재생산을 보장하는 집단 안에서의 협력·이타주의·공유, 이 양자에 모두 의존한다. 그리고 이는 가구 자체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조건들이 생기게 될 경우, 그 가구는 더 넓은 사회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들에 저항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인의 이익 대 사회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양식의 한 요소의 욕구가 다른 요소들과 충돌하는 문제다.
104쪽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또 다른 변화가 존재한다. 처음으로 체계적인 전쟁 행위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부가 저장된다는 것은 다른 농경민 집단들로부터 부를 훔쳐 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22~123쪽
마을과 도시의 형성, 그리고 흔히 글쓰기의 발명으로 이어진 과정은 몇몇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시작했다. 일단 농업이 일정한 지점 이상으로 발전하면 사회의 내적 동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127쪽
계급 지배와 국가의 기원에 관한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지점들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왜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그리고 도시로 나아갔는가? 왜 그들은 지배계급의 등장을 받아들였는가? 왜 이 지배자들은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착취하게 됐나? 이것은 엥겔스가 충분히 대답하지 않은 질문들이다.
134~136쪽
계급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항상 주장했듯이 결핍에 직면한 사회에서 일어난 필연적 발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또한 주장했듯이, 한 계급이 일단 권력을 확립하게 되면 더 큰 전진은 이것에 맞선 투쟁에 달려 있게 된다. … 엥겔스가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의 말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계급들의 존재가 더는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존재가 오히려 생산에 직접적 장애가 되는 생산의 발전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150쪽
엥겔스의 최고 순간은 그가 여성 억압의 등장, 그의 식으로 말하면,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를 묘사하고 이를 계급사회의 등장과 관련시킬 때다. 그러나 이런 패배 이면에 놓인 기제들을 설명하려 할 때, 그의 주장은 이따금 우물쭈물한다. 그는 왜 새로운 계급사회에서 지배자가 필연적으로 남성인지 보여 주지 않는다.
152쪽
고든 차일드와 어니스틴 프리들은 … [여성 억압의 등장에 대해] 생산에서 여성의 역할과 역사 발전의 서로 다른 지점들에서 생물학이 한 역할을 강조한다.
156쪽
수렵·채집 사회와 초기 농업 사회에서는 여성이 재생산뿐 아니라 생산에서도 중심에 있다. 그러나 중농업[집약 농업]과 도시 혁명이 등장하고 “공동체” 혹은 “친족 공동체” 사회에서 계급사회로 이동하면서, 여성은 가장 큰 잉여를 생산하는 종류의 생산들에서 배제된다.
163쪽
엥겔스는 가부장적 가족의 등장과 관련된 과정들 일부를 설명하면서 잘못을 저질렀을지 모르지만, 이것을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단언하고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로 본 것, 단순한 “혁명”이 아니라 인류가 역사에서 “여태껏 경험한 가장 결정적인 혁명 중 하나”라고 본 것은 옳았다. 그 사회의 “살아 있는 구성원 한 사람도 건드릴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덧붙인 것도 옳았다.
164쪽
중요한 점은 계급사회 안에서조차 가족과 여성 억압의 성격에 변화가 있어 왔다는 엥겔스의 통찰이다. 이 모든 과정을 현대의 많은 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시도해 온 방식처럼 ‘가부장제’라는 단일한 범주 아래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167쪽
현 사회에서 여성은 모순적 상황에 처해 있다. 여성은 완전한 평등의 가능성을 볼 수 있으며, 그 결과 공동체적 생산이 파괴된 이래 유례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남성 지배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은 아이를 가지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 한, 여전히 이런 평등을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엥겔스가 단언한 것처럼, 아무리 많은 법이 제정되더라도 이런 고통스러운 모순을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법률 제정이 더 진전된 혁명적 변화의 필요성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환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