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증보판] 의견이 다르다고 책을 없애라는 것은 언론·출판·사상의 자유 부정일 뿐 여성해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증보판에 부쳐] 우리 출판사가 발표한 지난번 성명에 ‘불꽃페미액션’ 모임이 반박문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단순히 후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우리의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책갈피 출판사는 1992년에 창립해 25년간 마르크스주의 사상 보급을 위해 한길을 걸어 온 사회과학 출판사입니다.
창사 초기에 《소련 국가자본주의》,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등 마르크스주의 이론서를 출간했고, 1995년에는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으로 동성애 문제를 분석한 《동성애자 해방운동과 마르크스주의》와 《동성애자 억압의 사회사》를 출판했습니다.
1998년과 1999년에는 앞에서 언급한 동성애 책들을 포함해 책갈피 출판사가 발행한 책들이 이적표현물로 지정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비롯해 11종의 책이 출판 금지 조치되고 당시 출판사 대표가 두 차례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수많은 출판인, 서점인, 인권단체가 모여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석방 캠페인을 벌였고, 일부 대학가에서는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제본해서 돌려 읽는 ‘국가보안법 불복종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책갈피 출판사의 역사는 여러 사회과학 출판사들과 함께 언론∙출판·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워 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올곧은 사상의 무기를 제공하려는 일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책갈피 출판사도 이제 한국 사회에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을 보급하는 대표적 출판사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7월 31일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온라인에서 일부 사람들(노동당 여성위원회, 불꽃페미액션, 노동당 성정치위원회, 페미당당)이 책갈피 출판사의 신간인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최미진 지음)을 ‘2차가해’로 지목해 “출판 중지와 수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심지어 “법적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은 잘못된 개념과 절차가 낳은 부작용들을 살펴보며 대안적 개념과 절차를 모색하고, 그럼으로써 성폭력 피해자들이 적절한 해결 절차를 제공받고 잘 싸울 수 있도록 도우려는 고민의 산물입니다. 이런 고민은 독자들로부터 묵직한 공명을 얻고 있습니다.
여성 해방을 위한 논의가 더 풍부해지려면 다른 생각을 표현하고 서로 맞닥뜨린 경험을 교류하며 공론의 장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성해방 운동의 조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일입니다. 책갈피 출판사도 그중 일부로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에서 오늘날 여성들의 현실과 해방의 전망, 성정치 쟁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여성·성 해방 이론서를 10종 이상 발간하며 논의의 발전에 기여해 왔습니다. (☞ 목록 보기)
그런데 의견이 다르다고 책 자체를 없애라는 것은 군사 독재도 막지 못한 언론∙출판·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비민주적인 발상입니다. 도대체 어떤 자격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 자체로도 무리한 요구일 뿐만 아니라, 국가 탄압에 맞서 출판의 자유를 옹호하며 싸워 온 전통 있는 사회과학 출판사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은 무례하기조차 합니다. 책에 나오지도 않는 표현(“상습적”, “거짓말쟁이” 등)을 따옴표 안에 넣어 마치 책에서 직접 인용한 것처럼 써 오해를 주는 것도 부정직한 일입니다.
자신들만이 페미니즘(여성해방운동)과 정의를 대표한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구속과 출판 금지 등의 탄압을 이겨 내며 지켜 온 언론·출판·사상의 자유를 자신들 임의로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합니다. 여성해방과 진보 운동 내 이견은 이렇듯 억지 요구를 할 일이 아니라 토론과 논쟁을 할 문제입니다. 실현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무례한 행동을 중단해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2017년 8월 2일
도서출판 책갈피
– 후기: ‘불꽃페미액션’ 측의 반박은 두 가지 논점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자신이 하는 운동은 언론∙출판∙사상의 자유(이하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는 것이 아니다. 둘째, 샤를리 엡도와 박유하의 표현의 자유 제약에는 찬성하면서 책갈피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이중 잣대일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재반박하고자 합니다. 첫째, 불꽃페미액션이 소비자 운동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방법은 비민주적입니다. 소비자 운동을 하려면 소비자에게 정확하고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비자 운동의 정의대로 “소비자가 소비생활에서 발생하는 소비자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사회운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꽃페미액션은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 가운데 ‘문제적’이라고 간주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인용하면서 비교적 자세한 반대 토론을 이끌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는 않고 이 책의 발간을 중단하라고 하니 이게 적절한 소비자 운동인가요? 게다가 상품 불매 운동이나 광고 불매 운동도 아니고 출판사가 생산 자체를 중단하라고 하니 이게 표현의 자유 제약 시도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둘째, 샤를리 엡도와 박유하는 각각 프랑스의 무슬림 이민자들과 전시 일본군 ‘위안부’였던 가난하고 천대받는 할머니들을 비하할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반면 우리 출판사는 여성 차별에 한결같이 반대해 왔고 여성의 해방을 한결같이 옹호해 왔습니다. 특별히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도 여성이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현실을 규탄하고, 분석하고, 개선책과 완전한 해결책을 모두 제안하는 것 등을 출발점이자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례 문제로 말하면, 모든 성폭력 관련 도서가 사례를 풍부하게 들고 있습니다. 사례 없이 개념과 논리, 원리만으로 논술한다면 글의 가독성을 떨어뜨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쉽게 설명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책도 다른 성폭력 관련 도서와 마찬가지로 실명이 아니라 가명 처리를 했습니다. 책 출판 전에 아는 변호사들에게도 미리 법률 자문을 구한 결과이므로, 불꽃페미액션 측이 법률적 대응을 하고 싶으시면 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자유를 주장하려면 책임(성)과 공공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샤를리 엡도와 박유하는 자신들이 펴는 주장이 각각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일본과 한국의 우익을 고무하는 효과를 내는 것에 책임성을 느껴야 합니다. 또한 공공성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공공성을 파괴합니다. 반면 우리 출판사가 펴낸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은 좌파와 노동자 계급투쟁의 분열을 촉진하는 요인의 하나인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교리적이고 도덕주의적인 개념과 그 실천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노동계급의 단결과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성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진보∙좌파와 노동운동 내에서 토론과 논쟁의 자유화(금압이 아니라)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부르주아적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진보∙좌파∙노동계급의 관점에서는 공공성과 책임성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갈피가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샤를리 엡도와 박유하의 표현의 자유와 혼동할 정도로 ‘인권’ 개념에 무지하다고 예단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압도 다수(서구의 통계로 92퍼센트)의 강간 피해 호소 여성이 진실을 말하고, 오직 극소수(3퍼센트)만이 거짓을 말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92퍼센트는 100퍼센트가 아니고 3퍼센트는 0퍼센트가 아닙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바로 이 명백한 점을 보아넘기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독단적 명령이 먹히지 않을까 봐 ‘2차가해’라는 말로 질문과 의견의 자유를(책갈피의 출판의 자유를 포함해) 권위주의적으로 억누르려 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한 짝의 무기들이야말로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구실을 해 왔습니다.
우리 출판사가 이에 저항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