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도 1968년에 관한 책들이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권 소개되었다. 물론 1968년의 폭발력과 중요성에 비해서는 아직도 미약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기존에 나와 있는 이러한 책들과 달리 이 책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이 책은 파편화되고 나열 중심의, 또는 단지 낭만적 회고록 형태의 ‘1968년’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1968년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을 통해 1968년에 대한 잘못된 ‘신화’들을 벗겨내고 있다.
1968년이라는 거대한 불꽃이 터질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1968년 이전의 세계는 무척 고요했다. 보수당 출신의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은 1959년 선거 유세에서 “여러분은 전에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선언했는데, 대다수 국민은 이 말에 동의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격렬한 계급 분열은 물질적 번영과 함께 빠르게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 고요한 바다에도 잔물결이 서서히 일고 있었다. 즉 “완행 열차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 열강들의 경제적 지위에 변화가 일어났다. 1940년대 후반의 세계는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 지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군사비에 너무나 많은 돈을 지출한 미국의 세계 패권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미국은 자국의 헤게모니를 재천명하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지만 미국 사회에 깊은 골만 패였을 뿐이다.”(이것은 68년의 핵심 중 하나인 베트남 전쟁의 배경이 된다.)
둘째, 전후 장기 호황은 사회 구조 전체의 중심을 이동시켰다. “호황이 시작됐을 때, 인구의 커다란 부분이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 호황은 대규모 산업 성장과 농업 합리화를 수반했기 때문에 수많은 소농과 그 자녀들이 도시로 이주했고, 그 결과 사회 구조 전체가 도시 중심, 노동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그 뒤 잇따르는 반란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이것은 68년의 핵심 중 하나인 노동자 운동의 배경이 된다.)
셋째, 20세기의 자본주의 발전으로 다른 종류의 대학 제도가 필요해지면서, 대학이 점점 팽창했다. 대학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학 내 학생들 사이에서는 시험 제도, 대학 당국의 권위적인 태도, 열악한 학교 시설 등에 대한 불만도 증가했다. 또한 수동성과 현실 도피적 여러 행태들―예를 들면, 음주나 마약 문화―을 낳았다. 그러나 동시에 대학은 “대학과 사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갑작스러운 저항 운동으로 분출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이것은 68년의 핵심 중 하나인 학생 저항 운동의 배경이 된다.)
넷째, 소련과 중국, 두 정권이 갈등을 일으키는 등 스탈린주의 정권들 사이에서 균열이 발생했다.(이것은 동유럽 국가들의 시위 배경이 된다.)
1968년은 장발, 마약 복용, 체 게바라 포스터 등으로 표현되는 ‘히피와 학생들의 해’가 아니었다.
물론 학생들의 반란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며, 기존 권위에 저항하는 문화들이 퍼져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프랑스의 1천만 명의 파업처럼, 주요 나라들에서 노동자들의 거대한 반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먼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 투쟁의 분출이 학생 운동에서 상당한 영감을 얻고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 운동에는 그 자체의 동학이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1만 명의 노동자들이 손에 스캐너를 들고 이렇게 외쳤다. ‘아넬리[피아트사 설립자], 인도차이나는 네 공장 안에 있다[공장의 투쟁을 베트남 전쟁에 비유한 말].” 이러한 분위기가 도처에 번져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학생 운동의 약점을 이렇게 평가한다. “생산관계에 편입돼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학생 운동은 학생들의 참여와 열정이 절정에 달하자마자 쇠퇴하기 시작한다.”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파들의 활동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프랑스의 5월 당시에 드골이 독일까지 ‘도망’갈 정도로 위협을 받았지만 결국은 국민투표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분석한다. 그 이유의 핵심에는 프랑스 공산당이 있었다. 하먼은 “1968년의 첫째 교훈은 5월에 프랑스 노동자들이 그 지도부를 거슬러 혁명적 방식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둘째 교훈은 6월에 이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되돌려 보냈고 낡은 지배 계급의 사상이 다시 확립됐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밖의 나라에서도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
좌파가 위기를 겪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은 스탈린주의 정권인 소련에 대한 의존이다.
1968년에 “혁명적 좌파가 행복에 도취한 것은 당연했다.……그러나 체제에 생긴 이 균열이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을 예고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 혁명가들의 조직은 여전히 ‘소집단’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손상을 입자 좌파의 정치적 공백이 생겼지만, 혁명적 대안이 그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다. 이렇게 혁명적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는 낡은 사상들이 그것에 도전하는 자생적 운동을 여전히 질식시킬 수 있었다.”
1968년은 그 전후 사건들과는 무관한 역사적 이변이 아니다. 1968년의 반란은 그 해로 끝나지 않았다.
1968년은 그 전부터 발전했고 그 뒤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폭발한 모순의 산물이었다. 프랑스의 5월은 19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로 이어졌다.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추문으로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럼으로써 전임 정부의 야망이 좌절된 뒤 후임 정부마저도 붕괴했다. 1968년 3월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학생 반란은 1970~71년 그단스크와 슈체친에서 일어난 훨씬 더 심각한 노동자 반란으로 이어졌고 스탈린주의에 도전한 ‘프라하의 봄’은 연대 노조 운동이라는 훨씬 더 큰 도전으로 이어졌다. 1968년에 영국의 대학들에서 표출된 불만의 파문은 결국 1974년에 히스 정부를 붕괴시킨 파업 물결로 이어졌다. 1973년 11월 아테네 과학기술대학에서 일어난 항쟁은 그리스 독재 정권의 붕괴를 재촉했다. 자유의 종소리는 1974년 4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도, 1976년 3월 스페인의 빅토리아에서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1968년 그리고 2004년 한국과 세계.
그렇다면 1968년은 36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가? 왜 지금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
1968년, 그 뒤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했으며, 여러 차례의 경제 위기를 겪기도 했고, 2001년 9월 11일에는 제국의 심장부인 뉴욕에서 엄청난 테러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적 차원에서, 그리고 우리 나라 차원에서 1968년과 비슷한 점이 많다.
1999년 11월, 즉 20세기가 끝나가던 바로 그 때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국제 운동이 시애틀 거리에서 탄생했다. 그들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를 외쳤다. 그런데 그것은 1968년에 거리에 뛰쳐나왔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정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 이라크 전쟁과 68년 당시처럼 그것에 반대하는 다양한 반전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1987년의 민주화 투쟁과 1998년의 IMF를 거쳤고, 현재는 경제 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며 기성 정치권들도 많은 불신을 받고 있다. 즉, 1968년 당시와 비슷하게 권위주의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 경제적 불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1968년에 꾸었던 꿈은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