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엘리너 마르크스
2부 러시아 혁명의 위대한 혁명가들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3부 유럽의 혁명 물결에 헌신한 혁명가들
로자 룩셈부르크
안토니오 그람시
4부 흑인 평등권 운동 활동가들의 급진적 면모
맬컴 엑스
마틴 루서 킹
더 읽을거리
후주
자본주의 시스템은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위기에 빠져 재난 자체가 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계속되는 경제 위기, 기상이변과 전염병과 환경 파괴 같은 생태 위기, 강대국들의 경쟁 심화와 전쟁 같은 지정학 위기, 극우와 파시즘의 발호 같은 정치 위기.
가중되는 고통 속에서 아래로부터의 저항도 자라나고 있다. 그 저항 속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저항자들도 생기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한 책이다.
앞 세대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과 사상을 간결하고 쉽게 소개하는 이 책에서 독자들은 21세기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데 필요한 영감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부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엘리너 마르크스
2부 러시아 혁명의 위대한 혁명가들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3부 유럽의 혁명 물결에 헌신한 혁명가들
로자 룩셈부르크
안토니오 그람시
4부 흑인 평등권 운동 활동가들의 급진적 면모
맬컴 엑스
마틴 루서 킹
더 읽을거리
후주
글래스고대학교 라틴아메리카학과 명예교수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혁명의 현실성: 20세기 후반 프랑스, 칠레, 포르투갈, 이란, 폴란드의 교훈》(공저, 2011),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2005), 《벽을 그린 남자: 디에고 리베라》(2002)가 있다.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지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더럼대학교 지리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기후 위기, 불평등, 재앙: 마르크스주의적 대안》(공저, 2021)이 있다.
영국의 사회주의자이자 역사학자로 런던 미들섹스대학교 프랑스어학과 부교수였고 역사 저널 《레볼루셔너리 히스토리》 편집위원이었으며 ‘런던 사회주의 역사가 그룹’의 회원이었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는 《전후 공산당의 배신: 1943~1973년 공산당들은 어떻게 노동계급을 배신했는가?》(2025),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배신 1944~1985》(2020), 《혁명의 현실성: 20세기 후반 프랑스, 칠레, 포르투갈, 이란, 폴란드의 교훈》(공저, 2011)이 있다.
영국의 혁명적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편집자였고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편집위원이었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트랜스젠더 차별과 해방》(공저, 2018)이 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고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위원이다. 《크게 외쳐라: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과 마르크스주의(Say It Loud: Marxism and the Fight Against Racism)》(2013)의 공저자다.
영국의 혁명적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의 편집위원이었다.
영국의 교원노조 활동가이고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다.
영국의 혁명적 주간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였다. “그람시: 헤게모니와 혁명적 전략(Gramsci: Hegemony and Revolutionary Strategy)”(2007), 《민중의 스코틀랜드 역사(A People’s History of Scotland)》(2014), 《제2차세계대전: 마르크주의적 관점(The Second World War: A Marxist History)》(2014), 《카탈루냐 부활하다(Catalonia Reborn)》(공저, 2018) 등 여러 글과 책을 썼다.
영국의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이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다. 《크게 외쳐라: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과 마르크스주의(Say It Loud: Marxism and the Fight Against Racism)》(공저, 2013), 《스리랑카: 타밀족 해방을 위한 투쟁(Sri Lanka: The Struggle for Tamil Freedom)》(공저, 2009), 《임금 삭감, 경기 침체, 저항(Pay Cuts, Recession and Resistance)》(공저, 2008) 등 여러 글과 책을 썼다.
고려대학교 법대를 졸업했고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재난의 시대 21세기》, 《레닌 평전 2~4》, 《트로츠키 1927~1940》,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레닌과 21세기》 등 수십 종의 책을 번역했다.
1장 카를 마르크스
12쪽
마르크스의 생애 내내 그의 사상은 정치적·사회적 사건들의 경험과 상호작용하며 발전했다. 한 가지 사례가 숲에서 땔감을 모으는 농민의 전통적 권리가 폐지된 사건이었다.
58쪽
코뮌의 어떤 점이 새로웠을까?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서인 《프랑스 내전》은 당시 세대(그리고 후대)의 그런 물음에 답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고 … 노동자들의 경제적 해방을 이뤄 낼 정치형태가 드디어 발견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코뮌이 부르주아지의 지배 도구들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상비군이 시민군, 즉 “무장한 인민”으로 대체됐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기구들은 이제 직접민주주의로 대체됐다.
62쪽
“마르크스는 무엇보다 혁명가였습니다. 그의 진정한 임무는 어떻게든 자본주의 사회와 그로부터 생겨난 국가기구를 전복하고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에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 투쟁이 그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완강하게 투쟁했습니다.”(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조사)
2장 프리드리히 엥겔스
77쪽
엥겔스가 쓴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는 자본가계급의 부도덕성과 위선을 맹비난할 뿐 아니라, 경제체제의 내적 작동 방식에 대한 많은 통찰도 보여 주고 마르크스가 나중에 《자본론》에서 주장하게 되는 일부 내용도 예고한다. 예컨대, 엥겔스는 자본주의에서 부의 원천은 노동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110~111쪽
《자연 변증법》에서 정말로 통찰력 있는 부분으로서 두드러진 것은 엥겔스의 글 “유인원이 인간으로 진화하는 데서 노동이 한 구실”이다. 이 글에서 엥겔스는 역사유물론의 중심 전제 하나, 즉 우리는 노동하는 능력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또, 우리의 먼 조상들이 진화해 인간이 되는 과정을 노동이 용이하게 했다고도 주장했다. 엥겔스는 인간이 똑바로 서서 걷는 법을 터득한 덕분에 손이 자유로워지자 도구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도구를 사용하다 보니 큰 뇌를 발전시켰다고 추측했다.
129쪽
엥겔스의 용어 “사회적 살인”이 2017년 6월 런던의 그렌펠 타워 화재로 72명이 사망한 사건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것은 옳았다. 지방정부와 건물 관리 회사가 안전 문제를 무시한 결과로 일어난 참사였기 때문이다. 같은 책에서 엥겔스는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이 빈곤층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이것은 여전히 전 세계 도시들에서 사람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3장 엘리너 마르크스
136쪽
엘리너의 생애를 다룬 많은 전기는 흔히 그녀의 힘들었던 사생활과 비극적 자살에 초점을 맞춘다. 엘리너의 생애와 그녀가 남긴 유산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 엘리너 마르크스에게 제자리를 찾아 줘야 한다. 즉, 영국 노동조합운동의 성격을 바꿔 놨을 뿐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처지도 바꿔 놓은 강력한 노동자 운동의 한가운데로 돌려놔야 한다.
142쪽
당연히 파리는 노동하는 남성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파리코뮌을 위한 투쟁에서 여성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투쟁은 그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파리코뮌은 남녀 동일 임금을 도입했고, 이혼의 권리를 승인했으며, 여아 교육을 장려했다. 코뮌에는 여성 지도자가 많이 있었는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루이즈 미셸이었다. 미셸은 여성과 남성의 단결이 이로울 뿐 아니라 코뮌의 성공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파리코뮌의 여성들은 새로운 사회를 지키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싸웠다. 엘리너는 이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성들이 스스로 조건을 개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151~152쪽
엘리너와 에드워드 에이블링은 모두 사회민주연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새 조직이 분명한 사회주의적 강령을 채택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엘리너는 특별히 부지런해서 집행위원회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거리 집회와 시위도 조직했다. 사회민주연맹은 노동계급 사람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시중의 신문 가판대들이 사회민주연맹의 신문 <저스티스>(정의)를 판매하지 않으려 하자 회원들이 직접 거리에서 신문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173쪽
1889년은 신노동조합운동이 전면에 떠오른 해였고 엘리너 마르크스는 그 운동의 성공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운동은 가스 노동자들과 함께 시작됐다. 1889년에 맨 처음 일어난 중요한 노동쟁의는 3월 런던의 이스트햄에 있는 벡턴 가스 공장에서 벌어진 투쟁이었다.
4장 블라디미르 레닌
197쪽
레닌의 생애에서 핵심 주제는 조직의 필요성이었다. 조직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매우 달랐다. 따라서 신화적인 ‘레닌주의 당’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의 저작은 비법들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니고, 가장 훌륭한 레닌주의자는 레닌의 말을 가장 많이 인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레닌의 경험과 업적을 분석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방법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따라서 우리 자신의 투쟁에 필요한 조직 형태를 더 쉽게 발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213쪽
레닌은 [1차세계대전에서] “차르 왕정의 패배가 … 차악(次惡)이라는 사실”을 러시아 노동자들이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계급이 민족[국민]보다 더 중요하다. 즉, 사회주의자들의 주요 목표는 자국 지배계급을 공격하는 것이어야 한다. 레닌과 같은 시대를 산 독일의 반전 사회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말처럼, “주적은 국내에 있다.”
221~222쪽
레닌에게 이론과 실천은 항상 연관돼 있었다. 사상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이를 지침으로 삼지 않는다면 아무리 열정적인 행동도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만다.
239쪽
레닌은 격렬하게 논쟁할 줄도 알았지만, 운동에서 배울 줄도 알았다. 프랑스 신디컬리스트인 알프레드 로스메르가 레닌을 처음 만났을 때, 레닌은 프랑스 혁명가들이 사회당에서 즉시 분열해서 새로 공산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로스메르는 몇 달 더 기다리며 다수를 설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레닌에게 설명했다. 레닌은 즉시 “제가 어리석은 짓을 할 뻔했군요” 하고 대답하며 자신의 글을 고쳤다. 레닌은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자신의 생각을 바꿀 줄 아는 지도자였다. 오늘날의 정치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실수를 인정하는 것을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긴다.
5장 레온 트로츠키
252쪽
21살의 트로츠키는 첫 유형지 시베리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살아 숨 쉬는 한 나는 미래를 위해 투쟁하리라.” 그 뒤 그는 20세기의 가장 놀라운 사건들을 겪으며 실제로 그렇게 투쟁했다.
283쪽
트로츠키와 레닌은 자본주의의 핵심 지역들 가운데 하나인 서유럽의 혁명이 국제 혁명의 미래를 보증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는 모두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억압받는 사람들의 반란이 중요하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1919년 트로츠키는 전선의 적군을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썼다. “파리와 런던으로 가는 길은 아프가니스탄의 도시들과 인도의 펀자브와 벵골을 지나야 한다.” 식민주의에 맞서 싸운 많은 투사들은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과 피억압 민족에 대한 볼셰비키의 진보적 정책에서 영감을 얻었다.
286쪽
공동전선은 트로츠키가 죽을 때까지 몇 번이고 살펴본 주제였다. 그는 독일 파시즘의 성장과 1930년대 프랑스·스페인의 상황을 다룬 저작들에서 공동전선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그 저작들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민중전선’ 전략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자유주의’ 자본가들의 이익에 종속시킨다며 반대했다.
305쪽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투쟁은 개인 간 투쟁이 아니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서로 다른 두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의 정치적 기반은 노동계급, 즉 10월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스탈린의 기반은 성장하는 관료 집단이었다.
309쪽
트로츠키의 위대한 공헌은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러시아에서 추방됐을 때조차 스탈린에 투항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계속 조직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벌인 그런 투쟁 덕분에 진정한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진정한 평등·해방·국제주의를 표방하는 전통 말이다.
6장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312쪽
콜론타이의 유산을 두고 논쟁도 벌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여성 차별은 남성 탓이므로 여성은 남성과 따로 조직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교차성이나 특권 이론 같은 최신 사상을 아주 일찍부터 주창한 선구자라고 생각한다. [여성]해방에 관한 콜론타이의 견해를 보면 이런 사상의 지지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콜론타이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혁명가였다.
315쪽
콜론타이가 블라디미르 콜론타이라는 기술자를 연인으로 선택하자 그녀의 부모는 탐탁지 않게 여기고 둘 사이를 떼어 놓으려고 콜론타이에게 유럽 여행을 다니게 했다. 그녀는 파리의 서점에서 우연히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과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접했다.
334~335쪽
콜론타이는 또, 여성 차별이 남성 탓이라는 생각도 비판했다.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주적으로 여긴다. …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태도는 다르다. 그들은 남성을 적이나 억압자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날마다 힘들고 지겨운 일을 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는 동지로 여긴다.”
341~342쪽
“부르주아 도덕은 전적으로 사유재산에 바탕을 둔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가족을 통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완전히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주도면밀하게 발전시켰다. …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비밀을 모두 알 권리를 요구한다. … 우리는 사랑의 가장 간단한 규칙, 즉 상대방을 아주 사려 깊게 대해야 한다는 규칙조차 따르지 못한다.”
346쪽
레닌은 콜론타이를 격려해서 《누구에게 전쟁이 필요한가?》라는 소책자를 쓰도록 했다. 그 소책자는 수백만 부가 출판됐고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됐으며 군대에도 배포됐다. … “평화를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쟁을 일으킨 범인들을 지목하는 것이다. 차르와 카이저 같은 자들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범인이겠는가? … 우리의 적은 우리나라 안에 있고, 이 적은 전 세계 모든 노동자의 적이기도 하다. 그 적은 자본주의이고, 탐욕스럽고 부패한 계급의 정부이다.”
374쪽
콜론타이가 외교관 직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어쩌면 혁명 러시아의 고립과 퇴보를 반영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녀가 러시아 혁명으로 여성들이 얻은 성과를 지키려는 투쟁에서 손을 뗀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성과를 스탈린이 체계적으로 청산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 말이다.
7장 로자 룩셈부르크
402쪽
베른슈타인은 개혁을 위한 투쟁과 혁명을 위한 투쟁을 대립시키지만, 룩셈부르크는 둘의 통일을 주장한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혁명으로 건너가는 다리라는 것이다.
406~407쪽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견해 차이는 나중에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매우 존중했고 혁명적 정치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했다. 조직 문제에 관한 견해가 달랐던 이유 하나는 독일과 러시아의 상황이 서로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 룩셈부르크 자신도 중앙집중적 조직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룩셈부르크가 죽을 때까지 주요 이론가로 활동한)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사회민주당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불법 상황에서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된 당이었다.
433쪽
“제국주의가 승리해서 모든 문화가 파괴되고, 고대 로마가 그랬듯이 인구가 급감하고 도시가 황폐해지고 사회가 퇴보해서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가 승리할 것인가, 즉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방식과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적 투쟁이 승리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이것은 세계사의 딜레마, 세계사의 필연적 선택이다. 세계사는 프롤레타리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그 결정 여하에 따라 세계사의 방향이 바뀔 것이다.”
445~447쪽
에베르트와 노스케는 자유군단을 동원해서 무력으로 베를린을 탈환했다. 그 뒤 사흘 동안 그들은 학살과 테러를 자행하며, 수많은 노동자를 살해했다. 반혁명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 마침내 자유군단이 룩셈부르크를 은신처에서 끌어내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살해한 뒤 룩셈부르크의 시체를 운하에 던져 넣었다. … 자유군단은 나중에 히틀러의 거리 부대로 성장했다.
8장 안토니오 그람시
468쪽
노동자 권력을 위한 공장평의회 건설은 정치 비평 주간신문 <오르디네 누오보>(새 질서)의 핵심 메시지가 됐다. <오르디네 누오보>는 1919년 5월 그람시가 한 무리의 동지들과 함께 발행하기 시작한 신문이었다. 그 신문은 토리노의 많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람시는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의 경구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가져다가 <오르디네 누오보>의 지침으로 삼았다.
488쪽
1924~1926년에 그람시는 공산당의 실질적 지도자가 됐다. 그래서 당을 재무장시키고 보르디가의 종파주의적 노선과 단절하게 할 수 있었다. 1926년 1월 그람시는 팔미로 톨리아티와 함께 “리옹 테제”를 작성했다. 그것은 그람시의 가장 원숙한 정치 문서였고, 당을 재무장시키고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게 만들 지침이었다.
492쪽
그람시는 혁명을 거부하기는커녕 어떻게 서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주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면서 참을성이라는 혁명적 미덕을 강조했다. 그람시가 볼 때 무장봉기는 여전히 “투쟁의 결정적 순간”이었고, 그가 말한 “현대 군주”(혁명적 정당)는 [투쟁을] 조정하고 보편화하는 중앙집중적 기구였다.
495쪽
그람시는 대중의 의식 속에 갖가지 현대적·진보적 사상과 끔찍한 반동적 사상이 섞여 있다고 설명했다. 똑같은 노동자가 온갖 인종차별·여성차별 관념을 드러내는 “걸어 다니는 화석, 시대착오적 인물”임과 동시에, 결코 피켓라인을 넘지 않는 충실한 노동조합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생각 속에는 “석기시대의 요소와 더 발전한 과학의 원리, 특정 지역의 과거 역사 전체에서 물려받은 편견과 전 세계적으로 통일된 인류의 자산이 될 미래 철학의 직관이 섞여 있다.”
9장 맬컴 엑스
519쪽
어느 날 역사 수업 시간에 희망하는 장래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맬컴이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선생님이 놀라워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실을 직시해야지. 깜둥이에게 변호사는 결코 현실적 목표가 아니야.”
535쪽
맬컴은 비폭력 전술을 비판하고 [흑인의] 자기 방어권을 지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화를 사랑하고, 공손하게 행동하고, 법을 지키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시오. 그러나 누가 여러분에게 손찌검을 한다면, 그를 골로 보내 버리시오.”
551쪽
반식민지 투쟁의 영향을 받고 있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맬컴은 인종차별에 맞서 어떻게 싸울지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남의 불행을 이용해 먹지 않으면 작동할 수 없습니다. 자본가가 되려면 남의 피를 빨아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가는 바로 흡혈귀 같은 사람입니다.”
565쪽
맬컴은 최고 절정기에 죽었다. 이슬람민족을 탈퇴한 후 암살당할 때까지 11개월 사이에 그는 이미 국제주의와 체제 변혁 사상을 받아들였고 분리주의를 거부했다. 그는 사상이 변할 수 있다는 것, 혁명가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우리가 국가에 도전할 때 국가는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10장 마틴 루서 킹
576~577쪽
킹이 흑인 평등권 운동에 뛰어들었을 때 그는 행동할 태세가 돼 있는 완성된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실 몽고메리 시절 초기[1954~1955년]에는 심지어 자신을 지도자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투쟁 경험 덕분에 그는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주제, 특히 경제·사회 체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문제 삼고 바꿀 수 있었다.
600~601쪽
마틴 루서 킹이 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옳게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로 꼽힌다. 주류 언론은 항상 킹이 미래를 묘사한 말, 즉 아이들이 인종차별의 장벽 없이 즐겁게 살아갈 미래를 꿈꾼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킹의 연설에는 권력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구절들도 있었(고 그 구절들은 계속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후 100년이 지났건만, 흑인들은 여전히 인종격리정책의 족쇄와 인종차별의 사슬에 매여 불행히도 발을 절름거립니다. 100년이 지났건만, 흑인들은 엄청난 물질적 풍요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빈곤의 섬에 고립된 채 살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났건만, 흑인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괴로워하고 자기 땅에서 망명객처럼 살고 있습니다.”
609쪽
사회불안을 대하는 킹의 태도에는 모순이 있었다. 그는 흑인 빈민가 주민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그래서 흑인 폭동을 “무시당한 자들의 언어”로 묘사하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자신을 후원하는 [백인] 자유주의자들을 의식해서, 폭동을 “범죄 행위”라고 부르고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에 공동 서명하기도 했다.
616쪽
흔히 평론가들은 맬컴과 마틴이 서로 정반대인 양 묘사한다. 킹은 자유주의자였고 폭력을 반대했으며 [흑백] 통합을 지지한 반면, 맬컴은 급진주의자였고 폭력을 지지했으며 통합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이분법은 심지어 많은 좌파의 사고방식도 지배하고 있지만, 그렇게만 보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정치적 여정 중간에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두 사람 모두 인종차별이 사라진 미래를 기대했다. 두 사람 모두 자본주의를 끝장내지 않고는 인종차별도 끝장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620쪽
이미 그는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킹이 작심하고 미국의 베트남전쟁 확대를 반대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고 나서자 백인 자유주의자들과 오랜 지지자들 모두 충격에 빠졌다. … 킹은 “침묵이 곧 배신을 의미하는” 때가 온다는 말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시작해서 베트남전쟁을 지지하는 주장을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종차별주의, 극단적 물질(만능)주의, 군국주의, 이 거대한 세 쌍둥이”를 끝장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