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세계사 A People's History of the World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2004-11-15 896쪽 24,000원 신국판 양장본 9788979660364 03300 책갈피 대학생 서평대회 2009년, 2011년 추천 도서
민주노총 교육원 추천 교재

최초로 인류가 생겨난 후 지금까지 인류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이러한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변해왔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민중의 세계사≫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한 책이다. 즉 인류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21세기가 시작하기 바로 전인 1999년까지의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세상이 변해온 것을 설명하는 책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이 대부분 왕․황제․장군․총리나 인류의 발명품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의 세계사≫는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인류의 역사를 사회 밑바닥 인민 대중의 일상적 투쟁과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영웅주의가 어떻게 해서 거듭거듭 사회를 변화시켰는지도 보여 준다. 또한 칼 마르크스가 요약한 방법으로 역사를 설명함으로써 복잡하고 혼란한 사건들에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질서를 부여해 인류 역사를 쉽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또한 그리고 이런 변화를 이해함으로써 세상을 바꾸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책이 있었지만 마르크스주의로 세계사 전체를 이렇게 풍부하게 다룬 책은 ≪민중의 세계사≫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본문 중에서

아프리카를 야만적이고 문명이나 역사가 없는 암흑의 대륙이라고 부르는 것은 올바른가?

…… 인도 상인, 무슬림 제국 상인, 심지어 중국 상인들까지 아프리카 동부 연안에 있는 모잠비크 이북의 모든 도시들과 왕래했다. 그런 상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븐 바투타는 1331년에 오늘날의 탄자니아에 있는 킬와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건축된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했다. 레오 아프리카누스라는 이탈리아식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그라나다 출신의 무어인 망명자 하산 알 와잔은 15세기 초에 모로코에서 출발해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동안 니제르 강을 따라 세워져 있던 약 열두 개의 왕국을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탐보(통북투) 시에 수천 명이 거주했으며 “많은 행정관, 학식 있는 의사들, 종교인들”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베르베르인들이 세운 나라들에서 수입한 필사본 책이 매우 잘 팔린다. 다른 어떤 물품보다도 책을 파는 게 가장 많은 수익을 남긴다.”

…… 훨씬 뒤에 시작된 철 생산도 독자적으로 시작됐다.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철기에 관한 지식이 유라시아 전역에 퍼지고 있던 시기에 서아프리카의 대장장이들도 철광석을 녹이는 법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한 기술은 조금 달랐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철기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이집트 문명, 누비아 문명, 에티오피아 문명이 차례로 탄생했다. 때때로 소위 ‘미개인’들로 이루어진 무계급 사회들이 문명과 문명 사이에 산재해 있기는 했지만, 15세기에 문명은 서해 연안에서 동해 연안까지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존재했다. 아프리카 문명들은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하기 훨씬 전부터 이슬람을 통해 세계적인 무역망과 연결돼 있었다.(심지어 고대 짐바브웨의 몰락은 짐바브웨가 수출하던 금 가격이 15세기에 세계적으로 하락했던 탓이라는 설명도 있다.)(pp. 190~193)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은 콜럼버스인가?

콜 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1만 4천 년 전에 시베리아에서 알래스카로 가기 위해 베링 해협을 건넌 ‘인디언들’은 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심지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도 아니었다. 바이킹족은 콜럼버스보다 5백 년 전에 북아메리카의 북동 연안에 잠시나마 머무른 적이 있다.(p. 236)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인종 차별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고 대나 중세 시대 사람들은 피부색이 이를테면 키나 머리색, 또는 눈동자의 색보다 더 의미 있는 어떤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 있는 그림들에는 옅은 색, 갈색, 검은색 피부를 가진 인물들이 무작위로 섞여 있다. 로마 역사에서는 적어도 한 명의 황제를 포함해 많은 중요 인물이 북아프리카 출신이었는데, 그 어떤 문헌도 그들의 피부가 흰색이었는지 아니면 검은색이었는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16세기 초에 그려진 네덜란드의 그림들도 흑인과 백인이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을 보여 준다. 예컨대 요르단스의 그림 <모세와 십보라>는 모세의 아내를 흑인으로 그리고 있다.

……초기의 노예 상인들과 노예 소유주들은 인종의 차이를 근거로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전쟁이나 적어도 ‘정의로운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힌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했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문헌들에 의존했다. ……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자 이 낡은 변명은 대서양의 노예 경제 규모에 적합하지 않게 됐다. 그 많은 노예들이 모두 ‘정의로운 전쟁’의 포로들이라고 주장하기는 힘들었다. 사람들은 노예가 아프리카의 상인들한테서 사온 사람들이거나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노예 상인들과 소유주들은 노예를 소유하지 않은 압도 다수의 백인들에게 먹혀들 수 있는 주장이 늘 필요했다. ……상인들과 소유주들에게는 사람들이 노예를 경멸하고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방법이 필요했다. ‘전쟁 포로’ 논리로는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반면, 아프리카인 혈통이 유럽인 혈통보다 천부적으로 열등하다는 생각은 상인들과 대농장주들의 필요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노예제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중 한 명인 함의 후손의 운명에 관한 언급에서 정당화의 근거를 발견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의 “인간 이하의 야만적 습성”을 들먹이는 이른바 ‘과학적’ 정당화 시도도 있었다. 예컨대 1774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롱의 ≪자메이카의 역사≫라는 책이 그러했다. ……

인종 차별은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를 갖춘 이데올로기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 3백 년에 걸쳐 발전했다. …… 인종 차별은 아프리카 노예제에 대한 변명에서 한층 더 발전해 지구의 모든 사람을 ‘흰색’, ‘검은색’, ‘갈색’, ‘붉은색’, ‘노란색’으로 끼워 맞출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성숙했다. 비록 많은 유럽인들의 피부가 연분홍이고,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갈색이며, 많은 남아시아 출신 사람들의 피부색이 유럽인들 못지않게 옅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피부는 분명히 붉은색이 아니며, 중국인과 일본인은 전혀 노랗지 않는데도 말이다!(pp. 330~332)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피에 굶주린 괴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사실일까?

서 로 경쟁하는 이 집단들은 각자 자신들이 부딪힌 문제들의 해결책이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의 북쪽 국경선 너머에 집결한 외국 군대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국왕은 전쟁이 벌어지면 외국 군대가 승리할 것이고 결국 외국군이 자신의 권력을 완전히 회복시켜 줄 것이라 생각했다. 라파예트는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가 사실상의 독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롱드파는 열광적인 민족주의의 물결에서 자신들이 이득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가나 통속 소설가들이 너무나 자주 피에 굶주린 괴물로 묘사하는 로베스피에르가 전쟁을 가장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전쟁이 반혁명에 이르는 문을 열어젖힐 것이라고 자코뱅 클럽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지롱드파가 국왕과 합의해서 정부를 구성한 다음 1792년 4월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p. 367)

……감옥이 혁명의 적들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일단 자신들의 음모가 성공하면 풀려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자코뱅파의 한 쪽 극단에서 ‘공포정치가’ 에베르 같은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주류 자코뱅파 지도자들은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냉혹한 학살자’라는 신화와는 사뭇 다르게,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초기에 사형제 폐지를 요구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반면, 지롱드파는 하층 계급 출신의 평범한 ‘죄수들’을 사형하는 것은 찬성했지만 국왕을 처형하는 문제는 망설였다.(p. 381)

유럽이 아닌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일본만이 자본주의 발전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가 됐는데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 본의 기술, 문자, 문학, 그리고 주요 종교 중 하나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일본은 중국과 달랐다. 일본은 중국의 대운하와 관개 수로 같은 것도 없었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도 아니었다. 1600년 무렵까지 일본의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는 중세 유럽의 체제와 매우 비슷했다. 천황은 허약했고 실제 권력은 지방 영주들에게 있었는데, 영주들은 저마다 사무라이(중세 유럽의 기사들과 대체로 비슷한)를 데리고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농민을 직접 착취하고 자신이 모시는 영주의 군대에 소속돼 다른 영주의 사무라이들과 싸웠다.

17세기 초에 영주 가문 가운데 하나인 도쿠가와 가문이 나머지 영주들을 굴복시켰다. 도쿠가와 가문의 수장은 ‘쇼군’, 즉 국가의 실질적 통치자가 됐다. ……

영 주들과 그 가족들이 에도에 모여 살게 되자 그들과 가신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곡물 거래가 급증했고, 그들의 수요에 맞춰 도시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이 급증했다. 일본의 몇몇 도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들의 반열에 오를 만큼 성장했다. 공식적으로는 매우 낮은 신분인 상인 계급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고, 대중적인 시와 연극과 소설이 등장하는 등 새로운 도시 문화가 싹텄다. …… 지방에서는 농민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의 정치적 상부구조는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서유럽에서 탄생했던 사회 세력과 비슷한 성격의 사회 세력이 태동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1853년에 미국 해군의 페리 제독이 4척의 전함을 이끌고 일본 해안에 도착해 일본 정부에게 대외 무역 개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일본 사회의 모든 지배층이 혼란에 빠졌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쌍방의 무기 수준을 비교한 다음, 더는 옛날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 일부 사무라이들은 ‘야만인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대항하려면 일본 사회가 철저히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마침내 이 사무라이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1860년대 후반에 두 명의 봉건 영주가 사무라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도쿠가와 쇼군을 타도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메이지유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 그들은 봉건 영주들의 권력을 박탈함으로써 영주들의 특권을 국가에 종속시켰다. 또한 사무라이․농민․상인․장인 사이의 낡은 신분 차별도 없앴다. 사무라이가 농민을 착취해 얻은 소득은 이제 곧바로 국가에 귀속됐다. 최저 생계수준 이상의 소득을 원하는 사무라이는 국가에 고용되거나 사기업에 취직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직접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고 관리했으며 세금 수입에서 보조금을 지급했다는 것이다. 산업들이 제 발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가와 긴밀히 유착해 있는 상인 가문이나 금융 가문에 산업을 넘겨줬다.

메이지유신은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두 가지 면에서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메이지유신은 본격적인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개척을 주도하는 세력이 반드시 부르주아지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줬다. ‘중간 부류’들이 영국 혁명에서 성취했던 것이나 자코뱅파 ‘부르주아지’가 프랑스 혁명에서 성취했던 것을 일본에서는 옛 착취 계급의 한 부문이 자력으로 해냈던 것이다.

또 한 메이지유신은 자본가 계급이 아직 출현하지 않은 곳에서는 국가가 산업을 육성하고 새로운 자본주의식 노동 형태를 강제하는 등 자본가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음을 보여 줬다. 일본에서는 국가가 근대적 공장에서 임금 노동을 착취해 산업의 기초를 다진 뒤에야 비로소 성숙한 산업 자본가 계급이 등장했다. 20세기 들어 세계 각국의 자본주의가 발전한 경로는 대체로 영국이나 프랑스의 모델보다는 일본식 모델에 가깝다.

한편, 신생 일본 자본주의는 메이지유신 이후 27년 만에 중국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힘을 과시했다. 일본은 이제 외세 침략의 피해자 신세에서 벗어나 압제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pp. 469~472)

제2차세계대전의 성격은 민주주의 세력이 파시즘에 맞선 진보적인 전쟁이었나?

유 럽과 북아메리카의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은 제2차세계대전을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전쟁이라고 봤다. …… 그것은 오늘날에도 정설로 통한다. 그래서 예컨대 에릭 홉스봄은 20세기 역사를 다룬 그의 책에서 제2차세계대전을 “19세기였다면 ‘진보와 반동’이라고 불렸을 나라들 사이의” 전쟁이었다고 정의하기도 했다.238

그러나 연합군 지도자들을 움직인 동기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전범의 가차없는 기소를 주장한 처칠은 잔혹한 옴두르만 학살을 진두 지휘했고, 1910년에 군대를 보내 파업 중이던 광부들을 쏴 죽였고, 영국령 이라크 내 쿠르드 반군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하라는 명령을 영국 공군에 내렸으며, 무솔리니를 찬양하기도 했다. ……

이 른바 ‘반파시즘’ 연합에 참여한 세계 제2의 강대국 지도자 스탈린도 처칠보다 더 민주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지 않았다. …… 1939년에는 히틀러와 뒷거래를 해서 폴란드를 나눠 가졌고 …… 히틀러와의 거래에는 러시아로 망명한 독일 공산당원들을 게슈타포에 넘겨주고 독일에 전쟁 물자를 제공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도에 관한 첩보원들과 베를린 대사관의 경고를 무시하더니 결국 1941년 6월에 독일군이 쳐들어오자 그때서야 참전했다. 전쟁 초기 몇 주 동안의 참패에 경악한 스탈린은 1917년 이전의 대러시아 국수주의 이데올로기로 회귀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다. ……

제3의 ‘반파시스트’ 지도자는 루스벨트였다. 참전하기 전 미국 행정부는 유럽의 혼란을 기회 삼아 공식적인 유럽 제국들을 압도할 만한 ‘비공식적’ 미국 제국을 건설하려는 정책을 추구해왔다. ……

미 국이 참전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극동 지역에서 벌어진 식민 제국들 간의 분쟁이었다.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다른 식민 열강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제국을 확장하는 데 열심이던 일본이 중국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남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은 미국대로 그 지역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다. 미국은 필리핀을 통치하고 있었고, 일본과 겨루면서 중국 서부에서 여전히 건재하던 장제스를 미국 자본에 우호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일본과 세력권을 나눠보려던 뒷거래가 무산되자, 미국은 일본에게 절실히 필요한 자원의 공급로를 차단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프랑스․네덜란드․영국 식민지를 손에 넣으러 남진하는 것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이던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그에 응수했다.

…… 1940년 봄에 프랑스가 함락당한 때부터 1943년에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할 때까지 영국군은 주로 아프리카 북부에서 전투를 벌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수에즈 운하와 유전들이 있는 그 지역을 고수하려 한 처칠의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놓고 루스벨트와 격렬한 외교전을 벌인 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처칠은 독일뿐 아니라 미국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세 강대국 모두 히틀러가 독일을 계속 지배하도록 거들었다. 세 나라 모두 비단 나치당뿐 아니라 독일인 전체를 적으로 대했다. 영국인 고위 공무원 밴시터트는 독일의 모든 산업 시설을 파괴해 독일을 가난한 농업국으로 되돌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 그 결과 함부르크, 쾰른, 드레스덴 등지에서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폭격에 따른 대화재로 타죽거나 질식사했다. 드레스덴은 군사적․전략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도시였다. 소련에서는 소설가 일리야 에렌부르크가 방송을 통해 “독일인을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하고 선동했다.(pp.664~669)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경제적 필요나 대중의 분노를 희생양 삼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필요 때문인가?

나 치[는] …… 유럽의 유대인과 집시 인구를 비밀리에 완전히 멸종시키려 들었다. 특수부대인 SS무장기동대의 파견대들은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살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독일군 사령관들이 여전히 신속한 승리를 기대하고 있는 가운데 키에프 근교의 바비야르 협곡에서 SS가 4만 3천 명을 학살한 것이 그 두드러진 사례다. 학살 계획은 나치당과 국가의 주요 인물 14인이 한자리에 모인 1942년 1월의 반제(Wannsee) 회담에서 공식화됐다. 그들은 마치 공장 조립라인처럼 정교한 학살 장치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든 전쟁 수행상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든, 그런 정책은 독일 자본주의의 요구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살해당한 이들 상당수가 이윤 창출이나 전시 경제에 이바지할 만한 숙련 노동자들이거나 전문가들이었다. 수백만 명을 유럽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옮기느라 철도가 미어터졌고, 군대와 무기와 공업용 원자재 등을 나르는 데 꼭 필요한 열차들이 그 일에 동원됐다. 관료들은 이송 계획을 짜느라고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 일은 하루 또 하루, 한 주 또 한 주, 전쟁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계속됐다.

독일 국민 대중의 분노를 희생양 쪽으로 돌린다는 조잡한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것은 전혀 의미 없는 정책이었다. 독일 국민 대중은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밀작전이었다. 독일 국민 중에서 적어도 수천 명은 틀림없이 대학살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많은 다수의 사람들은 뭔가 불쾌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의심하면서도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 했다. 그런 판국에 그것이 정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나치 지도자들은 독일 사회에 널리 퍼진 반유대주의의 활용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 나치당이 권력을 잡고서 반유대주의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견해들의 표현을 억압한 뒤에도, 나치 지도자들은 실업 감소나 베르사유 조약 파기, 그리고 히틀러를 국제적인 인물로 포장하는 데 초점을 맞출 때에 더 환영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는 나치당의 핵심이던 돌격대와 친위대를 결속하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서 그들이 수동적으로 움직이거나 보수주의에 빠지거나 타성에 젖는 것을 막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들로 하여금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좌파 세력과 맞서게 하고, 제3제국 수립 이후에는 히틀러의 명령을 즉각 실행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 비이성적인 이데올로기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독일에 닥친 모든 불행의 배후에 있는 궁극의 적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유대인 제거야말로 독일군이 동진하면서 점령한 영토를 보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봤다. 그래서 패전이 임박한 1944년 말과 1945년 초에도 유대인 학살은 일종의 승리로 여겨질 수 있었다.

1930년대 초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독일 지배 계급은 그처럼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자들이 필요했다. 그들의 광기에 힘입어 독일 지배 계급은 노동 계급 조직들을 분쇄한 데 이어 유럽 제패를 계속해서 추구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치당은 6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집시․불구자를 학살하는 것을 통해 그들의 광기에 찬 환상을 마음껏 표출했다.(pp. 672~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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