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공개]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

책갈피 출판사는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최미진 지음)이 출판 중지돼야 할 해악적인 책이기는커녕 노동자 운동과 진보 운동의 단결과 발전에 꼭 필요한 생산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이 스스로 읽고 판단할 수 있도록 이 책의 전문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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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은 성폭력 개념 확장의 일환으로 한국의 성폭력 반대 운동 내에서 꽤 널리 수용돼 왔다. 애초에 이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지독하게 보수적인 편견에 맞선 반발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만한 취지가 있었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해도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실에 맞서 싸우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해할 만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두 개념 자체가 내포한 난점 때문에 현실에서 여러 혼란과 부작용도 생겨났다. 이를 단지 ‘부수적 피해’라며 무시할 순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들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속한 좌파 노동단체인 노동자연대는 이 개념들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 논란 당시부터 이 개념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해 왔다. 그 후에도 (비록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여성운동과 노동운동 내 몇몇 개인과 단체들의 주목할 만한 반성적 평가가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100인위를 이끌었던 페미니스트 전희경 씨와 여성주의 학자인 권김현영 씨(이하 모두 존칭 생략)가 일부 자성적인 평가를 대중에게 각각 공개적으로 내놓았다. 최근 이 주제와 관련한 한국여성민우회(이하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주최의 토론회(‘2017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2017년 5월 15일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열렸다.)에도 350여 명이 참가해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민우회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많은 관심을 받은 토론회”(토론회 사회자)라고 한다. 두 개념이 내포한 도덕주의 때문에 솔직한 토론을 매우 어렵게 만드는 분위기를 고려하면 최근의 논의는 반가운 일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확산된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에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돌아보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이제라도 허심탄회하고 발본적인 돌아보기와 대안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논의에 도움이 되고자 쓴 것이다.

한편, 근래 몇 년 간 일어난 페미니즘의 부흥 속에서 ‘여성의 노No는 노No고, 예스Yes는 예스Yes’라는 (당연하지만 흔히 부정돼 왔던) 진리를 당당하게 주장하는 젊은 여성들이 늘어난 것은 환영할 일이다. 이제 여성운동의 새 세대는 그간의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에서 교훈을 잘 이끌어 내야 한다. 선배 활동가들의 공헌과 정치적 약점 그 모두에서 잘 배워야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오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돌아보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은 단지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들이 애초에 어떤 취지가 있었고, 그 취지 중 옥석을 가려 진정 살려야 할 내용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서 필요한 대안적 개념과 절차는 무엇인지 제시하고자 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벌어진 여러 사건들도 사례로 들었다. 최근 두 개념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늘어났음에도 여전히 기존 개념의 폐기 여부와 대안은 뚜렷이 제시되고 있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대안 문제는 각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대안이 제시되지 않는 반성은 기존의 관성에 뒷문을 열어 주기 십상이다.

이 책은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의 실익이 더 크다며 방어하거나 보완하자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논쟁적으로 살펴본다. 또한 최근 페미니즘 내에서 커진 문제의식도 다룬다. 이에 대해선 그 의의뿐 아니라, 여전히 남는 중요한 문제들도 살펴본다.

이 책은 필자가 최근에 쓴 《‘피해자 중심주의’와 ‘성폭력 2차가해’ 논쟁, 어떻게 볼 것인가?》(노동자연대 펴냄)를 그 후에 벌어진 논쟁을 반영해 개정·증보한 것이다. 주로 ‘피해자 중심주의’의 새로운 대안 부분과 최근 페미니즘 내 논쟁 부분을 개정·보완했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된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주최 토론회의 쟁점들을 분석한 필자의 기사 내용도 일부 포함돼 있다.

끝으로, 성폭력에 맞서 분투해 온 활동가들과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온 이론가들의 글, 그리고 이들과의 토론이 필자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큰 자극과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또한 필자와 함께 관련 조사를 하고, 주요 쟁점들을 토론하고, 초고를 꼼꼼히 읽고 교열해 준 〈노동자 연대〉의 이현주 기자와 노동자연대의 정진희 회원에게 감사한다.

2017년 7월
최미진

1장 성폭력 개념 문제

여성의 No는 No다: 보수적이고 편협한 성폭력 정의에 반대함

오늘날 한국어 사용자의 압도 다수는 성폭력을 강간이나 그에 준하는 행위, 즉 여성의 의사에 반해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필자는 ‘여성의 의사에 반해 폭력이나 위협을 통해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시도)하거나 몸을 만지는 행위’로 성폭력을 정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강간뿐 아니라 강간미수, 정도가 심한 성추행도 성폭력에 포함돼야 한다. 또한 직접적인 폭력 행사가 아니더라도 실질적 위협을 동반했다면 성폭력으로 봐야 한다. 가령 성관계를 거부하면 고용 상의 불이익이 우려되는 상황, ‘죽여버리겠다’, ‘자녀를 해치겠다’, ‘주변에 소문 내겠다’ 등과 같은 위협은 직접적 폭력 행사는 아니지만 분명히 강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에서는 대체로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성폭력을 정의해 왔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대학가에서 반성폭력 학칙·규약 제정 운동을 주도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각별히 매우 확장된 성폭력 개념을 수용했다. 당시 그 운동은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행 일체’로 성폭력 개념을 확대했다. 아래에서는 성폭력 개념의 이런 확장과 그 적용이 실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애초에 반성폭력 운동이 성폭력 개념을 확장하게 된 데는 이해할 만한 취지도 있었다는 것이다. 성폭력에 대한 여성 차별적 편견이 매우 심하고 기존의 법과 제도가 보수적이고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어, 진정한 성폭력조차 성폭력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성폭력 개념 확장은 이에 대한 반발이라는 맥락이 있었다.

여성운동이 형법 개정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형법에서 성폭력에 관한 죄는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돼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법의 목적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이 아니라, ‘순결 보호’였던 것이다. 이 조항은 실제 법 적용에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연인 사이의 강간(데이트 강간)이나 부부 사이의 강간은 강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성매매 여성이 당한 강간도 ‘보호할 정조’가 없다는 이유로 강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판례가 있었다.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婦女’로 한정돼 있어, 트렌스젠더나 남성이 (다른 남성에게) 당한 성폭력도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오히려 성폭력을 ‘유발했다’고 비난받는 경우도 흔하다. 성관계에서 여성의 동의 여부가 성폭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옷차림, 음주 여부, 성관계 전력, 상대 남성과의 친분 등 여성의 ‘행실’이 판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이런 부당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2016년 12월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기도 했다).1 1989년 개봉된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피고인〉은 이런 여성차별적 현실을 잘 고발하는 영화다. 집단 강간을 당한 한 웨이트리스 여성이 강간 피해를 호소하자 그 여성의 평상시 ‘행실’, 음주 상태, 옷차림을 문제 삼아 ‘헤픈’ 여성이 강간을 ‘유발했다’는 비난이 벌어졌다. 이처럼 종종 ‘남성의 성욕은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이고 ‘그것을 자극한 여성이 문제’라는 식의 비난이 벌어지고, 이 때문에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는 죄인이 되는’ 일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다. 영화 〈한공주〉(2014)의 소재가 된 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당시에도 경찰은 피해 여학생에게 되레 “밀양 물을 흐려 놨다”고 비난했다.

19대 대선 자유한국당 후보 홍준표가 여성에게 돼지발정제를 몰래 먹여 강간하려는 일에 가담한 사례는 성폭력에 대한 권력자들의 왜곡된 의식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홍준표는 이 강간미수 사건을 그저 혈기왕성한 남성의 낭만적 치기쯤으로 여겨 자서전에 버젓이 썼고, 강간을 시도했어도 미수에 그치면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라는 저열한 의식을 드러냈다.2

또, 법정에서는 “강간이 성립하려면 피해자의 저항이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최협의설’이 통용됐다. 이것은 “피해자에게 목숨을 건 저항을 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피해자의 저항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점이 인정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이론이었다.”3 가령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남녀가 비디오방에서 함께 영화를 보다가 가해자가 피해자 몸 위에 올라와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강간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피고인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정도의 유형력을 행사”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인지] … 증명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대법원 2004.6.25. 선고 2004도2611 판결)4

여성운동이 성폭력에 대한 이런 보수적 법 적용과 제도화된 여성 차별에 반대해 성폭력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범죄’로 규정하려 한 것은 올바른 출발점이다. ‘여성의 노No는 노No’라는 구호처럼, 성폭력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성관계에서 여성의 동의 여부다. 그 밖의 잣대, 즉 여성의 ‘행실’, 남성의 의도, 저항 정도, ‘정조 침해’ 등은 성폭력 판단의 기준이 돼선 안 된다. 이런 편협하고 보수적인 기준에 반대해 여성의 동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폭력 개념 확장은 필요한 것이다.

2011년 6월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반성폭력 시위 “우리가 무엇을 입든, 어딜 가든, 예스YES는 예스YES고, 노NO는 노NO” ⓒ 〈소셜리스트 워커〉

성폭력 개념의 과잉 확장 문제

그러나 이런 보수적 법 적용에 맞서 싸우면서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은 한층 더 나아갔다. 즉, 성관계에서 여성의 동의를 중시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여성에 대한 “신체적·언어적·정신적 폭력”, 나아가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행’ 전반에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는 경향이 생겨났다(성폭력 개념의 과잉 확장).

이것은 이 사회가 “성별 권력”으로 나뉘어 있고 성폭력이 “남성 권력”의 표현이라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특정한 개념과 언어의 사용이 사회 변화(성폭력과 성차별 폐지)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는 생각과도 관련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룬다).

물론 성폭력 개념 과잉 확장에는 부분적으로 공감할 만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즉, 강간이 아닌 다른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들도 (웃고 넘길 일이 아닌) 여성 차별의 표현이라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강간만이 부적절한 행위는 아니다. 강간은 아니지만 다양한 수위의 성추행, 직장 내 성희롱(지속적이고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이나 성적 비하, 성적 서비스 강요, 성적 요구 거절에 따른 고용상 불이익 등), 스토킹, ‘몰카’ 등 여성을 성적으로 괴롭히는 행위들도 분명 사회적으로 제재돼야 할 행동들이다. 이런 행위들이 법적 처벌 대상에 포함되고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행위라는 인식이 늘어나게 된 것은 여성운동의 성과다(물론 여전히 성차별적인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고, 제도적으로도 개선할 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필자가 속한 좌파 노동단체인 노동자연대도 단지 강간뿐 아니라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온갖 형태의 언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가령 일찍이 1990년대 초부터 직장 내 성희롱이 (그 어감과는 달리) 여성 노동자들에게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고 봤다.5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이자 중요한 노동조건 문제이므로,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말고 노동조합이 다뤄야 할 집단적인 쟁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노동자연대 내에서 강간뿐 아니라 성추행·성희롱 등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는 가차없이 징계해 왔다. 여성 비하적 발언 역시 비판과 주의(또는 경고)의 대상이며, 그럼에도 반복된다면 징계했다.

하지만 성적으로 부적절한 언행 일체를 모두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런 시도는 그 의도가 좋다 할지라도 실제로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 차별적 언어, 성적 농담, 기분 나쁜 눈빛, 포르노, 원치 않는 스킨십, 성희롱, 강제 추행, 강간 등 그 부적절함과 부당함의 정도가 같지 않은 행위들을 모두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폭력을 성폭력이게 하는 특징을 흐려 버린다. 피해 여성이 겪는 트라우마의 정도 차이가 흐려지거나 지워져, 진정한 성폭력의 심각성이 오히려 희석될 위험성이 있다(이 점에서 성폭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성폭력이라는 말의 의미를 가볍게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 성폭력 개념의 과잉 확장은 상대적으로 경미한 일을 실제보다 더 부풀려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는 각각의 행위에 걸맞은 적절한 대응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구체적 형량을 부여해야 하는 법원에서는 수위가 다른 여러 행위들을 “성폭력”이라고 뭉뚱그리는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에는 강간과 강제 추행뿐 아니라, ‘음란매체’를 이용한 성희롱이나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는 것(‘몰카’), 성적 목적을 위한 공중장소 침입 행위 등도 “성폭력”이라는 범주 아래 포괄돼 있다. “하지만 이 법이 제정된 경위를 아는 모든 재판관들은 이러한 행위를 ‘성폭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폭력처벌법은 성범죄 처벌 강화와 공소시효 연장, 또 몰카처럼 신종 범죄의 등장 등을 반영하고자 형법 등 다른 법률들에 흩어져 있는 처벌 조항들을 한데 모았[을 뿐이]고, 이 범죄들을 아울러 제2조에서 성폭력범죄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6 여전히 법원에서는 성과 관련된 여러 범죄의 수위를 구분해 처벌할 뿐 아니라, 실제 판결에서는 ‘성폭력’이라는 단어로 통칭하지 않고 구체적 행위를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수위가 질적으로 다른 여러 행위들을 실제 처벌에서 모두 동일한 범죄로 취급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난점을 고려한 것이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느슨한 용어 사용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크게 방해하고 더 나아가 심각한 정치적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성폭력 개념 과잉 확장은 자신들끼리 토론하는 데 익숙한 소집단 안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대중과의 소통은 불가능하게 하거나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소수 좌파나 여성주의 단체는 “성폭력”이라는 말을 “신체적·언어적·정신적 폭력” 나아가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행’ 일체로 확장해 사용할 수 있다 해도, 한국어 사용자의 압도 다수는 “성폭력”을 강간이나 그에 준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박훈 변호사가 들려주는 일화를 소개한다(《작은책》 177호, 2010년 5월).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가 “그 사람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어?” 하길래 “응, 그 사람 성폭력을 행사해서 활동을 그만두었어”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 사람이 강간을 했어?” 전 그 순간 당황하였습니다. 아내는 성폭력을 곧 강간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강간을 한 것이 아니고 성적인 언어 폭력을 한 것도 성폭력이어서 그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야.” 그러자 대뜸 “그게 무슨 성폭력이야, 성희롱이지.” 아내는 성폭력과 성희롱을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행 법률의 구분 방식입니다.

반성폭력 운동을 해 온 활동가들은 “성폭력”이라 불리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매번 “이것이 성폭력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지루한 논쟁에 빠진다고 토로한다. 이것은 확장된 성폭력 개념이 대중의 언어 사용과 너무 괴리돼 사람들 사이에 불통을 부르고, 그래서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 준다.

따라서 성폭력 외에 여러 수위의 성적 부적절 행위들은 “성폭력”이라는 용어로 뭉뚱그리지 말고, “원치 않는 스킨십”, “성희롱”, “여성 차별적 발언” 등 각 행위의 특징과 수위에 걸맞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대중과 오해의 소지 없이 소통하고 각 수위에 걸맞은 대처를 하는 데서 더 효과적이다.

성폭력 개념의 과잉 확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폭력” 개념이 확장될수록 진보로 여긴다. 그러나 이전의 실태와 비교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도, 확장된 그 개념이 막상 현실에서 사용됐을 때의 효과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다수가 지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리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의 사회성을 거스르려면 그만한 유익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이, 성폭력 개념 과잉 확장은 역효과가 크다.

과잉 확장된 성폭력 개념이 반성폭력 운동의 효과적 수단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은 노동자연대만이 아니라 여러 진보·좌파단체와 여성단체들 내에서도 부분적으로 제기돼 왔다. 가령 사회진보연대는 다양한 반여성적 문화와 언행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 “성폭력”이라고 규정해 버린 운동 방식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 다수가 “금지 목록이 더 까다로워지고 넓어졌으며 그 기준조차 모호해졌다”고 받아들여,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반발심만 강화됐다고 평가한다.7

최근 민주노총 내에서도 “성폭력이라는 언어가 주는 위협[으로]… 낙인 효과가 크다는 점8 때문에 “성폭력” 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민주노총 법률원은 광의의 성폭력 개념을 민주노총 규정에서 삭제하고, 그 대신 구체적 행위를 명시하자는 입장이라고 한다. 이 제안은 광범한 조합원들 사이에서 성폭력이라는 말의 무게감이 매우 크다는 점을 감안해, 구체적 행위를 명시해서 과잉 확장된 성폭력 개념과 대중의 인식 사이의 괴리를 완화해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2장 ‘피해자 중심주의’

가해자 존중주의와 물증 지상주의에 대한 정당한 반발

성폭력 개념의 과잉 확장이 낳은 부작용은 위에서 살펴봤다. 물론 성폭력이라는 용어가 여성의 의사에 반한 신체 접촉·성희롱 등 여성에 대한 실질적 가해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는 그나마 객관적 실체가 있는 경우다. 하지만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라 성폭력 개념을 규정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성폭력 판단의 기준을 (가해지목인의) 객관적 행위가 아니라 (피해호소인의) 인식과 감정에 의해 규정함으로써 행위의 객관적 실체를 무시하거나 부차화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한국의 반성폭력 활동가들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채택해 온 데에도 나름의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실에서 여성의 피해 호소와 의사가 종종 무시당한다는 사실이다. 공정한 진상조사 전에 이미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성폭력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보수적 편견에 따라 여성이 성폭력을 ‘유발했다’거나 여성이 ‘더럽혀졌다’는 등의 비난이 벌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당사자들만 있는 은폐된 공간에서 벌어져 목격자가 없거나 물증이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있다. 설사 물증이 있다 해도, 병원에 가서 정자나 상흔을 그대로 보전해 경찰에 제출해야 하는 등의 절차가 동반되곤 한다. 이것은 여성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상처를 고스란히 들춰내야 하는 일이다(대부분의 강간 피해 여성들이 강간 피해 후 맨 먼저 하는 일이 온몸을 깨끗이 씻는 일이다. 그만큼 역겨운 순간을 지우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폭력 범죄는 증거 보전이 어려운 특성이 있는데도 수사 기관과 법원은 “물증 없냐, 물증 가져와라”며 물증만을 성폭력 피해 인정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다(‘물증 지상주의’). 이 과정에서 피해호소 여성의 진술을 (그 정합성 여부와 무관하게) 무시하고 증거에서 배제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물증 지상주의’는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피해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고, 진실을 간과하게 만든다.

따라서 여성의 피해 호소와 의사가 일방적으로 무시되는 관행에 반대해야 한다. ‘물증 지상주의’는 배척하고, 여성의 진술은 그 정합성이 있다면 하나의 중요한 증거로서 존중돼야 한다(물론 여성의 진술 외에 다른 관련자들의 진술과 정황 증거들도 참작돼야 한다). 또한 보수적 편견을 적용해 피해호소인을 매장시켜선 안 되고, 피해호소인이 부당한 압력 없이 피해를 호소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며, 여성의 동의 여부가 성폭력 판단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에 입각해 판단하고 대처해야 한다.

필자가 속한 단체인 노동자연대도 성폭력·성추행·성희롱 등의 피해 호소를 하는 여성이 있을 때, 피해호소를 신속히 접수하고 공정한 눈으로 진상을 조사하려 애쓰고, 사실관계가 온전히 파악되기 전에라도 일단 가해지목인의 접근을 차단하는 등 피해호소인을 배려하는 조처를 취한다. 또한 물증이 없는 경우라 해도 피해호소인의 진술을 상세히 듣고 그 정합성을 따져 중요한 증거 중 하나로 인정해 왔다(대부분의 경우 피해호소인의 진술이 가장 중요한 증거 ─ 유일한 증거라는 뜻은 아니다 ─ 로 채택됐다).

피해호소 여성의 진술 문제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에는 이해할 만한 문제의식뿐 아니라 주관주의적이라는 문제점도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그 말이 보여 주는 바 그대로,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인식과 지각, 감정을 중심으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뜻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 성폭력 개념의 무차별적 확장을 낳은 운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100인위는 여기서 더 나아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성폭력 사건의 의미 구성과 해결과정에서 피해자인 여성의 주관적 경험에 진실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

오늘날 ‘피해자 중심주의’가 좌파 단체나 진보정당, 노동조합들의 내부규약에 다 명시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정도는 저마다 달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면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애초에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성의 피해 호소가 부당하게 무시되는 ‘가해자 존중주의’, ‘물증 지상주의’를 피해호소 여성의 주관주의로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 이해할 만한 애초 취지에도 불구하고, 근대 민주적 사법 절차의 기초인 증거주의를 버리고 주관주의를 원칙으로 삼는 것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낳는 난점과 부작용은 없을까?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호소 여성의 인식과 감정을 근거로 성폭력을 판단하자는 것이다 보니, 사실상 ‘피해를 말하는 여성은 옳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난점을 안겨 준다.

첫째, 객관적 실체를 놓고 볼 때 성적으로 부적절하거나 성적 가해 행위라고 볼 수 없는 것까지 성폭력에 포함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줄담배를 피고 인상을 쓰면서 이별을 고한 일(‘서울대 담배 사건’), 이른바 ‘양다리’를 걸친 일, 애정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100인위가 꼽은 “성폭력” 사건 중 일부다) 등이 “성폭력”이라는 주장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성폭력”으로 인정하지 않은 단체와 개인들을 “성폭력 2차가해자”라고 비난한 일들이 벌어졌다(‘2차가해’ 개념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당사자 여성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일 수는 있어도, 성적 가해 행위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식이면, 성폭력 개념을 무한정 확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남성을 성폭력 가해자로 만들 수 있다. 여성 차별과 성의 소외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 살면서 여성을 한 번쯤 불쾌하게 하는 남성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실제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은 비교적 소수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사례를 똑같이 겪었다 해도 모든 여성이 똑같이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는 법도 없다. 그러면 이 여성에겐 ‘성폭력’인 것이 다른 여성에겐 ‘성폭력’이 아니게 되는가? 그렇다면, 성폭력은 순전히 주관적인 문제가 돼 버리고 과연 그 실체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 곧 부닥치게 된다.

둘째,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말이 옳다고 전제돼, 진상조사가 무의미해지고 피해호소가 곧 유죄 확정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진상을 알기 위해 합리적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2차 성폭력 가해”가 될 수 있다. 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운동사회 내 공동체 해결에서 ‘피해자 관점’이 ‘피해자’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성폭력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관점이 요구되는 시점은 객관적 정황 증거가 요구되는 ‘사실관계’ 파악 단계가 아니라, ‘사실 관계’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단계다. 그런데 ‘피해자 관점’이 사건 해결과정으로 들어오면서 피해자 진술에 대한 질문조차 어렵게 하고 있다. 이것은 어떠한 도전도 허용하지 않는 권위적인 개념[된다.]9(강조는 인용자)

셋째, 이와 관련된 문제로서, 만에 하나 피해호소인이 감정적 혼란으로 인한 사실 왜곡이나 거짓 폭로를 할 경우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다.

물론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 대부분은 진실을 말할 가능성이 높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보수적 편견을 무릅쓰고 피해 호소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이 부당하게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

‘여성은 성폭력 허위 신고(무고)를 잘한다’는 일부 우익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주류 언론들은 성폭력 피고소인들이 무혐의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근거로 성폭력 무고율이 높다는 기사를 쓰곤 하는데, 무혐의 판정이 곧 허위 신고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증거가 불충분해 무혐의 판정이 내려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수사기관의 무관심이나 편견이 작용해 초기 수사가 제대로 안 돼 증거 확보에 실패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10 마찬가지로, 소송을 중도 포기하거나 신고를 취하하더라도 그것이 곧 허위 신고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수사 과정에서 편견으로 인해 겪는 고충과 압박 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허위 신고가 만연하다는 잘못된 인식은 수사기관과 법원의 태도에 악영향을 미치고,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반편향으로, 성폭력을 호소하는 여성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가정도 옳지 않다. 감정적 혼란으로 인해 왜곡이나 거짓말을 하는 여성들도 소수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이 때문에 미국의 법학자이자 변호사로 강간, 가정폭력 등 여성대상 범죄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조디 래피얼은 《강간은 강간이다》(글항아리, 2016)에서 ‘모 아니면 도’ 식의 논쟁을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고의 절반이 허위’라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지만, 또한 거짓말을 하는 여성은 아무도 없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미국에서 강간에 대한 허위신고율이 2~8퍼센트라고 말한다. 그래서 조디 래피얼은 강간 사건을 수사할 때 철저한 조사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거나 강간범이 풀려나 다시 활개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 호소 여성은 믿고 봐야 한다’는 전제가 여성운동 내에서 꽤나 강력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요한 반증의 사례를 몇 가지 들어 보려 한다.

2007년 경희대 S교수 사건은 허위 신고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은 권모라는 여성이 S교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했으나, 나중에 여성의 무고로 밝혀진 사건이다. S교수는 성폭행 혐의가 제기됐을 때 경희대 성폭력특별위원회와 검찰 조사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경희대 총여학생회의 입장 글과 중앙운영위원회 회의록 등을 보면 총여학생회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철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던 데다, 여성이 검찰에 제출한 증거(옷에 묻은 정액과 녹음파일, 상해진단서)를 확고부동한 증거로 믿었던 듯하다. 결국 총여학생회는 양측의 주장이 완전히 엇갈리고 아직 검찰 조사가 완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강간을 기정사실화하는 보도자료를 대대적으로 배포하고 기자회견을 했다. 이를 계기로 여러 언론들이 ‘경희대 명예교수의 성폭력 혐의 사건’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고, 학교 당국은 검찰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S교수를 직위해제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사태가 역전됐다. 당시 〈한겨레〉 등의 보도를 보면 검찰의 정밀 감식 결과, 정액은 S교수의 것이 맞지만 여성이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시점보다 한 달 가량 전의 것이고 녹취록은 교묘하게 짜깁기된 것임이 드러났다. 결국 검찰은 S교수를 무혐의 처리했고, 반대로 권모 씨를 무고죄로 기소했다. 권모 씨는 결국 재판에서 증거 조작이 인정돼 무고죄 판결을 받고 실형을 살고 나왔다. 일견 명백해 보이는 듯한 증거까지 제출됐지만 정밀검사 결과 여성의 혼란스러운 심경이 빚은 자작극으로 드러난 것이다.

퓰리처 수상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이 된 미국의 ‘스코츠버러 사건’도 피해호소 여성의 말이 다 진실이라고 전제하는 게 왜 위험한지를 보여 주는 극적인 사례다.

스코츠버러 사건은 1931년 백인 여성 2명이 흑인 소년 9명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거짓말해 흑인 소년 8명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건이다. 사형 선고는 사건이 벌어진 지 보름 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된 지 겨우 사흘 뒤에 이뤄졌다. 백인 여성 2명은 자신들이 성매매 혐의로 기소될까 봐 옆에 있던 흑인 소년들을 고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사건은 당시 미국 남부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소년 9명 가운데 5명은 1937년에 성폭행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한 명은 1976년에야 추가 사면됐고 나머지 3명은 82년 만인 2013년에야 사면될 수 있었다. 그 3명이 이미 죽은 뒤였다.

비록 성폭력 사건은 아니었지만, 2016년 2월 미국 올버니 흑인 여학생 폭행 논란 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흑인 여학생 3명이 버스에서 백인 남녀들에게 인종차별 폭력을 당하고 욕설을 들었다고 트위터에서 주장했고, 그 직후 올버니 뉴욕주립대학 캠퍼스와 소셜미디어에서는 세 여학생들을 지지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모두가 소셜미디어에서 분노를 표했다. 당시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도 세 여학생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진상은 트위터에서의 주장과 전혀 달랐다. 경찰은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조사했고, 세 여학생을 모욕하거나 폭행한 백인 승객은 없었으며, 오히려 백인 여학생에게 물리적인 폭행을 가한 것은 세 흑인 여학생이었다. 다른 백인 승객들은 그 여학생들을 말리려고 나섰을 따름이었다. 시시티브이가 공개되자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고 목소리 높여 지지를 외치며 시위에 참가한 사회운동가와 학생들은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11 “피해자들의 말을 믿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으나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 때” 운동 참가자들이 얼마나 허무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12

이밖에도 성폭력 허위 신고로 밝혀진 일부 사건에서 연인과의 결별이 준 충격과 배신감이 거짓 폭로의 주요 동기로 작용한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이 가끔 벌어진다는 점은 성폭력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일부 여성단체 활동가들의 고민에서도 알 수 있다. 가령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은 여성이 “관계 변화”로 인한 배신감을 ‘성폭력 당했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표출하는 일이 이따금 벌어진다는 점을 우려한다.13

몇 년 전 한 노동운동 단체(이하 A단체)가 겪은 일도 이와 유사하다. A단체와 무관한 한 대학 교지편집부 수련회 뒤풀이 자리에서 A단체 회원이 아닌 남학생이 A단체 신입회원이었던 여학생 H에게 몇십 초짜리 ‘야한 동영상’(‘야동’)을 핸드폰으로 보여 주는 일이 있었다(이하 ‘동영상 사건’). 이때 남학생이 동영상을 강제로 보여 준 것인지, H의 동의 하에 보여 준 것인지는 두 사람의 말이 엇갈려 불분명하다(이후에 벌어진 재판에서도 재판부는 강제성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판결했다).

당시 A단체의 신입회원이었던 또 한 명의 남학생은 맞은편에서 그저 이 광경을 수수방관했다. 처음에 이 일을 우연히 알게 된 H 주변의 몇몇 A단체 회원들은 교지에 가서 문제제기를 하라고 권유했다. A단체의 규율 기구에 제소하라고 권유한 회원도 있었다. 하지만 H는 스스로 사건을 경미하게 여겨 “웃어넘길 일”이라며 제안을 거절했다. “가해자는 회원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런데 ‘동영상 사건’이 있은 지 1년 4개월 뒤에 H는 갑자기 말을 180도 바꿔 온라인 비난을 시작했다(이때는 H가 A단체에서 탈퇴한 뒤였다). ‘동영상 사건’은 “성폭력 사건”으로, 수수방관한 남학생은 “동영상을 강제로 보여 준 공범”으로, 공식 문제제기나 제소를 권유한 몇몇 회원들은 “성폭력 피해호소를 묵살·은폐한 2차가해자”로 둔갑했다. 이와 동시에, “A단체도 성폭력 2차가해 단체”라고 매도당했다. A단체 지도부는 이 온라인 공개 비난 전까지 ‘동영상 사건’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원 사건과 H가 말을 바꾼 시점 사이에 일어난 변화라고는 오로지 H가 A단체의 한 회원과 격렬한 감정적 갈등을 동반한 결별을 했다는 점뿐이었다. 나중에 H는 “그 조직 전체를 적으로 돌렸어야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상대방에게 되게 의지하고 매달렸었”음을 SNS에 고백했다.

결국 H가 방관한 남학생에 대해 한 “성폭력 공범” 주장은 거짓임이 재판에서 여러 증거를 통해 드러났다.14 그래서 ‘피해자 지지모임’까지 만들었던 H의 대리인은 법정에 다음과 같은 진술서를 제출했다. “[H의] 주장을 사실처럼 쓴 부분이 있거나 신원 보호에 충분히 유의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면 이는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며, 이모 씨[동영상을 보여 준 남학생]와 정모 씨[동영상 보여 주는 현장을 방관한 남학생]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H의 말만 믿고 ‘피해자 지지모임’을 만들었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15

민주노총 전 울산지역본부장 K 사건은 또 다른 사례다. 이 사건은 ‘민주노총의 오른팔’이라고 불리는 금속벨트 핵심 도시 울산의 지역본부장이 관련된 강간 혐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결코 사소하게 취급할 수 없다. 이 일로 당시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K)·수석부본부장·사무처장이 사퇴했으며, 민주노총은 내부에서 “성폭력”이 발생한 점에 대해 사과하는 입장을 공개 발표하기에 이른다(2015년 7월 24일). 또한 위선적이게도 〈조선일보〉 등 우파 언론들은 “도마에 오른 노동계 도덕성” 운운하며 민주노총을 흠집 내는 데 이 사건을 이용했다.

이 사건의 피해호소인은 K와 사귀는 동안 “성폭력”과 “언어폭력”을 당했다고 SNS에 호소했다(이때 K는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사임했다). 이 사실을 인지한 민주노총 담당자들의 개입으로 피해호소인 H의 요구에 따른 사과문이 작성되고 징계도 결정됐다. 당시 K는 강간만큼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민주노총의 이 사건 담당자들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원칙으로 삼아 H의 주장과 요구에 따라 징계와 공개사과문 작성을 처리하다 보니 K의 애초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16 결국 K 명의의 사과문 내용에는 단지 “언어폭력”뿐 아니라, “[H의] 의사에 반하여 성관계를 한 것”(즉, 강간)도 포함됐다. 이렇게 이 일은 ‘강간 사건’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민주노총을 흠집 내 노동운동을 약화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지배자들은 여성 차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으면서 이 사건을 잘도 악용했다. 검찰은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폐지된 것을 이용해)17 K를 강간죄로 기소했고, K가 고용된 현대차 사측은 강간 혐의를 빌미로 그를 해고하려 했다.

그러자 K는 재판에서 자신의 애초 주장, 즉 성관계는 합의에 의한 것이었고 연인관계였던 H가 결별 후 배신감에 말을 바꾼 것이라는 점을 재판에서 여러 증거를 들어 입증했다. 그가 제출한 증거에는 이 사건과 직결된 H의 일기와 문자메시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K는 민주노총 웹사이트에 게시된 자신의 사과문 내용 중 강간 ‘인정’ 부분은 자신이 계속 부인했던 내용이지만, H와 사건 처리 담당자의 요구에 의해 동의하지 않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점을 입증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K측은 사건 처리 담당자와 K가 사과문 내용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증거로 제출했다. 사건 당시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여성위원장도 법정에서 ‘민주노총 사건 처리 담당자의 요구에 따라 K가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사과문에 적시되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18 재판부는 위와 같은 증거들을 종합해, K의 사과문 내용이 곧 강간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결국 강간 혐의는 1·2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이 사건은 피해호소인의 일방적 주장과 요구가 면밀한 진상조사를 대체해선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민주노총 내에서 K 사건 조사 과정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라 피해호소인의 주장과 요구대로 진행됐다. 이것은 가해지목인 측의 충분한 소명이나 증거 제출 자체를 어렵게 (그리고 불필요하게) 만드는 조건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고, 심지어 양심에 반하는 진술 압박 의혹까지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위의 사례들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 문제는 흔히 내밀한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복잡한 감정을 동반하는 문제이므로, 일방의 말만 믿고 성급하게 진상을 단정해서는 안 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진짜 성폭력 피해가 부정 당하는 일도 없어야 하지만, 또한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도 없어야 한다. 억울하게 성폭력범으로 몰린 사람이 겪는 고통과 피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2017년 3월 성추행범으로 누명을 쓴 동아대 한 교수가 억울한 마음에 자살하는 비극적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누명은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인생을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제대로 된 증거나 진상조사조차 없이 한 사람을 성폭력범으로 단죄하는 것은 반인권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일로서, 사회 진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해선 안 되는 일이다. 특히, 대중에게 성폭력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증거주의와 피해호소 여성 진술 존중의 종합

성폭력 피해를 정당하게 인정받으면서도 엉뚱한 일이 성폭력으로 부풀려지거나 애먼 사람이 누명 쓰는 일도 없으려면,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어도 여성의 성폭력 피해가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대안이 있다.

필자는 ‘증거주의와 피해호소 여성 진술 존중의 종합’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안한다. 주관주의에 바탕을 둔 ‘피해자 중심주의’는 증거주의로 대체돼야 한다. 증거주의는 물증만이 성폭력 입증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물증 지상주의와는 다르다. 물증만이 아니라 진술도 증거다. 여성의 진술도 중요한 증거의 하나다. 단, 피해호소인의 진술일지라도 그 일관성과 타당성을 따져 봐야 하고 관련자들의 증언과 물증도 확인용 근거로 포함시켜야 한다. 이런 대안은 지나친 가해자 존중이나 물증 지상주의를 배척하면서도, 주관주의가 낳을 위험도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성폭력 범죄의 경우 당사자들만 있는 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 피해호소 여성의 진술만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인 경우도 있다. 특히 진보·좌파 단체의 진상조사 기구나 규율 기구는 경찰이나 검찰과 달리 수사권이 없어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출하도록 강제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처럼 여성의 진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모든 면에서 불충분하면, 진보·좌파 단체의 진상조사 기구나 규율 기구는 성폭력인지 아닌지 자체는 판단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증거 불충분’이 곧 남성이 무죄라는 뜻은 아니다. 나중에라도 여성의 진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나온다면 재조사와 재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증거가 불충분해 성폭력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이미 밝혀진 사실에 한해 가해지목인 남성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19

이처럼 증거주의를 기초로 하면서, 더 나아가 여성의 피해호소가 무시되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성차별적이거나 성의 없는 수사기관의 태도를 바꾸도록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도전해야 한다. 피해 여성들이 자기 진술을 입증할 여러 객관적 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고 이를 위한 사회적 제도들을 확충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세계적으로 모든 나라의 여성운동에서 쓰이는 개념도 아니거니와, 이 개념을 사용한 미국의 피해자학에서조차 피해호소 여성의 인식과 감정을 중심으로 사건의 진상을 판단하고 해결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피해자 중심주의victim-centered approach’는 피해자 치유의 과정에서 피해 여성의 회복을 돕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는 증거주의와 객관성 그 자체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여성의 동의 없이 성추행이나 강간을 했느냐’ 여부를 무시하고, 남성의 의도나 사건과 무관한 여성의 ‘행실’ 따위로 여성 진술의 신뢰성을 깎아내려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려 드는 것이다. 따라서 증거주의와 객관성을 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체적 진실을 찾아 성폭력을 판단하는 게 필요하다.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의 말이 참말이고 증거주의가 ‘물증 대라’는 식으로만 편협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객관적 실체를 중시하는 것은 여성에게 전혀 불리한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성폭력 사실의 객관적 존재 여부를 검증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것이 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면, ‘역시 성폭력 피해 호소는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라는 편견이 강화돼 의도치 않게 진짜 성폭력 피해자들이 공연히 의심받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성폭력 반대 운동이 부적절한 동기에 의해 악용되거나 우스꽝스럽게 될 수도 있다(앞서 언급한 사례들이 다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객관적 실체를 중심으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앞으로 피해 호소를 하게 될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또한 진보·좌파 운동의 신뢰 실추를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3장 성폭력 ‘2차가해’ 개념

‘가해자 온정주의, 피해자 유발론’을 반대한다는 취지

성폭력 ‘2차가해’라는 개념도 ‘피해자 중심주의’와 연관돼 많은 혼란과 문제점을 낳았다. ‘2차가해’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후에 가해자나 제3자에 의하여 피해자에게 추가로 피해를 주거나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된다. ‘2차가해’ 개념은 “가해자 온정주의, 피해자 유발론이 팽배한 문화 속에서 피해자를 방어할 수 있는 언어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20

앞서 살펴봤듯이, 성폭력이 유독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많은 범죄이고 실제로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피해 여성을 탓하는 일도 많이 벌어진 것이 사실이다. 2011년에는 판사가 성폭력 피해 여성을 ‘문란한 여성’ 취급해 성폭력 소송 진행 중이던 여성이 자살하는 일도 있었고, 2015년에도 성폭력 피해 신고를 접수하고 처리해야 할 서울시 공무원이 피해 사실을 신고한 여성에게 “공무원 조직에 먹칠했다”며 오히려 비난해 징계를 받는 일도 있었다.

여성단체들은 이런 사례를 “2차피해”라고 규정하며 주로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피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도입하라고 요구해 왔고, 덕분에 일부 개선된 점들이 있다. 성폭력 피해호소인에 대한 이런 보호 조처들은 당연히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단체나 직장, 대학 등에서도 실제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를 도리어 비난해 상처를 들쑤시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분명 비판(과 필요한 경우 징계를)받아 마땅한 일이다. 특히 단체의 간부가 피해자의 의사를 거슬러 성폭력 사실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시도를 했다면 이것은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징계감이다.

‘2차가해’ 개념과 그 적용 문제

그러나 그 이해할 만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2차가해’ 개념은 여러 문제를 낳았다.

첫째, 용어 자체의 모호함이다. “2차가해”라는 말은 두 번에 걸쳐 성폭력을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지 혼란을 준다. 이 때문에 한국어 사용자의 상당수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용어일 뿐 아니라, 형법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또한 “2차”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긴 해도 “성폭력 가해자”라는 말의 무게감이 매우 커서,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성폭력을 직접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종의 “성폭력 가해자”로 지칭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이런 반발은 자연스럽다(이런 난점 때문에 여성단체들은 ‘2차가해’라는 말보다는 ‘2차피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것이 과연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둘째, 성폭력 ‘2차가해’라는 개념은 단지 앞에서 언급한 실제로 부적절한 행위들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주로 ‘피해자 중심주의’를 성역화하기 위한 방호벽으로 사용돼 왔다. 피해호소인의 말은 어디까지나 입증과 판단을 거쳐야 하는 진술임에도, 합리적 의문을 던지며 진상 규명을 하려는 노력도 ‘2차가해’로 규정되곤 했다. 이처럼 피해호소인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지 않으면 ‘2차가해’ 논리에 따라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진상조사를 통해 “1차가해”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를 규명하고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전에 먼저 ‘2차가해’ 비난을 하는 경우도 흔했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르고 성폭력 개념을 무차별적으로 확대하면 피해호소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그 가운데는 “성폭력 2차가해자”도 여럿 생겨나게 된다.

‘2차가해’ 개념과 ‘피해자 중심주의’의 긴밀한 연관성 때문에, 2장에서 언급된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사례들은 대부분 ‘2차가해’ 개념의 문제도 함께 드러냈다. 가령 이른바 ‘서울대 담배 사건’은 “줄담배를 피며 이별을 고한 것이 성폭력”이라는 주장에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줄담배를 핀 남성이 속한 좌파단체 소속의 또 다른 여성 Y21는 이것을 성폭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옳게 주장했다. 그러자 피해호소 여성과 그가 속한 페미니스트 모임은 여성의 감정을 성폭력 판단의 기준으로 본 나머지, Y를 “성폭력 2차가해자”로, 줄담배 핀 남성과 Y가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단체를 “성폭력 2차가해 단체”로 규정해 버렸다. 제대로 된 토론·진상규명·소명 기회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2장에서 설명한 A단체(=노동자연대)의 사례도 유사하다. H가 ‘동영상 사건’에 대해 말을 바꾸고 왜곡과 비약을 하자, H를 아는 극소수 학생회원이 거의 즉각적으로 SNS에서 사실관계를 바로잡으며 공방을 벌였다. 이는 단체와 전혀 상의하지 않은 몇몇 개인들의 행위였고, 이조차 단체 운영위원회의 호소로 중단됐다(진실 공방을 한 댓글의 내용이 ‘2차가해’여서가 아니라 소모적인 온라인 말싸움이라는 수단의 부적절함이 문제였다). 그런데도 H와 그 지지모임은 노동자연대 일부 회원들이 H 주장의 신뢰성에 합리적 의문을 표했다는 이유로 “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게다가 노동자연대는 동영상 사건의 방관조차 문제 삼아 당시 신입회원이었던 남학생을 징계(경징계)했다. “노동자연대가 조직적으로 성폭력을 옹호·은폐했다”는 말은 아무 근거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H와 그 지지모임은 H의 일방적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고 ‘동영상 사건’을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성폭력 2차가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다른 단체들에게 노동자연대를 각종 연대 활동에서 배척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문제의 동영상을 보여 준 장본인(노동자연대 회원 아님. 그는 강제로 보여 준 바 없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에 대한 언급은 어느새 사라지고, 애초 사건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노동자연대 단체만이 비난의 표적이 됐다. 그래서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여러 페미니스트들과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이게 왜 노동자연대 사건인지” 의아해 했던 것이다.

최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된 또 다른 사건도 있다. 한 웹툰 작가가 “강간 사주자”, “강간 방조자”로 지목돼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다(이른바 ‘〈미지의 세계〉 사태’). 이 작가가 ‘페미니스트 작가’로 주목을 받아 왔던 터라 큰 파장이 일었다. 실제로 이 작가가 강간을 사주했는지는 알기 어렵다(그 자신은 강간을 방조·알선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상이 제대로 파악되기도 전에, 피해를 당했다는 여성의 주장만으로 이 작가의 작품이 ‘게시 중단 및 폐기’됐다. 이 작가의 작품을 표지로 사용한 출판사가 시중에 나온 잡지를 ‘전량 회수 및 폐기’하고 새로운 표지의 잡지로 구입자에게 교환해 주는 일이 뒤따랐다. 이때 “피해자 대리인”을 자처한 한 트위터 계정은 이 작가의 해당 만화를 본 사람들도 “2차가해”, “공범”이라는 주장을 했다. 이것은 ‘2차가해’ 개념이 얼마나 자의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 또 다른 사례다.

이 사건은 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문제로 토론회22를 열게 된 계기의 하나였던 듯하다. 이 토론회에서 문화연구자 오혜진은 사실 확인도 없이 〈미지의 세계〉 작가가 ‘미성년자 강간 모의 및 웹툰이라는 형식의 리벤지포르노 제작’이라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전제하고 그의 작품이 신속히 삭제되고 그의 작품을 소비한 사람들까지도 단죄의 대상이 되는 방식에 문제제기를 했다.

이런 식으로 ‘2차가해’ 개념은 원래의 사건과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도 모종의 성폭력 공범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때때로 ‘성폭력 2차가해’ 개념은 마음에 들지 않는 개인과 단체를 매도하거나, 어떤 단체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입막음하는 데도 악용될 수 있다.

셋째, 그러다 보니 “‘2차가해’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안” 하는 효과가 생기고 도덕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심지어 “성폭력”이라고 지칭되는 사건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할 때조차 “2차가해”가 될까 두려워 사건의 진상을 언급하지 않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듣는 사람은 이 사건의 실체를 전혀 알 수 없어 성폭력인지 아닌지도 판단할 수 없다. 결국 모든 것을 판단할 권한이 있는 유일한 사람은 피해호소인(과 그 대리인) 뿐이게 된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도 ‘2차가해’ 개념이 “금언령, 금지령”, “일종의 공포정치”가 됐다고 평가한다.23 여성학자 김주희(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는 최근 ‘〈미지의 세계〉 사태’를 보고 큰 문제의식을 느껴 이렇게 개탄했다. “독자가 이자혜[〈미지의 세계〉 작가]의 그림이 표지로 실린 잡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2차가해라고 합의되었던 당시의 상황 … 해당 작가의 작품에 대한 전량 폐기, 전량 회수, 교환, 환불, 삭제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동의하는 것이 성폭력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윤리적 개입 방식이라 믿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자 했습니다.24 “페미니즘이 도덕적 잣대가 되고 있다. 페미니즘 정치는 실종되고 그것은 극화된 도덕률의 명암 속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갑과 을, 가해자와 피해자만 감별하고 있을 뿐이다.25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소속의 한 활동가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얘기한 바 있다. “피해자가 성폭력 사건을 접수하는 순간 진상조사위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 사건은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되고, 처리된다. … 피해자의 요구사항이 과도하다고 말하는 순간 담당자는 피해자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으로 갈라진다.26

이처럼 사람들 사이의 필요한 토론과 논쟁을 가로막고 도덕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지게 만든다는 점이 ‘2차가해’ 개념이 낳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심지어 피해호소인을 재빨리 지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2차 성폭력 가해’로 낙인 찍히는 상황이면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고 여기는 게 자연스럽다. 피해호소인(또는 그의 대리인)에게만 해석과 판단의 권한을 주고 다른 이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반성하라는 분위기, 많고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로만 밀어넣는 이런 관행은 매우 비민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2차가해’ 개념은 더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대신, 실제 성폭력 사건을 보고하거나 또는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개인이나 기구가 성폭력 피해호소를 묵살하거나 방해·축소·은폐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을 때, 그 행위의 경중에 따라 징계하면 된다. 이때, ‘피해호소 묵살’, ‘성폭력 사건 은폐’ 등 각각의 구체적 행위를 명시하면 된다.

4장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논쟁

개념을 선용·보완하면 되지 않을까?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의 여러 부작용을 경험하면서, 두 개념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이것을 무분별하게 적용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부작용의 사례들은 개념의 본뜻을 오해해 벌어진 결과일 뿐이고 오남용만 주의하면 된다’는 주장이 많다. 결국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므로 폐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 제시를 반대하거나, 망설이거나, 절충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귀결되곤 한다.

특히,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서는 여러 옹호 논리가 있다. 대체로 ‘개념은 문제 없다, 오남용만 막으면 된다’는 취지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용어 자체가 보여 주듯, 결국 피해호소 여성의 인식을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여성의 ‘인식’ 대신 ‘주장, 감정, 경험’ 등으로 바꿔 불러도 마찬가지다). 즉, ‘피해자 중심주의’는 그 자체가 증거주의 대신 주관주의를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주의를 고수하는 한, 앞서 지적한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오남용만 안 하면 그만’이라는 주장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처음부터 내포한 주관주의의 문제점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여성이 불쾌하면 성폭력’이라거나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은 언제나 옳다’는 주장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오남용 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원래 의도를 가장 순수하게 이해하고 적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피해호소 여성의 주장에 유일하고 확실한 증거, 입증이 불필요한 진실의 권위를 실어 주려는 의도 말이다. 이처럼 말 자체에 내포된 뜻은 그 말의 사용자 중 일부가 아무리 “새로운 해석”을 제안해도 없애거나 희석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고유의 뜻을 없애거나 희석하고자 한다면 왜 굳이 그 말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개념과 용어를 ‘그때그때 맥락에 맞춰 쓰자’며 실용주의적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물론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점을 잘 포착하고, 부분적으로 보완하려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어, 여러 페미니스트들은 “합리적 여성의 관점”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미국 법원이나 “평균적인 여성 노동자의 감정”을 기준으로 제시한 일본 후생노동성의 사례 등을 소개한다.27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런 기준에 따라 성희롱 여부를 판단한다. 피해를 호소했다고 해서 무조건 옹호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평균적 여성이라면 충분히 심각하다고 여길 만한 행동인지’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합리적”·“평균적” 여성의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는 대안에는 분명, “여성이 불쾌하면 무조건 성폭력”이라는 극단적 주관주의를 넘어서려는 합리적인 취지가 있다. 그럼에도 이 제안도 여전히 주관주의에 기초하고 있어 약점이 있다. 우선, “평균적” 여성이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평균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어도 여전히 객관적 실재 자체를 판단하려 하기보다 여성의 관점과 견해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에 문제가 남는다.

예컨대, 상사가 ‘여성이 따르는 술이 맛있다’면서 여직원에게 술을 따르게 했는데도 보통의 여성들이 이를 당연하게 여겨 불쾌하게 느끼지 않았다 해서, 그 행위가 성희롱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평균적” 여성들이 불쾌감을 느꼈을지라도 그것이 곧 성폭력이나 성희롱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단지 성에 대한 보수적 인식이나 감정적 혼란 때문에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혼외 연애에 대한 일부 여성들의 반감 때문에 성관계 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남성이 비난받는 경우도 있다(앞서 사례로 든 민주노총 전 울산지역본부장 K가 동료 민주노총 활동가들로부터 백안시된 건 그가 받은 강간 혐의 ─ 나중에 무죄로 판결된 ─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혼외 연애 때문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문제연구소 변혜정 전 소장도 “합리적 여성 관점”의 이런 난점을 지적한 바 있다. “합리적인 여성의 관점에서 그 언동이 성적으로 모욕감을 준 것인지를 판단”하는 성희롱 성립 규정은 그것을 경험하는 ‘감수성’의 문제와 연결돼 있어 객관적 판단이 불가능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기준보다는 “그 행위가 집단 내의 평등권을 침해하였는가, 그리고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8

한편,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호소인의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지 무조건적인 신뢰는 아니’라고 해석하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1차적으로 신뢰’하는 행위는 의도치 않아도 무조건적 신뢰로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한쪽 말을 일단 믿고 진상조사를 한다면 실제 현실에서는 진상조사가 요식행위가 돼 버릴 수 있다. 게다가 진상조사 전에 일단 피해호소인을 “1차적으로 신뢰해” 사건이 성폭력이라고 먼저 규정해 놓으면, 나중에 진실을 바로잡는다 해도 되돌리기 힘든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인터넷의 익명성을 이용한 무책임성이 이런 일을 더 쉽게 한다. 이미 공개적으로 “성폭력 가해자”라고 소문이 퍼져나갔다면(인터넷의 발달로 이것은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나중에 결백이 입증되더라도 실추된 명예를 되돌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근래 몇 년 동안 진상조사도 없이 벌어진 몇몇 온라인 비난이 이런 문제점을 보여 줬다.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의 지지자들은 설사 문제가 있다 해도 소수 사례일 뿐이지, 여전히 대중에게는 유익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험 많은 활동가들은 한국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초래한 혼란과 역효과가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을 잘 안다. 사실, 현재의 주요 진보·좌파 단체들(노조와 정당 포함) 중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에 따라 홍역을 치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물론 진정한 성폭력 사건은 제외). 어떤 소규모 급진좌파 노동단체들은 이런 문제들로 심각한 내분을 겪으며 와해되기까지 했다.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조차 피해호소인 요구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2차가해자’로 지목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중에는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지목된 경우도 있어 보인다. 이런 점을 직시한다면,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점을 그저 ‘부수적 피해’ 취급하며 외면해선 안 된다.

설사 위의 두 개념이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비교적 소수라 해도, 소수가 겪는 일이라는 이유로 문제를 경시해선 안 된다. 사회 진보를 바라는 활동가라면 잘못된 개념과 방법으로 인해 당장은 소수만이 고통받을지라도 마땅히 그런 일을 막고자 해야 한다. 부당하게 성폭력 가해자(또는 가해단체)로 낙인 찍힌다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우리가 성소수자나 장애인, 이주민이 단지 인구의 상대적 소수라 해서 이들이 받는 천대 문제를 ‘나중’으로 미뤄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정의는 단순히 ‘절대 다수의 절대 행복’식 공리주의에 그쳐선 안 된다.

게다가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은 그 도덕적 권위주의 문제 때문에 단지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뿐 아니라,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 전반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앞서 살펴봤듯이, 두 개념은 피해호소인의 주장을 성역화해 어떠한 합리적 의문과 토론도 봉쇄하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 그래서 동의하지 않아도 ‘그냥 피해호소인 말대로 해 주는 게 괜한 시비에 휩싸이지 않는 편안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조성한다(“찍히면 죽는다”). 결국 여성 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대중의 감수성과 인식이 성장하길 바랐던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이 개념들은 우리를 역효과와 완전히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해도, ‘2차가해’ 개념을 완강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인식이 아예 ‘발화’되지 않으니 그 자체가 성과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애초에 이런 목적을 의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잘못된 주장만 발화되지 않는 게 아니라, 합리적 토론도 발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주장은 대중 의식의 불균등 발전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여성 차별이 체계적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차별적 인식이 광범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진정 중요한 문제는 대중의 불균등한 의식 발전이다. 사람들의 의식은 고정불변이 아니고 변한다. 이 과정에는 스스로 투쟁해 얻은 경험과 함께, 다른 사람들과 벌이는 토론과 논쟁이 중요하다. 잘못된 인식을 ‘성폭력’으로 규정해 무조건 침묵시키기보다는 잘못된 인식이 드러났을 때 토론과 논쟁을 하고, 무엇보다 공통의 요구를 위해 함께 투쟁하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기존의 잘못된 인식도 교정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일부 문제가 있었어도 그나마 이 개념들 덕분에 성폭력에 맞서 잘 싸울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성폭력에 반대하는 효과적인 운동은 대체로 ‘피해자 중심주의’를 채택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피해자 중심주의’가 도입되고 나서야 비로소 성폭력에 대한 보수적 편견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분출한 1970년대에 성폭력은 여성 차별의 한 형태로 이미 인식됐고, 19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파업을 계기로 여성운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성폭력에 대한 보수적 편견에 반대하는 운동들도 활발히 벌어졌다. 당시에 성폭력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로 규정한 운동은 ‘피해자 중심주의’나 ‘2차가해’ 개념 없이도 가능했다.

끝으로, 성폭력 개념을 과잉 확장하는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계급 투쟁에 미치는 정치적 효과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단지 여성 개개인을 (‘약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편들어 주기 위해 성차별 반대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폭력과 여성 차별, 소외 없는 사회를 이룩하고자 해야 한다. 여성 차별과 소외는 그저 개개인들의 태도와 취향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방식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차별을 없애려면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해야만 한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분열해 파편처럼 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과잉 확장돼 모호하기 이를 데 없고 필요한 토론을 억누르는 성폭력 개념들은 노동계급의 단결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소통과 토론, 논쟁을 가로막거나 왜곡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성폭력 가해자’ 색출에 골몰하게 만들어 내향성과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다.

진정한 성폭력을 처벌하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노동계급 속에서 여성과 남성의 단결, 그리고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다른 사회집단들의 연대를 위해서 진정한 성폭력에는 단호히 반대하고 엄격하게 규율을 부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라 엉뚱하게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해자 딱지 붙이기를 하는 것은 우리 운동의 표적을 성차별을 낳는 체제와 그 수혜자인 지배계급이 아닌 우리 피억압자들 내부로 향하게 만들어, 차별에 반대하는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이고, 또 현실의 삶이자 실재인 계급 투쟁을 흐리거나 파편화시키는 분열주의적인 개념을 설파하지 않는 것이 성폭력 반대 운동에도 도움이 된다.

최근 페미니즘 내 평가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한편, 최근 페미니즘 내부에서 그 한 쌍의 개념에 대한 주목할 만한 자성적 평가도 나오고 있다.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평가, 100인위를 이끌었던 페미니스트 전희경 씨와 여성주의 학자 권김현영 씨(이하 존칭 생략)의 평가 등이 두드러지는 사례다.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주최 토론회 ‘2017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에서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이소희 활동가(이하 존칭 생략)는 ‘성폭력 2차가해’ 개념의 난점에 대해 일리 있는 지적을 했다. ‘2차가해’ 개념은 성폭력에 대한 공동체의 잘못된 문화를 바꾸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개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개념이 만들어진 목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함께 확인하였다.29 때때로 피해자의 말이 절대화돼, 피해자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행위 자체가 ‘2차가해’로 명명되기도 하고, 개개인을 ‘2차가해자’로 낙인 찍고 배제·처벌하는 방식이 소통을 가로막아 공동체 내에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며, ‘2차가해’ 논란에 집중돼 정작 원 가해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미 2009년에 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의 제안으로 여러 성폭력 상담소 활동가들이 비공개 집담회를 진행했다고 한다. 거기서 “집담회에 참석한 단위부터라도 ‘2차가해’라는 용어 사용을 지양하자는 공동의 합의를 하였다30(당시의 논의가 훨씬 폭넓게 공유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SNS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논쟁을 계기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말하여야 한다”고 느꼈고, “이렇게까지 개념이 잘못 작동되고 있다면 이 개념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31

이소희는 피해호소인의 ‘성폭력’ 주장에 대해 ‘왜 그것이 성폭력인지’ 반문하는 사람들에게 2차가해 낙인을 찍기보다는 ‘그것이 왜 문제인지’ 설명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실로 낙인 찍기보다는 설명과 소통이 도덕주의적 분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이 대안에는 남는 문제들이 있다.

첫째, 만약 공동체 내에서 실제로 성폭력·성추행·성희롱 등이 벌어졌을 때 사건을 접수·보고·처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보수적 편견에 근거해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고 사건을 묵인·은폐한다면 이는 단지 차근차근 ‘설명’할 문제가 아니라 징계감이다(이 점은 민우회 활동가들도 동의할 것이다).

둘째, 객관적 실체 면에서 성적 가해 행위라고 보기 힘든 문제를 여성이 “성폭력”이라고 주장할 때의 문제가 있다. 그때는 단지 ‘왜 여성이 그렇게 느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이 책 2장 2절의 사례들 참고). 이런 경우는 (왜 성폭력인지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폭력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피해호소 여성의 감정에 따라 주관주의적으로 성폭력 규정을 내리게 되면, 소모적인 논란에 빠지고 소통이 불가능해질 위험이 여전히 남게 된다.

셋째, 만에 하나 피해호소인이 감정적 혼란이나 부적절한 동기로 인한 진실 왜곡이나 거짓 폭로를 하는 경우에도 위와 마찬가지로 단지 ‘왜 여성이 성폭력이라고 느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이 역시 이 책 2장 2절의 사례들 참고).

이런 점들을 살펴보면, 결국 ‘2차가해’라는 말을 더는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여성의 인식과 감정을 중심으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여전히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쟁점은 결국 피해자 중심주의의 적절성 문제와 함께 토론돼야 한다. 2011년의 다른 토론회32에서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은 ‘피해자 중심주의’(또는 ‘피해자 관점’)가 진상조사를 어렵게 만드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극복할 대안이 아직 분명히 제시되진 않는 듯하다.

권김현영 또한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낳은 주관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33 “피해자의 주관적 느낌은 가해자 중심 사회에서 판단을 할 때 중요한 참조이자 증거로 사용될 필요가 있다 …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사가 반드시 필요한데, ‘2차 가해’라는 개념이 조사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이후의 논의를 막는 데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주장들은 한 쌍의 개념들의 문제점을 잘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권김현영은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도덕적 권위주의의 문제를 낳는다는 점도 비판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독점적 해석과 무조건적인 지지”로 이해돼 “모두가 손을 들고 피해자라고 얘기하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불가능해지고”, “모든 것을 ‘편들기의 정치’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상황과 해석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행동이나 ‘재빨리’ 지지를 표명하지 않는 행동까지 모두 ‘2차가해’로 지목하는 일마저 벌어지는 지금의 현실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34

권김현영은 두 개념이 “이제는 부수적인 피해 수준을 넘어 해악을 끼치는 측면이 많아지고 있는 듯하다”“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반지성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 새로운 원칙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2차 가해’나 ‘2차 성폭력’ 같은 용어의 사용은 가능한 지양해야 한다”고 밝혔다35(강조는 인용자).

권김현영이 특히 최근 들어 이 두 개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계기는, 스스로 밝혔듯이 ‘이 개념이 우리 페미니스트들의 목을 치고 있어서’인 듯하다. 실제로 최근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근거도 부족한 상태에서 ‘2차가해자’로 지목된 경우가 있어 보인다. 이러려고 2차가해 개념을 만든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봤듯이, ‘2차가해’-‘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미 20년 가까이 노동운동이나 좌파운동 속에서도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을 자아낸 경험이 있다. 따라서 두 개념에 대한 권김현영의 비판과 소신이 비 페미니스트들, 좌파나 노동운동 단체에도 일관되게 적용되길 바란다.

권김현영은 ‘2차가해’ 용어 사용을 지양하자고 제안하면서 ‘2차피해’라는 용어는 계속 사용하자고 했다. “형사사법 절차 과정에서 경찰이 피해자의 말을 성통념에 의거해 불신하거나 피해자가 가족 등의 조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소외나 배제를 경험하는 일, 법정에서 판사가 가해자의 미래를 걱정하고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는 일 같은 것이 대표적인 2차 피해”라고 한다. 또한, “피해자가 의료 조치를 받지 못하거나 적절한 배려와 설명을 듣지 못하는 것, 언론이 사건을 잘못 재현해서 피해자가 꽃뱀 취급을 받게 하거나 선정적인 표현으로 사건 자체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것 역시 2차 피해에 해당한다”고 한다.36

분명 권김현영이 든 ‘2차피해’의 사례들은 우리가 반대해야 할 행위들이다. 또한 ‘2차피해’ 개념은 ‘2차가해’보다는 덜 무차별적이고 덜 불합리한 면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의문이 꼬리를 문다. ‘피해’는 ‘가해’와 서로 대응하는 개념이므로 ‘2차피해’라는 말은 ‘2차가해’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전제하게 되지 않는지, 그렇게 되면 ‘2차가해’라는 말 자체가 가진 기본적인 난점(성폭력을 직접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도 모종의 ‘성폭력’ 가해자로 규정된다는 점 등)이 남지 않을지, 차라리 구체적인 문제적 행위들을 따로 명명하는 게 더 낫지 않을지, ‘2차피해’ 개념이 국가기관과 언론 등에만 제한적으로 해당되는 것인지 이른바 ‘공동체’ 내에서도 적용되는 것인지 등등.

권김현영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서도 그 자신의 대안을 제시했다.37 그는 ‘피해자 중심주의’와 ‘피해자 관점’을 구분한다. 그리고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 치유의 과정에서 “피해자와 피해자를 돕고자 하는 조력자”에게는 필요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건을 해석하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를 결정할 때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라 ‘피해자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피해자 관점’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누가 그 입장에 있더라도’라는 의미라고 한다. 여성의 다수가 그 처지가 돼 봤을 때 성폭력이라고 여길 만한 행동이면 그렇게 규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피해자 관점’은 ‘무조건 피해 호소 여성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무분별한 ‘피해자 중심주의’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개념도 주관주의를 내포하고 있어 대안이 되기는 어려울 듯하다. 권김현영은 ‘피해자 중심주의’의 난점을 보완하려고 ‘피해자 관점’이라는 말이 새롭게 만들어졌어도 “한 번 만들어진 말이 사라지지 않은 채 통용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인정했다.38 대체 용어를 개발해도 ‘피해자 중심주의’의 관성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지 관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앞서 살펴봤듯이 대체 용어가 여전히 주관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대체 효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이 허위사실을 말하면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무기력한 난점이 있다.

한편, 권김현영은 1990년대와 달라진 사회적 조건도 ‘피해자 중심주의’를 재고할(피해자의 치유라는 목적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이유라고 지적했다. 지금은 “20년 전만큼 성폭력 피해에 대한 낙인이 강력하지 않”고, “법제도가 만들어지고, 의료적 사법적 사회복지적 차원에서 피해자 권리가 최소한이나마 보장되면서 피해 자체에 대한 증언이 사회적인 자원으로 교환될 수 있는 여지도 생겨났다.39

권김현영이 염두에 둔 변화된 사회적 조건은 성폭력 문제를 접근할 때 고려할 점인 듯하다. 지난 30여년 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여성운동의 힘이 강화된 결과, 과거에 비해 성폭력에 대한 법제도적 보호절차나 성폭력에 대한 공공기관의 태도가 조금 개선된 면이 있다(물론 여전히 미흡한 점들이 많아, 개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성폭력 피해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노골적인 천대를 받기 일쑤였던 시절과는 달리, 피해자를 존중하는 최소한의 절차들이 생겨나고 피해자에 대한 인식도 개선된 점이 다소 있다. 이것은 작지만 명백한 진보다.

그런데 비록 아주 소수지만, 개선된 제도나 절차들을 개인적이고 부적절한 동기에 이용하는 여성들도 생겨났다. 의도치 않은 부산물인 셈이다. 게다가 진보진영에서는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처럼 아예 피해호소 여성의 주장만을 근거로 사건의 실체를 판단하겠다는 분위기마저 확산됐으니 악용의 여지가 더 늘 수 있게 됐다. 물론 이런 사례는 여전히 소수겠지만, 한 명이라도 억울한 누명을 써선 안 될 것이므로 이런 부작용을 방지할 대안은 필요하다.

100인위 평가 문제

같은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토론회에서 전희경은 100인위를 이끌었던 당사자로서 100인위의 경험을 평가하는 발제를 했다. 그는 최근 출간한 책에 실린 한 글에서 100인위 활동의 문제점을 일부 반성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40

전희경의 경우, 이 개념들을 확산시키고 심각한 파장을 일으킨 장본인이 한 자성적 평가라는 점이 그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법하다. 100인위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성폭력 사건의 의미 구성과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인 여성의 주관적 경험에 진실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행위의 객관적 실체보다는 여성의 불쾌한 감정에 따라 성폭력을 규정했다. 성폭력 개념 무한 확장과 ‘피해자 중심주의’의 가장 ‘순수한’ 버전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100인위는 운동권이 ‘성폭력 무풍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들춰 낸다며 실명 공개라는 충격 요법도 사용했다(심지어 피해 여성이 공개를 원치 않아도 그렇게 했다). 당시 이름난 남성 활동가들을 골라서 폭로해 언론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운동 내 성폭력을 없애겠다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100인위의 활동 방식은 그런 취지를 무색케 했다. 터무니없이 모호한 성폭력 개념으로 남성 개개인들을 공격하는 데 몰두했고, 여성 차별을 낳는 사회에 맞서 싸우는 데 초점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희경도 “[당시에는] 반성폭력 운동가들과 대화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보다, ‘진보’ 운동권들을 향해 정확하고 날카로운 일격을 가하는 것에 좀 더 관심이 있었다”고 회고했다.41

그러나 지나치게 포괄적인 성폭력 개념으로 인해 100인위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효과도 내지 못했다. “100인위가 성폭력 사례로 발표한 16건을 찬찬히 뜯어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성폭력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사건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 《말》(2000년 12월호)에도 보도된 바 있는 ‘전 오늘의 책 총무 사건’은 분명 공분을 살 만한 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타 사건이지 성폭력은 아니다. 싫다는 여성에게 계속 전화하고 따라다니며 집요하게 구애한 사건,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맺거나 애무를 해 상대 여성에 대한 감정이 진실한 것인지 의심받게 된 한 총학생회 간부의 행동 역시 성폭력이라 보기 힘들다. 농활에서 한 여학생을 성추행한 마을 아저씨에게 실명 사과 대자보를 붙이도록 강제하는 일을 거부한 총학생회 간부의 행동(‘2차 가해자’로 지목된)은 격분할 일이긴 하지만 성폭력이라 볼 순 없다. 콘돔으로 장난을 친 행동도 성폭력과는 거리가 멀다.42

100인위가 불명확하기 이를 데 없는 성폭력 개념에 따라 진상조사도 없이 운동 내부를 겨냥해 무차별적으로 사건과 실명을 공개하는 것을 보며 많은 활동가들은 반감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반성폭력 운동의 전사들’ 앞에서 이견을 말하는 이는 매우 드물었다. 성폭력 가해자를 비호하는 사람이거나 성폭력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은 그런 권위주의적 분위기에서 진보진영 안에서 정착됐다. 한편, 여성 차별에 눈곱만큼도 관심 없고 오히려 차별을 부추기는 우파 언론들이 100인위의 폭로를 악용해 진보운동을 공격하는 소재로 삼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전희경은 최근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 모두, 의도한 것과는 (다른) 문제적 효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100인위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43(강조는 인용자). 그는 “구체적인 개별 피해자의 진술 그 자체가 ‘객관’인 것처럼 오도”되는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점과 관련 있다고 돌아봤다. ‘2차가해’ 개념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여러 해에 걸쳐, ‘2차가해’라는 말이 조직 내 구성원들의 인식을 제고하기보다는 ‘피해자의 의사’를 제외한 모든 공적 논의를 종료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했다는 사례들이 들려 왔다. … ‘2차가해’라는 단어가 여성들에게조차 성폭력에 대한 질문이나 공적인 토론 자체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 더 나쁘게는 우연히 피해자 대리인이 된 사람에게 지나친 책임을 전가하거나 반대로 전횡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례가 여럿 있다는 걸 알았[다.]44

하지만 일관성 없게도 이런 두 개념에 대한 비판적 지적이 정작 100인위가 다룬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평가하는 것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전희경은 전반적으로 100인위를 방어적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사건 ‘폭로’를 통해 ‘운동권 가부장제’를 ‘공론화’하겠다는 것이 애초 100인위의 목적이었고, 이런 맥락에서 (비록 엄밀함은 떨어졌어도) 100인위가 초기에 사용한 개념과 방식은 어느 정도 불가피성이 있었다고 전희경은 평가한다. 그리고 이 두 개념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공론화’를 위한 “운동의 언어”로 사용되지 않고 “[성폭력 사건 해결] 절차의 언어”로 바뀌어 사용되면서부터라고 주장했다.45

그러나 100인위가 사용한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처음에는 별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다가 나중에야 심각한 문제가 됐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개념들에 바탕을 둔 ‘성폭력’ 실명 공개 방식이 불가피했던 것도 아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처음부터 100인위는 ‘여성이 불쾌하면 성폭력’이라는 식의 매우 주관주의적인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라 다른 성격의 사건들을 모두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16명의 실명을 온라인에 공개했다. 전희경이 밝혔듯이, 100인위는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가해사실은 성립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100인위 출신 장임다혜(현 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도 100인위가 사건을 실명 공개할 때 진상조사를 생략했다는 점을 인정했다.46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이 처음부터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또한, ‘운동의 언어’와 ‘절차의 언어’를 구분해 “운동의 언어”일 때는 불가피성이 있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실천적으로는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그 자체의 난점이 있다는 것인지 아닌지, 그래서 앞으로 사용하자는 것인지 남용만 하지 말자는 것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100인위가 일으킨 심각한 파장에 비춰 보면, 100인위가 공개한 사건들(과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평가해 봐야 한다. 비록 그 과정을 직시하는 것이 쓰디쓸지라도 말이다. 당시 실명 공개된 사건들을 과연 모두 성폭력으로 볼 수 있었나? 아니라면, 왜 그런가? 이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정치적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었나?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등등. 이 과정에서 부당하게 또는 과도하게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한 경우가 있었다면 정정이(그리고 사과도) 필요하다고 본다. 실명 공개가 휩쓸고 간 파장을 다 주워담을 순 없겠지만 말이다. 당시의 매우 추상적인 성폭력 개념에 따라 여전히 부당하게 “성폭력 가해자” 꼬리표를 달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생각해 봐야 한다. 무엇보다, 이런 평가는 새 세대 여성운동가들에게 남길 교훈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100인위나 성폭력 개념 과잉 확장의 배경이 된 여 vs 남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가정을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당시 성폭력 개념을 무한 확장한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이든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어든 모두 가부장제의 일부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봤다. “사랑과 폭력의 경계가 모호하고 ‘정상적’ 성관계와 ‘문제적’ 성관계가 연속선 위에 있”다는 것이다.47 이런 주장의 실천적 귀결은 모든 남성들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취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부당함의 정도가 서로 다른 행위들을 싸잡아 성폭력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성차별 반대 운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성폭력 개념 과잉 확장의 역효과에 대해선 앞에서 상세히 다뤘다). 이것은 여성 차별과 성폭력에 반대하는 남성들과 (남성 중 극소수인) 강간범을 모두 같은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공정하고, 여성 차별 반대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수많은 남성들을 소원하게 만들어 차별 반대 운동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여 vs 남 급진주의 페미니즘 정치는 차별을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사회 체제와 그 수혜자인 지배계급이 아니라, 남성 개개인에게 화살을 돌리게 만든다. 이것은 결국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여성들이 각자 개인의 삶 속에서 남성에 맞서 저항하라는 개인주의적 해결책밖에 제시할 수 없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성폭력 개념을 평가하게 되면 몇몇 부차적인 통찰들은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 여성해방을 성취할 핵심 동력인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이 개념들이 어떤 역효과를 낳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있다.48

5장 새로운 제안

새로운 개념과 그 적용

성폭력 개념 과잉 확장, ‘피해자 중심주의’, ‘2차가해’ 개념의 문제점을 인정한다면, 이 개념들을 여전히 사용하면서 단지 ‘오남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절충하는 게 아니라, 더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운동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된다.

앞서 설명한 내용들을 대안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폭력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은 성관계에서 여성의 동의 여부여야 한다. 그밖에 가해자의 의도, 여성의 ‘행실’, 저항의 정도, 정조 침해 여부 등을 중시하는 보수적이고 편협한 기준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넘어 성폭력 개념을 과잉 확장해선 안 된다. 성폭력은 ‘여성의 의사에 반해 폭력이나 위협을 통해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시도)하거나 몸을 만지는 행위’로 정의하는 것이 적절하다.

성폭력 외에 여러 수위의 성적 부적절 행위들은 “성추행”, “성희롱”, “여성차별적 발언” 등 각 행위의 특징과 수위에 걸맞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대중과 오해의 소지 없이 소통하고 각 수위에 걸맞은 대처를 하는 데서 더 효과적이다. 이것은 성폭력 반대 운동이 불필요한 오해와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더 많은 여성과 남성들의 동참 속에 이뤄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 말이 곧 강간이 아닌 다른 여성차별적 언행은 문제 없다는 주장으로 오해돼선 안 된다. 성폭력과 성폭력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은 반대해야 할 것과 반대하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증거주의로 대체돼야 한다. 증거주의는 물증만이 성폭력 입증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물증 지상주의와는 다르다. 진술도 증거다. 피해호소 여성의 진술도 증거에 포함된다. 피해호소인의 진술일지라도 그 일관성과 타당성을 따져 봐야 하고 관련자들의 증언과 물증도 확인용 근거로 포함시켜야 한다.

한편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피해호소 여성의 진술 외에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다른 증거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진보·좌파 단체의 진상조사 기구나 규율 기구는 성폭력인지 아닌지 자체는 판단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증거 불충분’이 곧 남성이 무죄라는 뜻은 아니다. 또한, 성폭력 여부는 판단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미 밝혀진 사실에 한해 가해지목인 남성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객관적 실체를 파악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무엇보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동시에, 실제 가해 행위가 아닌 일들까지 ‘성폭력’으로 부풀리는 일이나, 만에 하나 있을 수도 있는 피해호소인의 진실 왜곡이나 거짓 폭로에도 대처할 수 있다.

‘2차가해’ 개념도 더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2차가해’ 개념은 피해호소인의 말을 절대화하는 데 이용돼 진실규명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사건과 관련한 논의를 가로막고 도덕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성폭력 피해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돕는 일이나, 성폭력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묵인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규제하는 일 등은 ‘2차가해’ 개념을 무리하게 도입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성폭력 2차가해’라는 말 대신, ‘성폭력 축소·은폐 시도’, ‘피해호소 묵살’ 등 각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에 걸맞은 처벌을 하면 된다.

구체적 행위들의 특성을 모두 추상해 버리는 성폭력 개념 과잉 확장과 그에 따른 실천은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에 오히려 역효과를 냈음을 솔직하게 돌아보자. 구체성 없는 막연한 개념을 거부하면 쓰디쓴 분열을 피하면서 연대를 더 잘 구축할 수 있기에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투쟁할 수 있다.

성 관련 분쟁의 새로운 해결 절차

성 관련 분쟁이 벌어졌을 때, 부르주아 사법 절차를 우선시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일반으로 말해, 필자가 속한 좌파 노동단체인 노동자연대는 진보·좌파진영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부르주아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첫째, 부르주아 국가기관의 보수적이고 편협한 법 적용 때문에 피해 호소 여성이 조사 과정에서 느낄 수치심 때문이고, 둘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셋째,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익적 검사와 판사들은 진보·좌파 단체들을 깎아 내리는 데 성폭력 사건을 의식적으로 악용하는 경우마저 있다(2장에 나온 민주노총 전 울산본부장 사건 참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사건 처리 경험이 풍부한 진보단체 내의 분쟁 해결 절차를 밟는 것이 피해호소인이 피해를 제대로 인정받고 필요하고 적절한 조처가 실행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피해호소인(과 가해지목인)이 부르주아 사법 절차에 의지하길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해야 한다. 그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단체 내에서 성 관련 분쟁이 벌어진다면, 그 해결 절차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돼야 할 것이다. 아래 내용은 위에서 제시한 대안적 개념에 바탕을 둔 것이다. 또한 노동자연대 규율과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쟁위원회)49의 내규에 포함된 내용이기도 하다.

① 성 관련 피해호소가 접수됐을 때, 우선 신속히 책임 있는 기구(노동자연대의 경우 분쟁위원회)가 진상조사부터 실시해야 한다.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혐의만으로 유죄’라는 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② 일반적 사건과 달리, 성 관련 사건에서는 피해호소인이 느낄 고통과 수치심을 고려해 그가 염려하는 사항들을 충분히 상의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한다. 가령 피해호소인이 원할 경우 대리인을 세울 수 있다. 또한 피해호소인의 동의 없는 피제소인과의 대질을 삼간다.

③ 피해호소인의 동의 없이 피해호소인의 신원이나 사건 내용을 누설해선 안 되고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

④ 피해호소인과 피제소인 모두 단체의 규율과 처리 절차를 따라야 한다. 진상조사 중에 개별적으로 일방적 주장을 공개해 진상조사와 징계 과정을 왜곡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⑤ 진상조사가 완료되기 전이라도 피해호소인이 부당한 압력 없이 피해를 호소하고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피제소인에 대한 활동 임시 정지 조처나 공간 분리 조처 등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의 임시 조처다.

⑥ 피해호소인과 피제소인 모두에게 소명 기회를 줘야 한다. 또한 사건과 관련 있는 제3자나 증인 등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할 수 있다.

⑦ 성 관련 분쟁은 개인들에게 각별히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다른 규율 위반 사건보다 각별히 신속하게 처리한다. 사건 접수부터 1심 징계(노동자연대의 경우 분쟁위원회의 평결)까지 처리 기한을 미리 정해 두고 피해호소인과 피제소인에게 사건 처리 시한을 미리 예상할 수 있도록 공지한다.

⑧ 징계결과에 이의가 있을 경우, 피해호소인과 피제소인 모두 재심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성폭력·성추행 사건 피해자의 경우, 다른 규율 위반 사건들보다 재심 청구 시한을 길게 허용한다. 성폭력·성추행 피해자들은 피해를 당한 후 얼마 간 자책을 하거나 트라우마 때문에 사건을 외면하고픈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이것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비춰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재심 청구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⑨ 징계(평결) 이후에도 당사자나 분쟁에 연루된 회원들이 가십, 억측,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처할 수 있다. 또한 피해자에 대한 보복 방지 등 사후조처를 취할 수 있다.

6장 여 vs 남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성폭력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실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성 해방의 전략과 연관 있다. 여성운동 내에서 성폭력 개념을 무차별적으로 확장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 미국에서였다. 당시에 68반란의 패배와 우경화로 여성 운동의 활력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일단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여러 여성 차별 쟁점들보다 각별히 성폭력·포르노 반대에 주력하는 운동을 펼쳤다. 이것은 일상적인 ‘남성 권력’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착취와 차별에 반대해서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여성이 일상 생활 속에서 남성 일반을 적대시하게 되는 결과를 빚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실제로 1975년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수전 브라운밀러는 《성폭력의 역사》(일월서각, 1994)에서 “강간은 모든 여성을 공포 상태로 묶어 두기 위한 모든 남성의 의식적인 위협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지배하게 된 게 여성 천대의 기원이며, 그 수단은 강간이고, 이것은 인류 역사 전반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여 vs 남 적대적 구도 속에서는 ‘모든 남성이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 모든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구도로 보면 일상적 남녀 관계에서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행들도 모두 ‘성별 위계관계’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강간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고, 심지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일반적 성관계와 강간의 구분도 모호해진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성폭력 개념을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행’이나 여성차별적 언행 전반으로 확장하는 데 주력한 배경에는 이런 성 적대적인 개념이 작용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1990년대에 한국에서 일어난 성폭력 반대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성별 위계를 지탱하는 남성 지배의 주요한 동인’이라거나, ‘강간과 정상적인 성관계는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성폭력 개념을 터무니없이 확대하려는 경향도 나타났다.

한국에서 1991년 소련 몰락 때문에 그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로 오해했던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이 사회주의적 전망을 폐기했고, 방향감각 상실과 사기저하에 빠졌다.50 원래 19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파업 전후로 주요 여성단체들이 표방한 전략은 사회 변혁적 여성 해방이었다. 가령 1988년에 열린 여성의전화 창립 5주년 기념 토론회에서는 ‘성폭력 해결을 위해 남성을 적으로 삼아 싸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 억압의 근본적 모순구조, 한국 사회의 제반 모순 구조에 대한 인식 속에서 그것의 변화를 위해 여성을 의식화, 조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소련 몰락 이후 1990년대 들어 여성운동 내에서는 계급투쟁과 근본적 사회 변혁이 아니라 ‘사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벌이는 ‘남성 권력’과의 투쟁이 강조됐다. 이런 변화 속에서 여성운동의 주류는 노동계급 투쟁과 조직으로부터 멀어져 개혁주의 노선을 따라 발전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개념들을 수용한 대학가의 ‘영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성폭력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 탄생했다.

이 두 조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성폭력 개념을 주관주의적으로 확장했다(다만, 개혁주의 여성단체들은 개혁입법을 목표로 했기에 성폭력을 규정할 때 행위의 객관적 실체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가의 일부 ‘영 페미니스트’들처럼 독단적인 ‘피해자 중심주의’나 ‘2차가해’ 개념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 vs 남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모든 것을 남성성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오히려 여성 해방의 전망을 제시할 수 없었다. 남성의 폭력이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고 본성이라는 주장은 결국 남성의 생물학적 구조가 문제라는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남성이 진보가 불가능한 존재이고 남성의 본질은 요지부동의 것이라면, 여성들은 어떻게 성폭력을 끝장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낭패감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인류 역사상 언제나 존재해 온 것도 아니고, 지금도 모든 남성이 성폭력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수렵·채집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부족들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남성과 여성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협력적으로 살았고, 이들 사회에서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성 차별이 체계적으로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상당수 남성은 여성 차별 관념을 가지고 있을지언정(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상당수 여성들도 이런 관념을 공유한다), 여성의 의사를 거슬러 강제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은 소수라는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여성 차별 관념을 많은 남성들이 수용할 때조차 전폭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수용하는 남성은 비교적 소수다. 다수는 모순된 방식으로 수용한다. 또한 여성 차별 관념이 곧바로 강간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없고, 이런 근거 없는 풍설은 성폭력의 원인을 남성의 생물학적 본능 탓으로 돌리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빠지거나 그런 논리에 취약해진다.

여성 차별의 근본 원인을 남성의 지배욕으로 돌리는 사상에는 남성들의 의식이나 태도 변화 가능성을 기각하는 시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의식이 1950년대나 오늘날이나 다 똑같다는 식의 주장은 참말이 아닐뿐더러 대중의 의식이 어떻게 바뀌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만약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도 남성들의 의식이나 태도는 변치 않는다고 본다면, 성폭력과 여성 차별 전반을 어떻게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인지 그 대안을 전혀 제시할 수 없다.

물질적 조건 변화와 무엇보다 인간들의 활동과 투쟁을 통해 남성들(과 여성들)의 의식은 바뀔 수 있다.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대거 진출했고, 노동자 투쟁이 종종 특정 성별만의 투쟁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이 함께 참가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오늘날,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도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투쟁 과정에서 많은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를 단지 집안일이나 하는 열등한 존재 취급하지 않고 함께 투쟁하는 동지로 보게 되는 경험을 한다. 또, 남성 대중의 평균적 의식을 보더라도 여성의 사회 진출이나 여성의 능력에 대한 평가 등 여성과 성에 대한 전반적 태도는 변화해 왔다. 오늘날 한국에서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남성보다 높다. 출산과 양육이라는 커다란 사회적 장애물이 여성에게 작용하기 전인 20대 후반의 여성 고용률은 남성과 별 차이가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학업 능력이나 직무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오늘날 20여 년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성폭력은 모든 남성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 즉 다수 남성이 권력에서 배제된 사회의 산물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 노동자들은 생산을 실제로 수행하는데도 생산수단을 전혀 지배하지 못한다.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은 노동자가 지배할 수 없고 오히려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의 권력을 키워 줄 뿐이다. 이런 상황을 마르크스는 소외라고 불렀다.

노동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즉 소외됨으로써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서도 소외된다. 포르노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섹스는 진정한 인간관계의 일부가 아니라, 수동적인 익명의 시청자를 위해 대상화된 형태로 묘사된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 삶의 다른 측면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낙담해서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수동적이고 냉소적이 된다. 노동자가 느끼는 무력감은 그들이 착취당하고 실제로도 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객관적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자본의 지배와 함께 자본주의의 지배적 관념도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여성 차별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계급적 행동을 낳기도 하지만, 때로는 개인적 차원에서 다른 노동자나 연약한 존재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성 차별이 체계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손쉬운 화풀이 대상이 되곤 한다.

자본주의는 착취를 통해 운영되는 체제이고, 이 때문에 자본가 등 지배자들은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부추긴다. 오늘날 여성들이 남성들만큼 교육받고 사회에 많이 진출했지만, 자본주의는 여전히 여성들이 집안에서 하는 구실을 강조한다.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건강하고 교육받은 노동력이 끊임없이 공급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누군가는 다음 세대 노동력을 길러야 한다. 즉, 차세대 노동자들이 제대로 먹고 입고 위생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엄청난 부가 쌓여 있음에도, 자본가들은 이런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사회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개별 가정, 특히 여성들에게 떠넘김으로써 비용을 절감하려 한다. 여성들을 집안일과 육아의 굴레에 묶어 두면서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이 필요하고 유지된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남성의 소유물 취급하는 낡은 관념이 유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성폭력을 끝장내려면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해야 한다.

이런 투쟁을 건설하는 데서 여 vs 남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여성상은 심각한 난점이 있다. 여성을 그저 피해자로, 특히 잠재적 성폭력 피해자로 여기는 관점은 오늘날 여성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무엇보다 투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문제의식은 페미니즘 운동 일각에서도 제기돼 왔다. 사회진보연대는 1990년대 후반 대학가에서 확산된 반성폭력 운동을 평가하며 이렇게 말한다. “위험과 피해를 부각하는 운동방식은 여성이 성욕의 권리를 가진 주체라고 주장하기 어렵게 만들었다.51 실무 경험이 매우 풍부한 한국성폭력상담소도 여성운동 단체들이 사용했던 성폭력 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폭력의 개념을 확장하면서 우리는 기존의 여성다움, 남성다움에 대한 규범을 그대로 수용하고 오히려 강화하게 되었다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 여성들의 경험으로 성폭력을 정의하고자 하였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여성들의 모든 성적인 경험을 폭력으로 해석해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 것입니다.52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체계적으로 차별받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여성들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노동에 참가하면서 스스로 싸울 능력이 커져 왔다.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받음과 동시에 해방을 위해 투쟁할 능력도 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하고, 그 강점을 실현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들(고용 안정, 임금 인상, 노동조건 향상, 직장 내 성희롱 반대, 보육 지원과 각종 ‘모성보호’ 정책 등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투쟁들)은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편견을 약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투쟁들이 여성들에게 주는 자신감이라는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 노동자들의 편견도 약화시킬 수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을 계급 관계에서 떼어내어, 여성 차별 문제를 설명할 때 남녀의 개인적 관계 외의 요인을 도입하면 여성 차별의 중요성이 가려진다고 본다. 하지만 위에서도 살펴봤듯이 남성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여성을 ‘잠재적 성폭력 피해자’로 오인하는 것이 오히려 일면적이고, 여성 해방에도 비효과적인 전략이다. 역사적으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집단적 투쟁을 개인의 라이프스타일 변화 문제로 대체시켜 버렸고, 그중 일부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주류 단체로 흡수됐다. 이는 여성 차별 일반에 도전할 운동의 힘을 되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성폭력을 없애려면 여성을 이중의 굴레로 묶어 두며 체계적인 여성 차별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해, 이윤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과 남성 대중의 필요를 위해 운영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 적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전략이 아니라 여성 차별과 성폭력을 낳는 사회에 맞서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이 함께 투쟁하는 전략이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이런 비전과 지향성 변화가 자연히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착취뿐 아니라 차별에도 반대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사회변혁 활동가들이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주장을 펴고 그에 근거한 조직과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부록. 마르크스주의 언어관으로 본 성폭력 개념 확장 53

언어가 정치적 쟁점이고 정치적 투쟁에는 언어를 둘러싼 다툼도 포함됨을 노동자연대는 잘 안다. 가령 좌파라면 ‘계집’이나, ‘깜둥이’, ‘변태’(성소수자)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광주항쟁에 참가한 민주주의자들을 광주의 ‘폭도’라고 부르는 사람은 극우 말고는 없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당신’ 대신 ‘너’라고 부르던 것이 스탈린 체제 하에서 다시 부활한 것을 사례로 들고 있다. “차르 치하 러시아 시대에 가장 인기 있던 혁명적 슬로건 가운데 하나가 사용자가 종업원에게 2인칭 단수 사용하기를 폐지하라는 요구였음을 그들[스탈린 체제의 관료]은 어떻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배반당한 혁명》)

사상의 변혁에는 새 용어와 새 개념이 포함된다. 처음에는 이상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그런 개념 용어가 새로운 세계관 형성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북한이나 중국, 옛 소련과 같은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부르지 않고 ‘국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마르크스가 추상적 노동, 가치, 잉여가치 등의 용어들을 도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분석에 매우 중요하다. 5·16이 ‘혁명’으로 불리는 상황에서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폭력’, ‘2차가해’ 등 근본적 여성주의자[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의 용어법은 그들 나름으로는 진리를 정의하는 일일지 몰라도, 일반적 용어법, 즉 단어가 어떤 의미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지 기술記述하는 일이라는 면에서는 유물론적이지 않고 관념론적이다. 다시 말해, 실제의 사회 변화를 언어가 반영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역할을 과대평가해, 마치 언어가 사회 변화(성폭력과 성차별 폐지 쪽으로)를 일으키기라도 한다는 듯이 언어의 개선으로써 실제의 개선을 대체하려 하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러시아 노동자 계급은 자신의 민주적 기관인 소비에트(평의회)를 통해 기존의 국가 기관들을 대체하고 나서야 비로소 새 노동자 국가를 통해 거리 이름 등을 바꾸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순간에 상당수 사람들이 일부 언어 개선을 제안해 그 제안이 현실화될 수 있는 건 실제의 운동과 무수한 대중의 의식 변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대중 운동과 대중 의식 변화는 물질적 조건들과 사회적 관계들이 실제로 변화한 것의 효과다. 가령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이 노동시장으로 유입되고, 피임과 낙태가 사실상 광범하게 실행되고,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는 등등의 변화가 여성의 성에 대한 폭넓은 대중적 인식의 변화(비록 충분하진 못할지라도)의 물질적 기초가 되고 있다.

물질적 조건과 관념, 실천에서의 이런 변화 덕분에 ‘계집’, ‘깜둥이’, ‘변태’나 ‘호모’ 등의 말들이 바뀌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 여성주의들의 ‘성폭력’, ‘2차가해’ 등 새 개념 도입은 괜시리 불공정하게 성적 경범죄와 성적 중범죄의 차이를 흐려 버리고, 마녀사냥으로 보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분위기나 보편화시키는 효과를 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하에서 보듯이 세계의 많은 우파 정부들이 성폭력 근절을 내세워 경찰력 증강과 가정 가치관 증진, 선거를 앞두고 보수적 분위기 조성 등을 자행하는 상황에 일조할 위험마저 있다.

언어 개선을 과대평가해 ‘성폭력’과 ‘2차가해’ 등의 용어를 법 제정에도 반영하고 싶어 했던 근본적 여성주의 입장은 거의 말이라는 수단에만 기대어 투쟁하는 학술적·문화적 특수계층과 선전주의적 종파들 사이에서 반향을 얻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 투쟁을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철학,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이 이 특수계층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상들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그 대신 언어가 사회적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특수계층과 그들이 영향을 미치는 성폭력 반대 운동은 사회의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경미하든 흉악하든 온갖 수준의 성적 부적절 언행을 다 성폭력으로 똑같이 취급하는 성폭력처벌법 제정을 원했다. 그러나 법이 적용되는 현실에선 이렇게 실행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성범죄 재판은 각각의 구체적 행위를 적시하고 그에 해당하는 법조문 적용을 하는 식의 관행이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언어가 사고와 의식의 개선을 크게 도왔고, 언어가 사고 내용과 사고 능력에 본질적이고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언어가 생기기 전에는 사고와 의식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 언어가 무로부터 의식을 구성하거나 규정하지도 않는다.

결국 외부의 물질적 조건과 인간이 정신적·육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바들, 또한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이 인간의 사고와 언어에 좀더 큰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이 모든 요인들이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이 진정한 현실이다. 그래서 언어는 단지 지배계급과 그 이데올로그들의 생각만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근본 모순들과 적대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인간 집단이나 인간의 조건이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현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오래지 않아 새 명칭에도 옛 함의가 따라붙을 것이다. 가령 ‘창녀’를 ‘매춘여성’으로, 다시 ‘매매춘여성’으로, 또다시 ‘성노동자’로 고쳐 불러 왔어도 그들의 조건과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나쁜 어감은 곧 되살아날 것이다. 미혼모를 비혼모로, 다시 싱글맘으로 불러 왔어도 그들과 사회의 조건이 바뀌어야 말의 느낌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상이한 수준의 성적으로 부적절한 언행을 모두 한 법률 안에 ‘성폭력’으로 뭉뚱그리고 학교와 노동조합 등 각 단체에서 성폭력 특별 교육을 시켜도, 경미한 비행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겠다는 근본적 여성주의들의 선의와 달리 절대 다수 남녀의 생각과 성 인지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성범죄가 줄었다는 증거도 없다.

노동자 계급과 다른 피차별 사회집단들의 운동 단체 안에서 성희롱이나 성추행, 강간 등을 없애거나 대폭 줄이려면 사용자들과 관리자들의 여성차별적이거나 성적 부적절 언행에 항의해 남녀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해 투쟁하는 가운데 연대의식과 동료의식을 키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 출판 중지와 수거 요구를 중단하라!’ 온라인 서명하기 http://bit.ly/chaekgalpi


  1. 정춘숙 의원은 한국여성의전화 전 상임대표다. 정의당 노회찬 의원도 공동 발의자 중 한 명이다. 이 법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성폭력처벌법 개정안 발의 ─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법 관행에 도전하는 취지”(정진희, 〈노동자 연대〉 196호)를 참고하시오.
  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노동자연대 성명 ─ 강간미수 공범 홍준표는 대선 후보 즉각 사퇴하라”(〈노동자 연대〉 205호)를 참고하시오. 홍준표 후보 사퇴를 촉구하는 여성·노동·사회단체 공동성명(〈노동자 연대〉 205호 보도)도 참고하시오.
  3. 한국성폭력상담소 엮음, 《성폭력 뒤집기》, 193쪽, 이매진, 2011.
  4. 같은 책.
  5.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최미진, 〈노동자 연대〉 166호)를 참고하시오. 이 글은 25년 전 최일붕(현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쓴 글을 오늘날 현실에 맞게 전면 개작한 것이다.
  6. “‘성폭력’ 용어와 마르크스주의 언어관”, 최일붕, 〈노동자 연대〉 140호.
  7. 이유미, “여성혐오의 먹잇감이 된 페미니즘”, 《오늘보다》 2호(2015년 3월).
  8. 김수경(민주노총 여성국장), “민주노총 조직내 성폭력 폭언 폭행 갈등의 유형과 후속조치”, 《민주노총 성평등 조직문화 확대를 위한 대토론회 자료집》, 3쪽,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2017년 3월 3일.
  9. 이선미·최김하나, “반 성폭력 운동의 길을 묻다 ─ 2006~2010년 상담 분석 및 반 성폭력 운동에 대한 고민과 과제”, 《2006~ 2010년 한국여성민우회 상담사례분석 토론회 ‘5,785개의 물음표를 풀다’ 자료집》, 83쪽,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1.
  10.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허민숙 연구교수, “고소 취하하면 ‘꽃뱀’? 성폭력 피해자가 고통받는 이유”, 〈오마이뉴스〉 2017년 1월 19일 자.
  11. 김도훈, “빗나간 ‘공동체의 정의’,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는다”, 〈한겨레〉, 2016년 3월 4일 자.
  12. 같은 글.
  13. 이선미·최김하나, “반 성폭력 운동의 길을 묻다 ─ 2006~2010년 상담 분석 및 반 성폭력 운동에 대한 고민과 과제”, 86쪽.
  14. 재판에서 방관한 남학생의 변호는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인 김현성 변호사가 맡았다. 김 변호사는 2006~2008년 노회찬 의원의 법률 보좌관을 지낸 바 있다. 2015년 초 천주교인권위원회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전쟁없는세상, 청년좌파 등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을 때 김현성 변호사가 이 헌법소원의 대리인이었다. 김 변호사는 지금도 천주교인권위원회 공익소송팀에서 양심수들을 무료 변론하고 있다.
  15. 지금까지 말한 A단체는 노동자연대다.
  16. 이 과정은 검찰이 기소해 시작된 K의 강간 형사재판에서 밝혀졌다. 또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의 《공동체내 성폭력 바로 보기 – 민주노총내 데이트 폭력 사건 처리 과정과 결과에 관한 보고서》(2015년 11월)에도 나와 있다.
  17. 이 사건은 친고죄 폐지로 인해 여성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폭력 범죄가 기소됐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난점도 보여 준다. 따라서 반성폭력운동은 이에 대한 보완책도 고민해 봐야 한다.
  18. 당시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여성위원장의 법정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에서 피해자[H]가 원하는 대로 빨리 사과문이 나가야 이 사건이 빨리 정리가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당시 피해자[H]가 원하는 대로 사과문이 게시되었다”, “피고인[K]은 사과문 중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본부장이라는 공인의 직책에 있는 자로서 빨리 사건을 마무리해야 하였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요구에 따라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사과문에 그대로 적시되었다.”(판결문에서 인용)
  19. 가령, 앞서 사례로 든 ‘동영상 사건’의 경우, 노동자연대 규율과분쟁조정위원회는 “노동자연대 회원이 동영상을 강제로 보여 준 공범”이라는 여성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여러모로 불충분했기에 이 혐의에 대해선 “증거 불충분” 평결을 내렸다. 하지만 설사 그 회원이 공범이 아니라 수수방관만 했다 해도 그 행위는 사회주의자답지 않다며 경고 징계를 내렸다.
  20. 이선미·최김하나, 《반 성폭력 운동의 길을 묻다 ─ 2006~2010년 상담 분석 및 반 성폭력 운동에 대한 고민과 과제》, 82쪽.
  21. Y는 현재는 이 단체 소속이 아니다.
  22. ‘2017 공동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 ‘2차가해피해자중심주의’’, 2017년 5월 15일.
  23. 엄혜진, “운동사회 성폭력 의제화의 의의와 쟁점 — ‘100인위’ 운동의 수용과 현재적 착종”, 《페미니즘 연구》, 2009년 봄호, 한국여성연구소.
  24. 김주희의 2017년 3월 19일 자 SNS.
  25. 김주희, “속도의 페미니즘과 관성의 정치”,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16 겨울. 김주희는 개개인을 가/피해 구도로 몰아넣는 방식이 “성폭력을 조장하는 구조”인 “여남 권력관계”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본다. 성폭력의 원인에 대한 김주희의 분석은 노동자연대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차이가 크지만, 최근 페미니즘 일각의 성폭력 개념 자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해 인용한다.
  26. 성화(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우리는 공유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토론회 자료집》, 105쪽,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2.
  27. 박희정, 《당신,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 길찾기, 2012; 무타 카즈에,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나름북스, 2015 등.
  28. 변혜정, “변혜정 교수의 섹슈얼리티 강좌”, 〈여성신문〉, 2008년 8월 22일 자.
  29. 이소희,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공생의 조건을 고민하기까지”, 《2017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토론회 자료집》, 9쪽,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7.
  30. 같은 자료집, 10쪽.
  31. 같은 자료집, 13~14쪽.
  32. 2006~2010년 한국여성민우회 상담사례분석 토론회 5,785개의 물음표를 풀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1.
  33. 권김현영,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대해”, 〈허핑턴 포스트〉, 2017년 3월 14일 자.
  34. 같은 글.
  35. 같은 글.
  36. 권김현영, “2차 가해’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에 대해”, 《2017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토론회 자료집》, 49쪽,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7.
  37. 같은 자료집, 54~55쪽.
  38. 권김현영,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대해, 〈허핑턴 포스트〉, 2017년 3월 14일 자.
  39. 권김현영,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에 대해”, 56쪽.
  40. 전희경, “계속, 끝까지, 페미니스트로”,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린비, 2017.
  41. 같은 책, 193쪽.
  42. 정진희, “운동권 내 성폭력 가해자 명단 발표, 어떻게 볼까?”, 《열린 주장과 대안》 8호, 2001년 2월.
  43. 전희경, “계속, 끝까지, 페미니스트로”, 183~184쪽.
  44. 같은 책, 184쪽.
  45. 100인위에 대한 전희경의 자세한 평가는 전희경, “‘100인위’가 한 것과 하지 않은 것”, 《2017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토론회 자료집》(학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7)에 나와 있다.
  46. 장임다혜, “‘피해자 중심주의‘2차 가해’ 개념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 절차의 문제, 《2017 공동체 내 성폭력을 직면하고 다시 사는 법 —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토론회 자료집》, 71쪽,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7.
  47. 전희경, “계속, 끝까지, 페미니스트로”, 186쪽.
  48. 여 vs 남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에 대해서는 이 책의 6장을 참고하시오.
  49. 노동자연대 분쟁위원회는 회원이 연루된 분쟁을 조정하고, 규율 위반을 조사·처리하는 기구다.
  50. 필자의 소속 단체인 노동자연대가 속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소련이나 동유럽, 중국, 북한은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과 전략인 ‘아래로부터 노동자 권력 아무런 공통점이 없고 자본주의 국가의 한 변형태(국가자본주의)일 뿐이라고 봤다. 따라서 소련과 동유럽 붕괴 후에도 사기저하와 방향감각 상실에 빠지지 않고 사회변혁적 여성 운동의 전망을 일관되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토니 클리프가 지은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 사회였는가》(책갈피, 2011)를 참고하시오.
  51. 이유미, 《지금 여기 페미니즘》, 사회운동, 2015.
  52. 한국성폭력상담소 웹사이트.
  53. 이 글은 “성폭력용어와 마르크스주의 언어관”(최일붕, 〈노동자 연대〉 140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