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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그들의 윤리, 우리의 윤리 마르크스주의와 윤리 Their Morals and Ours: The class foundations of moral practice

레온 트로츠키, 존 듀이 외 지음 이수현 외 옮김 2020-11-20 184쪽 12,000원 신국판변형 9788979661972 책갈피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사망 80년을 맞아, 그의 명저 《그들의 윤리, 우리의 윤리》 개정판이 나왔다.

마르크스주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언제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실용주의)도 아니고, 언제나 목적과 수단이 일치해야 하는 것(이상주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 마르크스주의자가 사용해도 되는 수단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수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수단이 허용되고 어떤 수단이 불허되는 것일까? 그 기준은 무엇일까? 이 책은 이에 대한 트로츠키의 대답이다. 특히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놓고 트로츠키와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가 벌이는 논쟁은 이를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p 67~68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수단이 올바른지 아닌지는 오직 그 목적에 달려 있다. 그런데 목적도 정당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목적이 올바르려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강화하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폐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허용된다고 생각하란 말인가?” 속물들은 냉소적으로 다그치며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우리의 대답은 진실로 인간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허용된다는 것이다. …

도덕주의자들은 그치지 않고 주장한다. “자본가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에서는 모든 수단, 즉 속임수·날조·배신·살인 등이 허용된다는 뜻이 아닌가?”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결속하고, 그들의 마음을 억압에 대한 화해할 수 없는 적개심으로 채우며, 기성 도덕과 그것을 옹호하는 민주주의자들을 경멸하도록 가르치고,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도록 격려하며, 투쟁 속에서 용기와 자기희생 정신을 발휘하도록 북돋는 수단, 오로지 그런 수단만이 허용되고 필수적이다. 바로 여기서 모든 수단이 허용되는 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우리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할 때,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혁명적 목적은 노동계급의 한 부분과 다른 부분을 반목케 하거나, 대중이 스스로 참여하지 않고 안주하게 만들려 하거나, 대중의 자신감과 자기 조직에 대한 믿음을 떨어뜨리고 이를 ‘지도자’ 숭배로 대체하는 비열한 수단과 방법은 거부한다.

 

p 110~111 마르크스주의 윤리관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마르크스주의 윤리 이론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궁극적으로 자신의 계급 지위의 토대가 되는 실천적 관계(생산하고 교환하는 경제적 관계)에서 윤리관을 끌어낸다.” 부족 생활의 윤리는 그 근본적 가치들이 문명사회의 윤리와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둘의 생산관계와 소유 형태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도둑질하지 말라거나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은, 생산도구나 재생산 주체를 사유재산 취급하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원시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엥겔스는 오늘날 널리 퍼진 주요 윤리는 세 가지라고 지적했다. 가톨릭이 전형적 사례인 기독교적·봉건적 윤리, 현대의 부르주아 윤리,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윤리가 그것이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각각의 태도를 살펴보면, 이 윤리관들의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가톨릭에서 결혼은 “하느님이 정해 주신” 것이므로 영원히 지속돼야 한다. 보통의 부르주아에게 결혼은 시민끼리 계약을 맺은 결과이고, 그 계약은 정부 관리에 의해 승인되고 조정되고 종료된다. 사회주의자에게 결혼은 당사자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시작되거나 끝나는 개인적 문제다.

이런 일반적 윤리관들은 경제 관계가 발전해 온 세 단계를 대표하고, 서로 다른 계급 구조와 사회체제의 필요와 견해를 표현한다. 그 윤리관들은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서로 공존하고 경쟁한다.

엥겔스가 내린 결론은 모든 윤리와 그 윤리를 정당화하는 이론은 특정 시대에 사회가 도달한 경제적 단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문명사회는 지금까지 계급 적대 속에서 움직였으므로, 모든 윤리는 계급 윤리이고 계급 윤리일 수밖에 없다.

 

p 155 보편적 윤리는 존재하는가?

윤리 규범이 역사나 사회 바깥에서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윤리 규범은 사회마다 다르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 용인되는 행위가 다른 사회에서는 용인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동성애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개 용인되지 않는다. 또, 고리대금업은 서양 중세 사회에서는 비윤리적 행위였지만, 오늘날에는 금융 투자라며 장려된다.

윤리 규범은 또한 계급이나 사회집단에 따라 다르다. ‘대체 인력’은 사용자에게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파업 노동자들에게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다. 폭력과 거짓말은 잘못이라지만,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보면 경찰의 파업 파괴와 집회 강제 해산은 폭력이 아니라 ‘공’권력이고, 정부의 공무원 연금 삭감 계획은 기만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안’으로 진중하게 고려된다.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전쟁하면서 교전국 시민과 병사를 폭격하는 행위는 언론에서 살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p 158~159 트로츠키와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의 논쟁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는 착취가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의 생산물 일부를 탈취하고, 노동계급을 억압하므로 그릇된 일이라고 봤다. 또, 폭력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결과가 유익하지 않고 유해하므로 나쁘다고 봤다.

그렇지만 결과에 관심을 집중하느라 폭력의 원인이 착취와 이를 위한 억압이고, 착취의 원인이 자본 간 경쟁이라는 점을 놓치면, 착취와 폭력 비판은 추상적 훈계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도덕주의적 설교는 폭력의 사회적 원인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과 진정한 해결책 발견을 방해한다.

실용주의 윤리에 근거한 듀이의 폭력 비판, 혁명 비판에 맞서 트로츠키는 노동계급 혁명이라는 ‘폭력’(수단) 말고는 거짓과 폭력이 필요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목적)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한다.

실용주의 윤리는 또한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본다. 그러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이성의 질곡에서 벗어나기”(1960)에 썼듯이, “목적과 수단의 기계적 분리는 인간 해방이 아니라 인간 조종에 적합하다.” 그래서 미래의 이상향을 제시하며 현재의 야만 상태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옛 소련 체제와 현 북한 체제를 합리화하(했)고, 자유주의자들과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와 그것의 단편적 개혁을 합리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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