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25일의 봉기
전선의 참호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 파견된 대표단은 위협적으로 선언했다.
“이런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병사들은 당신들이 당장 진지한 자세로 평화안을 내놓지 않으면 모두 참호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우리에게 위임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만약 당신들이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면 우리가 알아서 무력으로 적을 쫓아낼 것이며 당신들도 적과 함께 쫓겨날 것이다!”
트로츠키의 설명에서 드러나듯이, 전선의 분위기는 이런 상태였다. …
소비에트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요새였던 소비에트는 이제 볼셰비키화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새로운 다수파가 됐다. 8월 31일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9월 6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에 제출한 결의안이 처음으로 다수표를 얻었다. 9월 8일에는 두 도시 소비에트에서 멘셰비키-사회혁명당 집행부가 물러났다. 9월 25일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됐다. 노긴은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됐다. 9월 20일 타슈켄트에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았다. 임시정부의 군대가 이 소비에트를 진압했다. 9월 27일 레발 지역의 소비에트는 원칙적으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할 것”을 결의했다. 10월 혁명 며칠 전에 케렌스키의 ‘민주적’ 포병부대는 칼루가에서 혁명적 소비에트에 폭탄을 퍼부었다. …
소비에트가 안토노프-오프세옌코, 포드보이스키, 추드노프스키를 지도부로 한 군사혁명위원회를 신설한 10월 16일부터 두 권력, 즉 케렌스키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는 새롭고 더 날카로운 충돌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제 적위대의 총참모부 기능을 하면서, 모든 부대에 정규 지휘부의 명령을 무시하라고 지시했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봉기는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두 권력은 각자 나름대로 조처를 취했고, 두 군사 당국은 각자 상대방의 명령을 고의로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
군중은 트로츠키의 연설에 열광했다. 존 리드는 이 집회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듯했다. 저절로 찬송가라도 튀어나올 판이었다.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투쟁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 결의문에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무수한 군중이 마치 한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 나는 남자들, 여자들, 청년들, 노동자들, 병사들, 농민들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빛을 보았다. 트로츠키의 연설이 이어졌다. 군중은 치켜든 손을 내릴 줄 몰랐다. 트로츠키는 말했다. ‘이 결의를 여러분의 맹세로 만드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힘을 바칠 것이며, 어떤 희생도 주저하지 않고 소비에트를 지지하십시오. 소비에트는 혁명을 이룰 것이고, 여러분에게 토지와 빵, 평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군중은 여전히 손을 들고 있었다. 찬성하고, 맹세했다. …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같은 장면이 되풀이됐다. 모든 곳에서 마지막 준비가 끝났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마지막 맹세를 했다. 몇 천, 몇 만, 몇 십만 명이 그랬다. 그것은 봉기였다.” …
10월 25일 아침 크론시타트에 주둔하고 있던 혁명군은 소비에트를 방어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든 공격은 공식적으로는 방어를 명분으로 실시됐다.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연대들과 적위대는 케렌스키 정부의 각 부처가 들어서 있던 동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6시에 최초로 각료들에게 항복 권고가 전달됐다. 8시에는 두 번째 최후통첩이 전해졌다. 휴전 깃발을 든 볼셰비키 선동가가 궁전 경비대를 향해 연설했고, 돌격대 소속 병사들이 혁명군 쪽으로 넘어왔다. 이들을 환영하는 만세 소리가 이제는 전장이 돼 버린 광장 위로 울려 퍼졌다. 몇 분 뒤 여성대대가 항복했다. 몇 안 되는 사관생도들의 호위를 받으며 넓은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모여 있던 각료들은 공포에 휩싸였으면서도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충성스런 부대를 이끌고 금방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한 뒤 궁전을 나와 도망쳤다.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
군대는 무너지고,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중은 더는 싸우려 하지 않았다. 10월 봉기는 평화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운송 체계가 거의 무너졌고, 생산은 아주 낮았고, 식량 공급은 심각한 상태였다. 기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험했다. …
1917년 12월과 1918년 1월 사이 … 이 시기 각 진영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연합국: 미국이 전쟁에 참가할 때까지 버티기. 이를 위해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러시아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질질 끌어야 한다.
동맹국: 미국이 전쟁에 가담하기 전에 영국과 프랑스에 평화를 강요하기. 영국과 프랑스를 쳐부수는 데 모든 자원을 투입하려면 최대한 신속하게 러시아 전선에서 작전을 종결시켜야 한다.
혁명 러시아: 서로 싸우는 제국주의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기. 그리고 유럽에서 혁명적 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버티기. 당시 유럽의 위기에 관한 소식이 많이 유포되고 있었다. …
강화가 실현되면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철수할 수 있고, 이것은 독일 제국주의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혁명전쟁도 영국·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은 우리가 전쟁을 계속한다면 병사 1인당 매달 100루블씩 주겠다고 우리 최고사령관인 크릴렌코에게 아주 거만하게 제안했다. … 이런 상황에서 도출해야 하는 올바른 결론은, 사회주의 정부가 일국에서 승리하는 순간부터 그 정부가 문제를 보는 관점은 어느 제국주의를 지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사회주의 혁명을 강화·발전시킬 최상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부끄러운 강화’는 유럽 노동계급의 무기력 때문에 제국주의 세력에 둘러싸여 고립된 혁명 러시아 노동계급의 불가피한 첫 후퇴였다. 또한 이는 신생 소비에트 국가와 이를 둘러싼 제국주의 환경 사이의 첫 충돌이기도 했다. 이제 러시아혁명은 외톨이가 됐다. 살아남으려면 혁명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시간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당시 러시아혁명은 3개월 안에 패배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 3개월을 확보하는 것은 무한한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뜻했다. 유럽의 처지에서 보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첫 제국주의적 강화(이후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됐고, 뒤이어 베르사유 조약이 나왔다)였다. 이 강화는 패전국에 대포로 강요한 것이고, 공개적으로 영토 정복과 경제적 노예화라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었다.
외세의 개입
오스트리아·독일군은 핀란드와 발트해 연안 국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있었다. 터키군은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독립국’인 캅카스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바쿠를 점령했고, 루마니아군은 베사라비아를 접수했다. 4월 6일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혁명은 무력으로 포위됐다. 혁명은 군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군대는 완전히 무에서 창조돼야 했다. …
독일군을 ‘불러들였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곧바로 자신들이 ‘보호자’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독일군은 라다가 너무 급진적이어서 입맛에 맞지 않다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라다를 해산하고(키예프, 4월 26일) 의원들을 감금했고, 모든 출판물에 대해 사전 검열 제도를 도입했다. 그동안 ‘영농인대회’는 사령관의 호감을 사고 있던 러시아군 장성 스코로파츠키에게 최고권력자 칭호인 헤트만을 부여했다. 스코로파츠키는 우크라이나에 “평화, 법, 유익한 노동”을 확립하겠다며 개인 권력을 휘둘렀고, 의회 소집, 사적 소유권(이른바 “문화와 문명의 토대”) 재확립, 농업 개혁, 노동계급을 위한 농업 개혁과 농업 관련 입법을 발표했다. 그동안은 ‘임시 헌법’에 따라 헤트만에게 독재 권력이 부여됐다. 모든 토지는 대지주에게 환원되고 국가가 곡물을 징발할 것이라고 선포됐다. 노동자는 파업권과 결사권을 박탈당했다. 프티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농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러시아에 파견된 프랑스 군사사절단의 일원이었고 나중에 헌신적이고 진지한 혁명가로 활동하게 된 전직 프랑스군 장교 피에르 파스칼은 연합국의 작전 계획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야로슬라블의 반란과 체코군의 봉기는 프랑스 사절단의 대리인과 눌렁의 대리인이 직접 공모한 것이었다. 사절단은 체코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체코군에 장교와 자금을 지원했다. … 반혁명 세력들은 모스크바를 고립시켜 기아로 몰아넣으려고 야로슬라블, 니즈니노브고로드, 탐보프, 무롬, 보로네즈를 점령할 작정이었다. 야로슬라블, 무롬, 탐보프 등지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이 계획이 실행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나는 라베르뉴 장군이 모스크바 근방의 지도 위에 손가락으로 큰 원을 그리면서 ‘이것이 바로 눌렁이 바라는 바야. 그러나 우리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러시아에 무시무시한 기근이 닥칠 것이고, 그 때문에 나는 죄책감을 느끼게 될 거야’ 하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