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제국주의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지정학적인) 것을 결부시켜 사고하며, 덧붙이자면 자본주의의 발전 궤적이라는 더 큰 맥락을 이해하는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 이 책에서 내가 답하고자 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룩셈부르크와 부하린 등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들이 분석했던 것과는 여러모로 크게 달라진 오늘날의 세계경제에 고전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고전적 제국주의 이론가들은 모두 《자본론》의 내용에 친숙했으며 이를 자신들의 분석과 논쟁에 활용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프로젝트를 계승·발전시키려고 그들이 채택한 주된 전략(당대의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단계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규명한 추상적 추세들과 당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관찰되던 구체적 추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었다. 1장 4절에서 봤듯이 이런 약점은 고전적 제국주의 이론가들이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이론을 대체로 간과하고 오히려 1930년대의 대공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 불비례설에 의존한 탓에 더 증폭됐다. 그나마 예외였던 룩셈부르크와 그로스만은 자본주의가 경제적 붕괴로 나아가는 내재적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는데, 그들의 설명은 첫째로 완전히 부적절했고, 둘째로 자본주의의 붕괴 경향과 그것을 상쇄하는 경향에 대해 어느 정도의 상대적 중요도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도 불분명했다. 이렇게 본다면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의 올바름을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여러 관계·메커니즘·경향에 관한 일반 이론을 구체적인 경제적·지정학적 설명과 성공적으로 접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와 국가 체제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저작에는 일관된 국가론이 없다. 그보다는 상이한 이론들의 씨앗들이 뒤섞여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도구주의(국가는 단지 경제적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설)와, 그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구조주의다. 구조주의 국가론은 국가는 폭력 수단들을 집중시키고 독점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형성된 특수한 기관들의 집합이며, 그러한 기관들은 본질상 착취자들의 이익에 봉사할 수밖에 없으므로 노동계급이 스스로 해방되려면 국가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명백히 첫째 이론은 제국주의론에 접목시킬 경우 정치적(지정학적) 현상에 대한 환원론적 설명으로 빠질 수 있다. …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주로 독일과 영국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국가 도출 논쟁’에서 존 홀러웨이와 솔 피초토가 주장한 견해를 비판하면서 바커는 이렇게 썼다. “국가에 대한 그들의 논의는 부적절한 추상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특히 국가를 마치 단수의 존재인 양 취급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국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체제이며, 자본주의 국가는 국민국가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 형태를 논할 때는 국가가 계급 지배의 수단이라는 측면과 부르주아 집단들 간의 경쟁 수단이라는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
마르크스의 기존 이론에 국가를 접목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자본론》 3권의 골격을 이루는, 잉여가치가 여러 형태의 수입으로 분할된다는 분석을 확장하는 것이다. 바커가 지적했듯이 가치론의 관점에서는 세금도 국가의 몫으로 돌아가는 잉여가치의 일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방법은 (역시 바커가 지적했듯이) 국가를 단수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복잡한 결정 요인들의 집합으로서 국가 체제를 논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국가 체제도 이와 비슷하게, 즉 자본주의 이전에 등장했지만 결국 자본주의 양식에 편입되고 거기에 맞추어진 사회 형태로 바라보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우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에 반쯤 도달했다. “국가의 영토성과 주권은 비록 자본주의가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완성됐다고는 할 수 있다. 오직 정치와 경제의 분리만이 명실상부한 주권국가를, 즉 다른 형태의 ‘정치적으로 형성된 재산’의 도전을 받지도 않고 사법권 영역이 서로 겹치지도 않는 주권국가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우드는 지정학적 경쟁을 본질상 전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고집스러운 성향 때문에 이 논지를 더욱 발전시키지 못한다. …
물론 자본주의가 “기존의 영토적 국가 체제를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런 국가 체제가 지금껏 존속해 온 것이 과연 순전히 우연이냐는 것이다. 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초국가적 제국의 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됐다. 그 지역은 바로 16세기 말에 합스부르크 치하 스페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켜 독립 공화국을 수립한 네덜란드 북부였다. 그러나 독립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유럽이 복수 국가 체제로 발전하고 있었던 경향을 더 강화했다(3장 3절 참조).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불균등 결합 발전만이 영토적 국가 체제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요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예컨대 집단적 정체성(주로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은 국가 간의 구체적인 영토 분할과 그에 대한 대규모 정치적 투자를 설명해 주는 특히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균등 결합 발전 경향이 세계를 여러 개의 국가로 갈라놓은 강력한 원심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제국주의 시대 구분
1. 고전적 제국주의(1870~1945년): 이 시기는 홉슨과 카우츠키, 룩셈부르크와 힐퍼딩, 레닌과 부하린이 분석한 단계다. 아르노 메이어가 말한 ‘30년 전쟁’을 낳은 제국주의 시대다(4장 2절 참조).
2. 초강대국 제국주의(1945~91년): 이 시기는 세계가 미국과 소련이 이끄는 두 진영으로 지정학적·이데올로기적으로 양분된 시대다(4장 3절).
3. 냉전 이후의 제국주의: 이 시기는 1991년 이후의 시기로, 미국이 우위를 누리면서도 경제력의 세계적 분포가 바뀌는 시대다(5장).
제국주의를 이렇게 시대 구분하게 되면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상호관계가 복합적인 동시에 변한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계속되는 지정학적 경쟁
그렇지만 유럽연합이 단기적으로 미국과 ‘대등한 경쟁자’로 떠오를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구조적 이유가 있다. 그렇게 되려면 유럽연합이 경제력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유럽이 미국과 비교할 만한 수준의 군사력을 갖추는 데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 …
미국이 중국을 자국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다고 해서 미·중 간의 충돌이 필연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 미국의 대(對)아시아 전략은 일본의 전략적 종속 상태를 유지하고 더 큰 틀에서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들의 동맹을 구축하는 것이다. 아시아의 분열돼 있고 경쟁적인 지정학적 구조는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
미국은 여전히 지배적인 자본주의 강대국이지만 그 지위를 지키려고 유럽·동아시아·중동, 이 3대 핵심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 같은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볼 만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세계의 경제력 분포 변화로 말미암아 미국의 힘은 제한되고 다른 주요 국가들의 선택권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는 장기적인 과정일 것이고 현재로서는 미국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훨씬 앞서 있다. 그러나 일단 세계화에 관한 온갖 과장들을 걷어내고 보면 세계는 점점 더 분열이 심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미국이 이러한 세계를 관리하기는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둘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주장과 달리 세계경제는 결코 무한한 성장과 번영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조적 경향을 반영하는 2007~08년의 신용 경색과 뒤이은 경제 위기가 보여 주듯이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그 자체로 강력한 불안정 요인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에 미칠 영향은 예측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자국 헤게모니를 영속화하려고 자국의 두 가지 핵심 우위(군사적 우위와 주요 국제 기구 및 지역 기구들의 지휘자로서 갖는 위상)를 활용하려 드는 미국의 습관적 충동은 큰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를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이라크 전쟁이지만, 2008년 8월의 러시아·그루지야 전쟁과 그에 따른 국제적 위기도 그러한 사례다. …
따라서 21세기의 세계 질서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번영을 누리는 강대국들이 합의에 기초해서 서로 협조하는 체제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는 제국의 흥망성쇠라는 모종의 초역사적 순환 법칙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생산양식이 빚어낸 현대의 지정학적 논리를 반영한다. 따라서 그 해결책은 더 많은 자본주의(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겠지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대안으로 대체하는 것에 있다.